1. 개혁 신앙의 핵심, 십자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부패한 로마카톨릭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당시 로마카톨릭이 강조하던 ‘영광의 신학’은 거짓된 신학이고, 참된 신학은 십자가뿐이라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은 말한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말한다. ‘그를 믿으라.’ 그러면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마르틴 루터, 하이델베르크 논제 26)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공로에 의지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적 신학’으로 로마카톨릭 신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십자가 신학’은 위와 같이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오직 믿음’에 초점을 맞춘 ‘은혜의 신학’으로 개혁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 수직과 수평, 두 관계의 크로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개혁자들의 신학 사상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십자가 은총’이다. ... 중세를 끝장낸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신학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재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타락하고 몰락할 때마다 ‘십자가’가 재등장하였다. 교회의 근거이자 존재 이유인 ‘십자가’를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 교회는 다시 세워지는 역사를 반복하였다.”(아이굿뉴스, 2019.1.22)
위와 같이 개혁자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재발견해왔는데, 사실 십자가는 수직 막대와 수평 막대가 하나로 크로스된 모양으로, 수직 막대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수평 막대는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연히 우선시 되어야 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래와 같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은 빌라델비아(Philadelphia) 교회의 이름은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필로스(philos)’와 형제를 의미하는 ‘아델포스(adelphos)’의 합성어로 ‘형제 사랑’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과의 수직적 사랑은 물론, 당신의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함께하는 수평적 사랑도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직 막대와 수평 막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수직적 연합과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수평적 연합은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모세 개인의 하나님이 아닌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즉, 특정인이나 특정 시대에만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과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함께하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행 7:25)
위와 같이 조상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40세 때 모세는, 왕자의 위치와 애굽의 학술 등 좋은 조건들을 가진 자기를 통해 일하실 자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조건들이 모두 사라진 80세가 되었을 때에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타오르는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조상의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 8:29~31)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 9:17)
위의 내용처럼, 성경을 탐독해도 깨닫지 못했던 구스 내시나 율법을 따라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인 빌립과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전달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믿음을 먼저 허락하신 당신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후에 믿는 자들도 그 믿음을 함께 공유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2)
또한, 위와 같이 초대 교회 당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 안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 등 소요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믿음 위에 세워져 있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하나이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니케아 신경)
사도신경과 아나타시우스 신경과 함께 기독교의 3대 신경으로 불리우는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o-Constatinopolitanum)에서는 참된 교회의 4가지 속성으로 위와 같이 유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등을 드는데, 그중 3가지 속성인 유일성, 보편성, 사도성은 앞선 믿음의 선진들과의 관계, 다시 말해 수평적 만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위와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믿음의 지식을 서로 공유하여 하나가 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엡 1:10)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
“몸이 하나”(엡 4:4)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이 이루어진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