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3장 – 욥의 변론>
- 욥은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의 불친절에 대한 분노를 과격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욥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논쟁이 된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자로서 그들에게 도전하고 있다(1, 2절). 그들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에게 했던 것처럼, 그가 자기 칭찬이 아닌 자기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지식을 추천하도록 강요했었다. 그가 이전에 말한 모든 사실들은 그의 눈으로 본 것으로, 여러 예문에 의해 확증되었고, 또한 그의 귀로 들은 것으로서, 여러 관계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화로우심 그리고 통치권을 보고 들을 뿐만 아니라, 깨닫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가 생각했던 이것은 그가 전에 말했던 것을(12:3) 정당화 시켜 줄 수 있으니 이것을 그는 여기에서 반복하고 있다(2절).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그리하여 내가 너희에게 배우러 갈 필요가 없나니, 지혜에 있어서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논쟁에 빠져드는 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그들 스스로를 높이고, 그 형제들을 비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기도 해야 한다. 욥은 그들을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3절).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노라.” 그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였던 것 같다. “나는 너희와 이야기하여 더 이상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내가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는 너희처럼 내게 이렇게 가혹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방백은 그 신하들보다도 더 온화하고 참을성 있게 그리고 겸양의 태도로써 불쌍한 자들의 청원을 들을 것이다. 욥은 그의 친구들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변론하고자 하고 있다.
- 그들은 욥을 야비하게 속였고, 그것은 불친절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의 치료를 맡았고, 그의 의사가 되어 주는 척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쓸데없는 의원이었다. 그들은 그의 증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에게 처방을 내릴 줄도 모르는 쓸데없는 의원, 즉 큰 도움을 주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에게 어떠한 유익도 주지 못하는 돌팔이 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말해 준 것들로 인해 결코 지혜로와지지 않았다. 이처럼 상한 심령과 상처 난 양심을 지닌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모두가 쓸데없는 의원이므로, 어떤 사람이 그 의원들에게 모든 비용을 들이더라도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해진다(막 5:26). 그는 꾸준히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15절). 비록 그가 우리를 죽이실지라도 우리는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즉, 그가 대적으로서 우리를 치시는 것 같이 보일 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친구로서 기뻐해야 한다(23:8-10).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렘 24:5). 우리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귀중한 모든 것, 심지어 생명 자체까지도 바쳐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히 11:35). 우리는 약속을 이루기 위한 모든 방법이 다 완성될 때까지, 그것을 믿어야 한다(롬 4:18). 우리는 즐거워할 것이 없을 때,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하며, 비록 우리가 현재 그로부터의 위로를 발견할 수 없다하더라도, 그에게 매달려야 한다. 죽어가는 순간에 우리는 살아있는 위로를 그로부터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가 우리를 죽이실지라도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욥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 협의에 대한 예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허락만 하신다면 심지어 하나님과도 그 주장을 논의하기를 원하고 있다(20-22절).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원했었고(3절),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원하고 있다.
<욥기 14장 – 인생의 무상함>
-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 생명의 근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진실로 생명의 큰 근원이시다. 왜냐하면 그가 생기를 인간의 코에 불어 넣으셨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호흡을 시작하고 그때부터 생명의 덧없음에 부딪쳐야 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1절). 이것은 하와라고 불리우는 첫 번째 여인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살아 있는 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유혹에 속아서 최초로 범죄한 이 여인에게서 우리 모두가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의 날들을 짧게 하고, 슬프게 하는 죄와 타락이 그녀로부터 유래되었다. 또는 그것은 제각기의 사람들에게 직접 관련된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자는 약한 그릇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가 어머니를 닮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강한 남자는 그의 힘이나 그의 아버지의 힘에 영광을 돌리지 말고, 그가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용사도 여인같이 된다”는(렘 51:30)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의 더러움(4절).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만일 사람이 죄인인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면, 그는 죄인 이외에 달리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25장 4절을 보라.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깨끗한 시냇물이 더러운 물 줄기에서 나오거나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결한 자손이 부정한 부모에게서 나올 수 없다. 우리의 습관적인 타락은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우리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그것은 우리의 뼈 속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의 피는 합법적인 범죄로써 획득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전병으로 더럽혀져 있다.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 우리 주 예수는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고 기록되어 있다.
- 인간 생명의 본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꽃이며 그림자이다(2절). 꽃은 시든다. 그것의 모든 아름다움은 곧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그림자는 빨리 지나간다. 그리고 그 존재는 곧 사라지고 밤의 장막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다. 인간 생명의 짧음과 불확실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 여기에서 생명은 달이나 년 수로 측정되지 않고, 날 수로 측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날에 우리의 마지막이 올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날 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으며, 처음 조상들의 날수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적다. 그것을 영원과 비교할 때는 더욱 적다. 또한 우리는 ‘사람의 나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대로 다 못 살고 간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욱 적다. 사람은 때로 나오자마자 쇠하여지고, 모태에서 나오자마자 요람에서 죽으며 이 세상에 와서 그 일을 하자마자, 즉, 그의 손에 쟁기를 잡게 되자마자 곧 사라지기도 한다. 즉시 쇠하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잠시만이라도 어떠한 모양으로든 머물지 아니하고, 그 형적이 곧 사라진다.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생명은 이와 같다(고전 17:31). 죽기 전 상태, 그는 소멸된다. 그는 서서히 소멸되고, 생명의 저장물을 빨리 소모시키면서, 날마다 죽어간다. 병과 노쇠는 몸과 힘과 아름다움을 소멸시킨다. 죽는 상태, 사람은 그 기운이 끊어진다. 영혼은 육신을 남기며, 그것을 주신 하나님, 영들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죽은 후의 상태, “그가 어디 있느뇨?” 그는 전에 있었던 곳에 없다. 그의 처소는 더 이상 그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 데도 없느뇨?” 아니다. 그는 어디엔가 있다. 그리고 기운이 끊어진 자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기운이 끊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영들의 세계로 영원 속으로 사라지며, 더 이상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한다.
<욥기 15장 – 엘리바스의 책망>
-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욥과 바로 충돌하고 있다. 그것은 욥이 그와 그의 동료들의 말을 반박했으며,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그들의 말에 순종하거나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만한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법도를 주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는 이처럼 그것을 매우 잘못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면에서 그들처럼 말할 수 없는 자들을 무식하고 완고한 자로서, 그리고 아무 쓸모 없는 자로서 비난한다.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중죄를 들어 욥을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그 자신이 사곡한 자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엘리바스는 욥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하여 그를 책망하고 있다(2, 3절). 욥은 전에 지혜로운 자로 명성이 나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명성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지혜가 그에게서 떠나갔으므로 그의 말은 지나치고 별 유익이 없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빌닷도 그렇게 그의 서두를 시작했고(8:2), 소발도 또한 그러했다(11:2, 3). 논쟁자가 노했을 때는 그의 형제를 ‘라가’ 그리고 ‘미련한 자’라고 부름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내려질 저주를 잊고서 상대방의 이론을 필요 이상으로 건방지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해 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헛된 지식, 유익함이 없으므로 무가치한 소위 그릇된 과학이 너무도 많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재능에서 우러나오는 기발한 착상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부풀게 만드는 지식이다. 자기의 머리 속에 어떠한 헛된 지식이 들어있든지 간에, 만일 그가 지혜로운 자로 간주되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발설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마땅히 그 자신과 더불어 죽도록 해야 한다.
- 엘리바스는 욥이 그의 친구들의 권고와 위로를 경멸했다고 해서 그를 책망하고 있다(11절). “하나님의 위로를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엘리바스는 욥이 그에게 주어진 그와 그의 친구들의 위로를 굉장히 소홀히 여기고, 그들의 모든 말을 진실되고 중요한 것으로 환영하지 않은 것을 나쁘게 여기고 있다. 그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는 매우 훌륭한 말을 들려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욥에게 적용시켰을 때 그들은 매우 형편없는 위로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을 위대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매우 타당한 이유와 함께 그것을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으로 여길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명한 이들이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갈 2:6). 엘리바스는 이것, 실상은 매우 귀한 하나님의 위로를 욥이 마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경시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욥이 하나님의 위로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이러한 고통을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위로, 특히 하나님 안에 있는 위로는 큰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오만한 죄인들의 흥함은 이처럼 비참하게 끝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게 하라”(31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을 보고 우리 스스로 주의하도록 하고 흔들리는 갈대 위에서 우리는 머물지 않도록 하자. 그것은 언제나 의지하려는 사람을 쓰러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