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0장 – 욥의 원망>
- 욥의 원망 속에는 강한 결심을 주장하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1절). 그의 사정을 하나님께 탄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위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욥은 그의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긴장을 풀고자 결심하고 있다. 그는 격렬한 언어로 시작하고 있다. 은혜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는 자연 그 자체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욥은 살기에 곤비했고, 또 어떠한 방법으로도 편안함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원망의 말을 터트리기로 결심하고 있다. 그는 격렬한 손에 의해 그의 영혼을 토로하려 하지 않고, 격렬한 말에 의해 그의 영혼의 비통함을 토로하려 했다. 손해를 입은 자들은 그들이 말할 허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폭한 감정은 제어되지 않은 욕구와 같이 그들의 탈선을 그들도 어쩌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변명으로서 그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에 굴레를 씌우듯이 지혜와 은총으로 우리의 입을 막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욥의 타락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으나 은총이 그 말 속에 있다. 그는 원망할 것이나 그것은 ‘그의 원통함을 발설하는 것’ 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비방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불의하거나 불친절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책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논쟁하시고 그를 대적하여 행하시는 근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대체로 그 까닭이 그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 모든 수욕을 기꺼이 참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표현하려는 것은 그의 정해진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괴로움에 대한 것일 것이다. 만일 내가 잘못 말한다면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거하는 죄’이며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비통함이다.
- 그는 하나님께 겸손히 탄원하고 있다. 그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말은 기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하나의 훌륭한 기도로 받아들이고 싶다(2절). 그 기도는 환난의 고통에서 그를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죄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롬 8:1). 그들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주께 징계를 받는다(고전 11:32).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그 무엇보다도 이것을 면제되기를 바라야 한다. “비록 주께서 나를 다루시기를 즐거워한다 하실지라도 나를 정죄하지는 마옵소서. 나의 친구들은 나를 정죄하나 주께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그의 환난 당하는 참된 이유를 알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역시 죄되는 일이었다. 주여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실 때 그는 우리로 더불어 쟁변하시는 것이며, 그가 우리와 쟁변하실 때 거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다. 우리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아무 이유 없이 화내시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 회개하고 가슴 아프게 느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더불어 쟁변하도록 만든 그 죄를 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할 때는 선한 양심을 사용하여 창세기 42장 21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성실하게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욥기 11장 – 소발의 연설>
- 지혜롭고 선한 자들까지도 논쟁의 열기로 인해 때로 과격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일례로 여기에서 소발을 들 수 있다. 엘리바스는 매우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4:2). 빌닷은 욥에게 약간 거친 태도를 취했다(8:2). 그러나 소발은 무자비하게 그를 공격하고, 매우 거친 말을 퍼붓고 있다.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믿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겠느냐?” 이것이 욥을 위로하는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를 설득시킬 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공의를 옹호하는 자로서 합당한 태도인가? 논쟁에 몰두한 자들은 그들의 마음도 통제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지혜와, 경각심과 결심은 우리가 여기에서 소발의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 주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게 될 것이다. 소발은 욥을 지나치게 묘사하고 있다(2, 3절). 그는 욥을 그의 이야기에서 나태하고 건방진 자로서 그리고 혼자서만 떠들기를 좋아하는 자로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욥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를 ‘비웃는 자’ 라고 일컫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를 징계하는 하나의 처벌로서 볼 수 있다고 한다. 형제들과 다투고 싸우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그 형제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구실을 붙이고, 옳든 그르든 그들을 가장 추악한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앞 장에서의 욥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해 보았고, 그 속에서 매우 유익하고, 선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즉 그의 원칙은 옳았고, 그의 이론은 강했으며, 그의 표현들은 무게 있고도 신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격렬하고 감정적인 발언은 허심탄회하게 너그러운 태도로 용서해 주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발은 여기에서 불쾌하게 욥을 다음과 같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가 말한 것을 결코 다시 신중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의 사정을 호소하고, 그의 책망자들을 굴복시키기를 원하면서 단지 많은 말로 시끄럽게 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지껄여 버리는 자라고 욥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으로써 그가 의롭다함을 얻겠는가? 많은 말들이 유력한 탄원을 대신할 것인가? 그가 언어의 미사여구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가 말을 많이 하여도(마 6:7), 하나님이나 어떤 지혜로운 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욥은 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실되고 온전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처럼 오해받고 있었다. 엘리바스와 빌닷은 욥에게 대답을 해 주었고 그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했다. 그러므로 이미 괴롭힘을 당한 자에게 이처럼 과격한 공격을 하고 있는 이 장면은 소발의 관용을 나타내는 일례로 볼 수 없다.
- 소발은 욥이 말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욥을 책망하고 있다(4절). 욥이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그를 책망하고 있다. 욥은 그렇게 말한 일이 없었다. 그는 사실상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10:7)라고 말했으며, 또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흠없는 완전을 결코 가장하지 않았다. 그는 실상 그들이 그를 책망한 것과 같은 사곡한 자가 아님을 주장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그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정당한 암시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이 참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말과 행동을 최대한으로 선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다투는 자들은 흔히 그것을 가장 나쁘게 받아들이기 쉽다. 소발은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욥을 대적하시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욥이 그르다는 사실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곧 나타나시어 욥을 침묵시키고 정죄하셔야 한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싸움에 관여하시리라는 것을 지나치게 확신해 버리고, 만일 그가 말씀하시기만 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 편이 되시어 우리를 옹호하는 말씀을 하시리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여기에서의 소발도 역시 그러했다. “하나님은 입을 여시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그는 분명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입을 여셨을 때, 그는 이 세 친구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불리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모든 논쟁을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해 주도록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실대로 판단해 주실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서둘러 그 판단에 호소하고, 그 경쟁자를 대적하여 그것을 미리 판단하는 자들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다. 소발은 욥을 설득시키기에 실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그에게 납득시켜 주시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각자가 모두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의 모든 환난 속에서 기쁘게 고백할 만한 것들이다.
<욥기 12장 – 욥의 반박>
- 여기에서 욥이 그들의 친구들에게 향한 반박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매우 날카로운데, 그것은 교만하고 비웃기 잘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망과,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욥은 그들 스스로에 대한 그들의 자만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그의 지혜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견해에 대해 그것은 연약하고 어울리지 않으며, 비웃을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에 제시하고 있다. 욥은 그들에 대해 그들은 지혜를 독점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2절). 그는 빈정거리며 말한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는 너희들 스스로를 모든 인류에게 지시하고 법도를 전하기에 합당한 자들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진실과 거짓, 악과 선을 구별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너희의 판단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평가하고 심리해야 하는 표준으로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의 돛은 너희보다 낮아야 하며, 옳든 그르든, 우리는 너희가 말하는 대로만 말해야 하고 너희 세 사람만 다수이고 결정권을 가까이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들 자신이 다른 모든 인간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거나, 마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대담하고 거만하게 이야기하고 행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죄악스런 일이다. 그는 말을 계속하고 있다. “너희는 현재에도 너희처럼 지혜로운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고, 너희가 떠나면 이 세상은 모두 미련한 자만 남게 되고, 너희 해가 지면 암흑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우리들이 없어지면 말할 수 없이 큰 손실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이 남아있게 하시며, 그의 일을 행하기에 우리보다 더욱 합당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들과 선한 자들이 죽을 때 지혜와 선함이 그들과 함께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로가 된다. 어떤 사람은 소발이(자기 생각대로) 욥과 다른 사람들을 들나귀 새끼에 비교한 것을(11:12) 여기에서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나귀이며, 너희들만이 사람이구나.” 욥은 지혜의 선물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재판관의 자격을 요구할 수 있는 자로서 그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3절). "나도 너희 같이 총명(마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다. 나도 너희와 같이 거룩한 섭리의 방법과 의미를 판단할 수 있으며, 그 어려운 부문을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을 높이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다"고 말한 것은, 자기 자신을 크게 칭찬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나도 너희와 같이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라는 말도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능력의 소유자라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것에 대해 그와 그들이 어찌 자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희가 사실이라고 말했던 것들은 너무도 자명한 일들이고 일반적인 논제이므로, 너희나 나처럼 훌륭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 그리고 그들 자신의 강단의 학자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저지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그들과 다투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우리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 판단한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 보다 못하기는커녕 더 우월할지도 모르며, 그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롬 14:3), 또한 선생인척 해서도 안 된다(약 3:1). 한편, "우리는 다 형제이다"(마 23:8).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그들과 더불어 논쟁을 벌이도록 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이성이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 그런 가운데 있는 욥을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욥은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아뢰어 부르심을 들은 자’를 조롱을 당한 자, 곧 욥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풀이는 16장 20절과 일치하고 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노라.” 우리 친구들이 우리의 호소에 귀를 막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시다. 그들이 우리를 정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결백함을 아신다. 그들의 우리를 악용한다 하더라도, 그는 우리를 선용하실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거슬리는 대답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절한 대답을 주실 것이다. 그의 경우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매우 흔하다는 생각이었다.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과 순전함, 인간에 대한 그의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경건함 마저도 비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과 순전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매우 영예가 되는 면은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그에게 약간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이 있는 것을 비웃는다. 경멸당하고 조소당하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자들이 옛날부터 당하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벧전 4:12). 뿐만 아니라 만일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을 가혹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 선지자들 뿐만 아니라 교부 시대의 성도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다"(마 5:12). 그런데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욥은 그것의 참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부유하고 편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궁핍 속에 빠진 그를 멸시했다.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들을 매일 볼 수 있다. 형통하는 자들은 칭찬을 받으나, 몰락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타도하라”는 말이 퍼부어진다. 실족하는 자 그리고 환난을 당하는 자는 비록 그가 이전에 등불처럼 빛났을지라도 그 때에는 꺼져가는 등불처럼, 우리가 땅에 던져 버리고 짓밟는 다 탄 양초의 심지처럼 여김을 받는다. 따라서 “평안한 자의 마음은 그를 멸시한다”(5절). 자기 세대에서 타오르면서 빛을 내는 등불과 같이 의롭고 순전한 자도 유혹에 빠지거나(시 73:2) 멸시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