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6장 – 그리스도의 원형>
- 욥과 그의 친구들은 논쟁자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그 방식대로, 서로의 의견과 지혜와 처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논쟁이 오래 벌어질수록 그것은 더욱 가열된다. 이처럼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이야기가 무료하며, 무익하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욥도 그의 말을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음이 여기에 드러나 있다. 그렇게 하기는 쉬우면서 그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여기 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엘리바스를 책망하고 있다. 쓸데 없이 말을 반복한 것에 대해서였다(2절).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노라. 네가 말한 것은 내가 이미 들은 것이고, 네 스스로가 전에도 또한 말했던 것이다. 네 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되풀이해 온 말이다.” 욥은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어느 것과 같이, 그의 인내를 크게 시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반대편이 같은 의견으로 설득시키려 하는 것은 격노와 지겨움을 초래한다. 그러나 교사들에게는 가끔 그런 것이 필요하고, 더욱이 “경계의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야” 하는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조금도 서글픈 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많은 것들을 들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하게 되었고, 또 그것들에 의해 더욱 감동되고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서투른 조언에 대해서였다. 그들은 욥을 안위하기 위해 왔으나, 그들은 그것을 매우 서투르게 진행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욥의 경우를 다룰 때 그것을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그리하여 고통을 진정시켜 주기보다는 더욱 상심케 하는도다.” 환자에게 극히 불행한 일은 그의 약이 독약이 되며, 그의 의사가 그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욥이 여기에서 그의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진실로 해당된다. 즉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비해 볼 때, 번뇌케 하는 안위자가 되는 것을 때로 경험할 것이며,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 잡히고 양심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 묶여 있을 때,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축복된 성령 뿐이다. 성령이 없는 안위는 번뇌케 하는 것이며, 무거운 마음에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므로 헛된 것이다. 계속 무례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욥은 허망한 말이 끝나기를 바랬다(3절). 허망한 말이라면 처음부터 꺼내지 않는게 좋으며, 빨리 끝날수록 더 나은 것이다. 유익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로운 자들은 또한 그들이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충분히 말한 때와 그것을 중단시켜야 할 때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롭다.
- 그 주위에 있는 모두가 욥을 학대했다(10절). 그들은 마치 그를 산 채로 삼키려는 듯이, 그를 삼키고자 입을 열고 그에게 다가왔다. 이처럼 그들의 위협은 두려웠으며, 그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매우 모욕적이었다.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모욕을 그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모로 행해졌던 것이다. 비열한 자들까지도 “저희가 서로 모여 나를 치도다”(시 35:15). 많은 옛사람들의 견해대로 여기에서의 욥은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즉 “그들이 내게 그 입을 벌리고”(시 22:13),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미 5:1)라는 이 표현은 고통을 당할 그리스도의 일을 예언하는 것으로서, 글자 그대로 그것이 이행되었던 것이다(마 26:67). 그를 괴롭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던가! 하나님은 그의 소망대로 그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11절). “하나님이 나를 악인의 손에 붙이셨구나.” 그것이 위로부터 허락된 일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를 칠 능력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받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소홀히 여기고 그들에게 허락을 내리신 하나님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대적인 자들이 그를 칠 능력을 지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고, 거의 가혹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인들을 이용하시어 서로 칼을 치게 만드시며(시 17:13), 그의 막대기로 그의 자손을 치게 하신다(사 10:15). 여기에서 또한 욥은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악인의 손에 붙이심을 당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이다(행 2:23).
<욥기 17장 – 욥의 상태>
- 욥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약간 파격적이며 어수선하다. 그리고 그는 고통당한 자가 흔히 그러하듯이 이야기의 방향을 갑자기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욥은 여기에서 그의 비참한 상태를 언급하면서, 그에 대한 그의 친구들의 매우 불친절함과, 그의 호소가 정당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제 그의 상황을 살펴 보기로 하자. 욥은 죽어가는 자였다(1절). “수 년이 지나면 나는 긴 여행을 떠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 일이 있다(16:22).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그러한 말을 고치고 있다. “어찌 내가 수 년 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나는 지금 곧 여행을 떠나야 할 입장이고, 그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내가 떠날 시간이 닥쳐왔다. 이미 나의 기운이 쇠약하였다. 아니, 끊기었다. 내 영이 다하였고, 나는 이제 죽은 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죽어가는 자로 간주하는 것이 좋으며, 우리가 병 중에 있을 때는 특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 쇠진해 가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기운이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호흡하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코에 있다”(사 2:22). 즉 우리의 코는 생기가 들어간 문이다(창 2:7). 이제 생기가 거기서부터 막 떠나려 하고 있다. 아마도 욥의 건강 상태가 호흡 장애를 일으켜, 숨이 가빠지고 또 잠시동안 호흡이 끊어지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우리 코에 불어 넣어서 생기가 있게” 하자. 그리고 영적인 삶을 우리 안에 불어 넣자. 그러면 그 기운은 결코 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때가 끝나가고 있다. 촛불처럼 “나의 날이 다하였고 소모되었다.” 불이 당겨진 후 줄곧 타고 있으며, 그것은 점차 저절로 쇠진해질 것이다. 그러나 숫한 일들을 겪고 난 후에 꺼져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들을 보상하기 위해 그리고 결코 꺼지지 않을 영생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먼 고향으로 돌아간다. “무덤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 그는 조롱받는 자였다(6절). 그가 “나로 백성의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셨다.” 내가 백성들의 화제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며 주목받는 인물이 되게 하셨다.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나를 조롱하는구나.” 그들은 그에 대해 민요를 만들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욥처럼 초라하게라는 속담을 만들어 냈다. “그가 이제 나로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셨구나.” 내가 번영할 때는 나를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그들이 기뻐하더니, 이제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자로서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부귀한 자들을 존경하던 자가 그들이 빈곤해 질 때는 그들을 멸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근심이 가득한 자였다(7절). 그는 너무 울어서 거의 시력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졌구나”(16:16). 이 세상 근심은 이처럼 어둠과 죽음을 초래한다. 그는 매우 근심했으므로 그의 몸이 마르게 되었고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의 이 비참한 상황을 악용했다. 그들은 그를 짓밟고 그를 모욕했으며, 그를 사곡한 자로 저주했다. 때문에 그는 이처럼 극심한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가혹한 처사인가!
<욥기 18장 – 빌닷의 책망>
- 여기에서 빌닷은 심한 말로 불쌍한 욥을 향하여 쏘아대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현명하고 선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욥에게 고통을 더 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빌닷은 엘리바스처럼(15:2, 3), 지루하고 긴 말로 욥을 책망하고 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2절) 빌닷은 여기에서 욥뿐만 아니라(엘리바스와 소발이 아마도 그들이 해야 하는 의도에 알맞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서), 그와 대담을 나누었던 모든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다. 또는 비록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욥의 편을 들어 호의에 찬 말을 들려 준 자들을 책망했다고는 볼 수 있다. 빌닷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가 지루했고, 그의 차례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롭다는 평판을 독점하려 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데로 이끌어 나가려고 주장하는 것이 논쟁하는 자들의 일반적인 심리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것인가를 모든 사람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 속에서 이러한 결점을 발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 드디어 모든 논쟁자들의 말을 욥이 종식시켰다(29:22).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다.” 그때 욥은 강했고 번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황폐하고 천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가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이전에는 존대함을 얻었으나, 이제는 마구 비방당했다. 그러므로 “지혜는(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업과 함께 하여야 아름답다”(전 7:11). 왜냐하면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해서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전 9:16). 빌닷은 욥이 자기가 말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책망했다. 이것은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합당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듣는 자가 관심을 가지고 깨닫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해야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 귀를 열어 학자같이 알아 듣게 하라. 그러면 학자의 혀가 유익을 행할 것이다(사 50:4) 그렇지 않고서는 유익을 행할 수 없다. 듣는 자가 청종 할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는 큰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