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장 – 욥의 대답>
- 욥은 여기에서 그가 정당화할 수 없었던 것을, 심지어 죽음에 대한 그의 지나친 열망까지도 변명하고 있다. 그의 비참함을 종결시켜 줄 생명의 종결을 왜 그가 원하지 않겠는가? 이 이론을 강력히 밀고 나가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열거하고 있다. 땅 위에 있는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를 우선 들어서 말했다(1절). 인간이 현재 있는 곳을 살펴보라. 인간은 땅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은 인생에게 주셨기 때문이다(시 115:16). 이것은 인간의 비천함과 열등함을 나타내고 있다. 저 세상에서는 높이 들리워지며, 훌륭한 지역에서 거주하게 될 인간이 사는 현재의 위치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그것 또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땅 밑이 아니라, 땅 위에 있다. 다시 말해서 지옥이 아니라 지상에 있다. 이 세상의 넓이가 한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시간도 한정되었고, 그 기간이 짧다. 그러나 하늘은 측량될 수 없으며 하늘의 날들은 헤아려 질 수도 없다. 그곳에서 인간이 생명을 누리는 기간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이 이곳에 거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는가? 그렇다. 분명히 정해져 있다. 우리를 만드시고 여기에 놓으신 분께서 그 기간을 정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언제나 있도록 되어 있거나 오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 손에 쥐고 계신 분에 의해 정해지고 한정된 기간 동안 이곳에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우리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눈먼 운명의 여신에 의해 또는 에피큐리안 철학자들이 말하는 눈먼 행운의 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한 통치 계획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 살아 있는 동안의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의 삶은 전쟁이며, 품군의 날과 같다. 우리는 각각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 자신을 이렇게 간주해야 한다. 대적들 가운데서 곤고를 당하는 군병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섬겨야 하고, 명령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싸움이 끝났을 때 제대하되,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행한 바에 따라 수치스럽게 또는 영예롭게 물러가야 한다. 그의 날은 무익했고, 그것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일거리를 모두 빼앗겼고, 이제는 일하기에도 합당치 않은 존재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선을 행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을 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보람있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것을 욥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라고 표현하고 있다(3절). 선한 자에게 있어서는 그의 병과 연로함이 그를 무익한 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이, 병과 연로함으로 인해 생긴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다. 욥은 그 날들이 그가 선을 행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하게 그가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날들이었으며, 그래서 헛된 나날들이었다고는 강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을 때에 단지 그를 위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며, 우리는 용납될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그의 기도를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 그는 그가 곧 죽으리라는 예상을 피력하고 있다.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이다.” 죽음은 아마도 잠시 후에 우리를 흙에 누이고 잠들게 만들 것이다. 욥은 잠 못 이루어 시달리는 밤을 원망했었다(3, 4, 13, 14절). 그러나 침상에 누워 잘 수 없는 자들은 곧 흙에 누워 잠들 것이며, 꿈 때문에 놀라거나 이리저리 뒤척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곧 죽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사함받고 우리의 죄악을 제하여 버릴 것을 간절히 열망하도록 만든다.
<욥기 8장 – 빌닷의 연설>
- 빌닷은 욥이 말한 것을(2절) 책망하면서 그의 감정을 저지시키고 있다. 우리는 욥이 선한 말을 매우 많이 했고, 또 목적에 매우 적합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편이 옳다고 주장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닷은 매우 노한 논쟁자처럼 그것에 대해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엘리바스가 그를 침묵시키기에 충분한 말을 했으므로 욥의 말은 모두 무례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책망은 그릇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들은 마치 악을 행한 사람들처럼 엄하게 책망당한다. 빌닷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이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또는 적어도 여기에서처럼 욥의 자녀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빌닷은 그 형제를 정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지지할 수 없었을까? 그의 의견은 일반적으로 옳았다. 즉, “하나님이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으며”, 또한 공의의 고정된 법칙을 그 어느 것도 어긋나게 하지 않으신다(3절)는 것은 옳았다. 하나님은 그러한 일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도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결코 무죄한 자를 학대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죄의 값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심판자이시다. 세상을 심관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냐?(창 18:25) 만일 하나님께 불의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롬 3:5, 6) 그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이 충만하시다. 사람들은 때로 다른 사람들의 권력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공의를 굽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시므로, 어떤 것의 호의로 인해 이득을 얻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흔히 불의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불의하실 수 없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 때문이다.
- 그러나 빌닷은 적용되는 면에 있어서 정당하지 못했고, 솔직하지 못했다. 그는 욥의 자녀들, 그들은 유명한 악행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죽게된 불행한 사태는 그들의 동방의 모든 자녀들 가운데 뛰어난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4절). 그는 욥이 아직도 좋은 날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밝은 전망을 그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욥이 그 날들을 볼 권한이 있는지를 몰래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욥이 일찍 하나님을 구하였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를 주셨을 것이며, 비록 지금 하나님이 그를 잊으시고 버리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를 기억하시고 돌아오실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만일 그의 집이 의로우면 그것이 형통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고, 내적인 경전은 외적인 형통을 가져다 주는 확실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로 돌아오셔서 긍휼을 베푸시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욥이 이 세상을 다시 시작해 나갈 수 있도록 그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거의 없으므로 그가 이전처럼 형통하리라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욥이 반박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비록 너의 초년이, 그릇에는 조금밖에 음식이 없고, 기름이 병에 조금 담겨 있을 정도로 궁핍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그것이 크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와 위로로써 그의 백성들의 영혼을 풍요케 하는 방법이다. 즉 그것은 ‘한꺼번에’오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씩’ 오는 것이다. 시작은 초라하나 그 과정은 완전으로 행한다. 여명의 빛이 정오를 가져오며,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보잘 것 없는 날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큰 날에 대한 소망을 지니도록 하자.
<욥기 9장 – 욥의 반응>
- 빌닷은 욥이 매우 많은 말을 한 것에 대해 그를 책망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었다(8:2). 그러나 욥은 그것에 대해 충분히 항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욥은 빌닷이 제시한 이론, 즉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다는 이론에 동의하고 있다. 우리와 더불어 논쟁을 하고 있는 자들의 의견이라도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는 솔직히 시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고집을 내세워 진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적용돼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빛 속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시 143:2).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하나님의 엄격하심과 냉엄하심, 즉, 아무도 겨룰 자 없는 하나님께 대한 격렬한 원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장에서 이와 같이 매우 격렬한 감정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몇 곳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특히 그 자신의 죄악됨에 대한 경건한 자백으로 보고 싶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죄한 대가대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어김없이 멸망할 것이다. 욥은 인간이 논쟁하거나 싸우는 일에 있어서 그의 조물주와 비교가 안 되는 상대자라는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와 더불어 쟁변하고, 그의 처사를 규탄하는 자들이 대답할 수 없는 천 개의 어려운 질문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을 때 큰 질문들을 많이 내놓았으나 욥은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38, 39장). 하나님은 매우 지혜로운 체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명백히 밝히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책망 당할 천 가지의 잘못을 제시할 수 있으며, 우리를 규탄할 천 가지의 항목을 열거하실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잘못을 다른 것에 전가시키는 말을 그에게 할 수 없고, 단지 침묵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사실임을 승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한 가지라도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며, 또 저것은 하찮은 것이며, 또 저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밀어 놓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사실을 부인하고, 범죄하지 않았음을 항의할 수 없으며,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잘못을 부인하고 정당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다. 단지 욥처럼 “우리 손으로 우리 입을 가리며”(40:4, 5)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외쳐야 한다.
- 욥은 그의 환난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친구들의 눈에 그를 더럽게 비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의 환난을 원망하였고, 그의 위로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도 파멸시킬 정도로 그것이 계속되는 것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이 말들을 선의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기에 그리고 그들의 신뢰를 확보하기에 급급하다 할지라도, 세상적인 눈 아래 깔려 있는 잡다한 죄의 더러움에서 우리의 손을 깨끗이 지키려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정결하고 무죄함을 가장하는 우리의 모든 위선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은밀한 많은 죄로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으며, 거룩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자신이 추악하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수 있다.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 그는 그의 손을 매우 깨끗하게 지켰다. 그러나 계명이 와서 그 마음의 죄를 드러나게 했을 때 그는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한 정욕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시다. 가장 위대한 왕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것보다 무한히 높으시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그를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어리석고 약하며 연하고 변덕스러우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의지하면서 죽어가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적이며 불멸하는 창조주이시다. 이러한 사실을 숙고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겸손하게 되고 잠잠케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말고 그를 우리보다 무한히 높으신 자로 언제나 바라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