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장 – 엘리바스의 충고>
-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그리고 그의 현재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매우 부드럽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특히 이미 근심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의 적들처럼(시 69:26) 환난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환난을 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상심케 할 가능성이 있는 말은 비록 그것이 매우 필요한 것일지라도 우리 스스로가 말하기를 주저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생들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것이 정당한 것일 때에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지 않으신다(애 3:33). 엘리바스는 욥이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봉사하였던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욥이 그의 자식들이나 종들뿐만 아니라, 그의 이웃과 친구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의 손이 닿는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교훈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는 가르치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장려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도록 비용을 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친히 많은 사람들을 교훈했다. 비록 훌륭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는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를 천하게 만든다고 생각지 않았다(솔로몬 왕도 전도자였다). 그리고 비록 바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의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영혼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훌륭한 조언을 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애써 마련했다.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 일이 네게 당하였구나.” 사탄 자신도 바로 이 말을 했었다(1:11; 2:5). 만일 엘리바스가 욥의 고통을 반만이라도 알았다면 그는 아마도 “그 일이 나를 쳐서 상하게 하는구나”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의 환난에 대해 말하는 그는 그것을 단지 하나의 사소한 일로만 여겼다.
- 나는 오히려 그것은 단지 욥이 투덜거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이었다고 보고 싶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한 척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하나님보다 공평의 원리와 율법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엄밀히 관찰하는 체 할 수 있겠는가?” 죽어야 하는 비참한 인간 에노스(창 4:26)가 어떻게 오만할 수 있으며, 가장 강하고 뛰어난 자로서 매우 훌륭한 지위를 누렸던 게벨(왕상 4:19)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거나 그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경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거룩한 율법의 인도하심이나 거룩한 은총의 분배나 거룩한 섭리의 방법과 겨루는 잘못을 범하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하도록 생각한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은 그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얼마나 인간은 죄에 물들어 있으며(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어야 하는 운명을 얻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이 그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성결한 채 할 수 있겠는가? 진흙이 옹기장이와 다투겠는가? 인간 속에 있는 의로움과 성결함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더 의롭고 성결하다(참조, 시 94:9, 10). 이에 대해 엘리바스의 해설에 대해 알아보자. 그것은 일종의 해설과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의 구절들을 모두 환상 속에서 언급된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마찬가지다.
<욥기 5장 – 엘리바스의 권고>
- 엘리바스는 그에게 적절한 경고와 권유의 말을 하고 있다(17절). “너는 권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오고 자녀들의 유익함을 위한 정책이라고 부르라. 그것은 전능자의 경책이라 부르라. 그 전능자와 다투는 것은 미친 짓이며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인 동시에 지혜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전능자는(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 같이) 그를 의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것을 업신여기지 말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은 그 의미가 풍부한 단어이다. 우리는 징계가 필요하며, 마땅히 그것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징벌을 느낄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또는 가혹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굽히기를 싫어해서는 안 되며,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를 천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에게 권징하시며 시험하시는’ 것이(7:17, 18) 정말 사람을 존대케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여호와의 징계를 경외하라. 하나님의 훈계하시는 손에 대해 겸손한 두려움을 품고 사자가 으르렁거릴 때는 떨도록 하라(암 3:8). 징계에 복종하며, 그 부르심에 대해 그 목적에 응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너는 그것에 대해 경외감을 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어떠한 효과를 위해 우리에게 환난이 임하게 하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서명함으로써, 그리고 그가 그것을 요구하셨을 때 그의 것을 돌려드림으로써 그의 증서를 존경해야 한다.
- 엘리바스는 욥에게 직접 말하면서, 만일 그가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그 자신을 낮추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크고도 친절한 일들을 많이 행하시리라는 귀한 약속들을 욥에게 주고 있다. 비록 그 당시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경이 없었지만, 엘리바스는 욥에게 이러한 단언을 줄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뜻을 베푸시는 일반적인 사실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욥의 친구들이 말한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시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그들은 하나님과 욥에 대해 옳지 않은 것들을 말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한 일반적인 이론은 족장시대의 경건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정경에 실린 글에서 13절을 인용했던 것과 같이, 그리고 또한 17절의 명령이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구속력을 갖는 것과 같이, 여기에 있는 이 약속들은 거룩한 언약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적용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서에 나타난 인내와 위로로 인하여 소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에 열심히 관심을 기울이고, 그 세부적인 것들을 주목하여 그것들로부터 위안을 얻도록 하자.
<욥기 6장 – 욥의 반응>
- 욥은 그의 재앙의 가장 아픈 부분으로서 그가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원망하고 있다(4절). 이 점에서 욥은 고통 가운데에서 그의 영혼의 고통을 원망하던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게 되었도다”(마 26:38).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여기에서 불쌍한 욥이 슬프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욥은 그가 느끼고 있는 것, 곧 전능자의 살이 자기 몸에 박힌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가 이러한 혼돈과 궁핍, 치욕, 그리고 육신의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도려내어 그를 깊은 번민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은 그가 사랑하고 섬기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가져다 주시고 그가 불쾌히 여기는 이 흔적들을 그에게 남겨 놓으셨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의 고통이 가장 아픈 고통이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으리요!” 우리는 몸이나 재산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난의 고통을 기꺼이 내리시든지 간에 그가 계속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시고 우리 양심을 화평케 하시는 한 우리는 그것에 복종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한 가지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프고도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이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그의 화살은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의 칼이 그 영혼에 미치도록 하실 수 있으시다. 이 화살의 독과 열은 그의 영혼을 마셔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이성을 혼란시키며 그의 결심을 흔들고 그의 기력을 쇠하게 하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정이 격한 표현들이 비록 정당화될 수는 없다할지라도 그것들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비록 욥이 지독히 죽음을 갈망하고 그것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매우 노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 자신을 멸하기를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 그의 생명을 버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멸하기를 기뻐 하시기를 간청했다. 영혼이 아무리 불편하게 육체 속에 감금되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감옥을 부수어서는 안되며 정당하게 해방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는 이 청을 하나님께 들어 주시기를 원하고 그를 위해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행해 주셨으면 하는 이 소망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이처럼 빨리 죽기를 열렬하게 원하고, 더 나은 소망을 하나님께 올리지 못한 것은 그가 죄를 범한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옳지 않은 그의 소망이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나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 이외에는 믿음으로 그 어느 것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에 치우쳐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장 그릇된 격렬한 표현을 쓰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노함이 없는 정결한 손을 들어 올려야 한다. 욥은 죽음에 의해 그의 모든 근심을 제거할 수 있고 또 효과적인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다(10절).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으리라. 지금 나는 위로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때까지는 결코 위로받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