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변화는 오직 예수!
변화산의 기적(마 17:1-13)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원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변화를 원하고 하나님 역시 변화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변화인가?’ 입니다. 변화는 크게 참된 변화와 거짓된 변화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참된 변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면의 변화이고, 거짓된 변화는 인간이 원하는 외형적 변화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본문은 흔히 '변화산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공관복음에서 모두 다루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먼저 당신의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놀랍게도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양옆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에 감격한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모두를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구름을 보내셔서 오직 예수님만 드러내시며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나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 등 비록 하나님이 쓰신 종들일지라도 그들을 주목하는데서 눈을 돌려 유일하신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님만 주목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참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시퍼 및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든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르지 않음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중세 암흑 시대를 만들었던 로마 카톨릭도 오직 예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 특히 교황도 함께 신뢰하도록 했는데, 결국은 '교황무오설'로 발전되고 급기야 면죄부 판매까지 허용될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다섯가지 종교개혁의 원리인 'Five Solas'로 개혁을 시작하고 진행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내외부에서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목회자를 비롯하여 인간을 신뢰하는 인본주의 신앙에서 다시 종교개혁 신앙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히리안의 변화
오래 전 뉴욕의 할렘가에서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돌보며 자선 사업을 하는 한 백인 여인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늘 풀이 죽어 있는 앉은뱅이 소년인 히리안의 다리를 낫게 해주려고 여러 곳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마침 한 의사가 무료로 수술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하여 히리안의 다리가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어느 겨울 밤에 우연히 거리에서 그때의 여인과 의사가 만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의사는 히리안이 잘 성장하여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 히리안은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며 살다가 ... 얼마 전에는 사람을 죽여서 지금은 ... 감옥에 있습니다.”
히리안의 다리만 낫게 해주려고 했던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주는 어떤 외형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지만 진정한 변화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의 변화는 오직 예수님만 주목하고 그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참된 기적
본문이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달리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변형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라고 표현하셨고, 3절에서는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하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변화된 모습도 보여주셨는데,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변화였습니다.
외모도 볼품 없고 나사렛 출신으로 무시받던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을 보내셔서 그들을 덮으시더니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변화산의 기적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기적을 일으킨 사건인데, 하나님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을 이끌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일지라도 제자들은 물론,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 뿐으로 예수님의 음성만을 듣는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후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처할 정도로 예수님과 밀접했던 베드로도 예수님만이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 곧 모세와 엘리야 등도 따르고자 하는 마음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도 믿지만 사람도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에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진정한 변화를 주기를 원하셨기에 변화산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당신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모든 인간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다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거짓되다’는 진리 위에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시다’는 진리가 세워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는 신앙의 핵심 진리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면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과 개혁의 구심점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시 58:4)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사탄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을 귀머거리 독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뱀의 첫 번째 특징은 귀가 없다는 것인데, 동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실제로 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귀가 퇴화되어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원래 귀는 밖의 소리를 듣기위해 존재하는데, 뱀의 귀는 자기의 소리만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4장에서는 타락하기 전의 천사장 루시퍼가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사 14:13)라고 하나님의 음성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타락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음성에 이끌려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도 참된 양의 특징을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음성만 듣고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즉,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다면 어느 피조물도 타락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루시퍼는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 소리를 들음으로 결국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뱀을 통해 나타나 하와에게도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고 하나님과 다른 음성으로 접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하와는 사탄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그로 인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지 않고 사탄의 음성을 받아들이면서 인류의 타락은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타락 역시 불완전한 인간인 교황을 완전하신 하나님과 같이 무오한 존재로 세우고 그 음성을 따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역사가 J. A. Wylie)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목회자 무오설 = 교황 무오설
로마카톨릭은 예수님만 믿게 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도 교황도 믿게 했는데, 결국에는 1229년부터 평신도들의 성경 보유 자체를 금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황의 말에 더 권위를 내세우며 교황무오설로 흘러갔고, 신도들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라는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아닌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을 믿고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중세 암흑시대가 발생했고, 마침내 면죄부까지 판매하면서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로마카톨릭의 타락 원인을 파악한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다섯가지 종교개혁의 원리인 ‘Five Sola(다섯가지 오직)’로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사도들도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고 하면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주목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있을지라도 근본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진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상당수의 목회자들에게서 이렇게 자신을 부인했던 사도들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회자라는 자리는 한국교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카톨릭의 ‘교황무오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개신교회가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회자무오설’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히며 전철을 밟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한국교회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기독신문에서 2011년 11월 29일자에 나온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 중 첫 번째가 사람, 특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을 부인한 채 ‘오직 성경’ ‘오직 예수’만이 신앙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찰스 스펄전이 그의 저서인 <목회자들을 위하여>에서 “목회자들은 주님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지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청지기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성경을 대신하여 신앙의 중심에 서지 말고, 모세와 엘리야를 구름으로 덮으시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신앙의 핵심,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분으로 당신 자신에 대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하셨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 관사인 ‘a’ 가 아니라 정관사인 ‘the’ 가 사용된 것은 여러 길 중에 한 길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 길 중에 한 길로 믿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길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세 암흑시대를 가져온 로마 카톨릭의 타락은 오직 예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 교황이나 사제 등 종교 지도자들도 신뢰하면서 시작되었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신앙 개혁의 기치를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 영광’ 으로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직 예수님만 믿는 신앙이 참된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문에서 모세와 엘리야 등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부인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통곡하며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순절에 성령을 모셔들이면서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면서 자신은 물론 함께한 사도 요한도 부인한 채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오직 예수님만을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미국의 부흥을 이끈 디엘 무디도 “성직자나 교회 등 장대에서 눈을 떼어 장대 위의 그리스도만 보십시오!”라고 충고했는데, 참된 신앙은 자기와 인간을 부인하고 오직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만 듣는 것입니다. 이는 민수기 21장 9절의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는 말씀처럼 놋뱀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고, 요한복음 10장 27절의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는 말씀처럼 유일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만 듣는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가사 중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보아야 하고 믿어야할 대상은 오직 구속한 주, 예수님 뿐입니다. 즉, '오직 예수'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처럼, 자기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 곧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것, 다시 말해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참 신앙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