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5 – 빌닷의 언급>
- 빌닷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욥과 그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는 욥이 옳다고 생각하여 승리를 위한 자가 아니라, 진실을 찾고자 하는 자로서 그것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패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 만일 아직도 그가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을지라도 그가 이미 충분히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끝없이 논쟁하는 일을 삼가려 했을 것이다. 빌닷과 그 나머지 사람들이 이 논쟁을 끝마치려한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욥과 그들의 의견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은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악인의 잠시동안 형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고 욥은 악인이 드디어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견해 차이는 얼마나 좁혀졌는가! 만일 논쟁자들이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한다면 그들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서로가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욥과 그가 일치한 문제에 대해 활발히 언급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모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생각과 우리 스스로를 겸손히 여기는 생각으로 채운다면, 우리는 그처럼 쉽게 시시하거나 하찮은 일에 대해 의심을 품고 논쟁을 벌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낮추기 위해 빌닷은 여기에서 두 가지 방법을 택하고 있다. 빌닷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 많고 깨끗지 못한 존재인가를 추론해 내고 있다(2-4절).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이시며, 율법을 부여할 수 있는 명백한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또 그 율법을 강행하실 수도 있다. 모든 것을 만드신 그는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실 수 있는 권리,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든지 간에 그는 행하시며 또 행하실 수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무엇을 하느냐” 또는 “왜 그렇게 하느냐”(단 4:35)고 말할 수 없다. 그가 주권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그가 모든 창조물의 주인이시며, 통치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모두 그의 것이며, 그들은 모두 그의 지시와 뜻 아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함을(즉 존경하고 복종함을) 받아야 하며, 그를 아는 모든 것들에 의해 두려워함을 받아야 하고(스랍들도 그 앞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제일 높은 것이나 낮은 것이나, 모두 그를 두려워 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사람의 주권은 흔히 경멸당하며 멸시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엄하시다. 세상의 영광스런 무리들도 모두 그에게 온전히 복종하며,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다. 화평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평강이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다(사 57:19). 하늘에는 온전한 화평이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온전한 거룩함이 있으며, 사랑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햇빛은 이 세상 모든 지역에 도달하며, 일 년 내내 모든 것들에게 공평히 비추인다(시 19:6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보편적 인지와 관심을 표하는 작은 증거이다(마 5:45). 모든 것은 그의 선함을 나타내는 빛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멸할 능력을 가지고 계시나, 자비를 베풀기를 즐겨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그의 은혜로 살아 간다.
<욥기 26 – 일치된 의견>
- 빌닷은 욥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욥을 설득시키고 가르치고 위로하는 척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어떤 실수를 바로 잡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그의 고통을 참거나 그의 말에서 유익함을 얻게 하거나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참되고 선한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합당한 것은 아니며, 또 어느 때나 적절한 것이 아니다. 욥과 같이 초라해지고 꺾여져 슬픔에 잠겨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광대함과 위엄보다는 그의 은혜와 자비를 알려 주어야 하며, 전능자의 두려움보다는 위로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는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 알고 계신다(사 50:4).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도 진리의 말씀을 분류하는 것을 옳게 배워야 하며, 하나님께서 슬프게 만들려 하지 않는 자들을 빌닷처럼 슬프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욥은 그에게 “뉘 신이 네게서 나왔느냐?”라고 물었다. 즉 “이러한 말을 통해 어떻게 괴로운 영혼이 활기를 되찾고 위로를 받아 소생되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를 위로해야할 친구들에 대해 기대할 때, 종종 실망하곤 한다. 그러나 성령이신 보혜사는 결코 그의 역할에 실수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목적을 그르치시는 일도 없다.
- 욥과 그의 친구들이 논쟁을 벌였던 초점이 매우 달랐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한 가지 주제 곧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능력에 대해서 모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발견물들을 시인하면서 감탄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욥 자신이 말했고 또 빌닷이 말했던 하나님의 행사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소식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드러나지 않은 그 능력의 깊이를 감탄하고 있다. 우리가 언급해 놓은 것은 그의 행사의 일부분,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하나님 본체에 비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발견물들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탐구한 그 모든 것들이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에 대해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역사와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것을 듣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우리가 듣고 우리 귀에 들려 온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 뿐이다. 우리는 부분밖에는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부분밖에 예언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은 것이다(롬 11:33). 밑바닥을 발견할 수 없는 우리는 뚝에 앉아 그 깊이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우리가 현재의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심히 세미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무한하시며 측량할 수 없다. 우리의 이해력과 능력은 약하고 얕다. 그리고 가득 차 있는 거룩한 영광은 미래에 발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큰 능력의 우레’는 우리의 믿음 안에서 그의 능력을 알리는 가장 낮은 것 가운데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37:4, 5 참조). 우리가 그의 능력의 최대의 힘과 범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것은 무서운 영향력과 작용도 이해할 수 없으며 주의 노의 능력은 특히 그러하다(시 90:11). 하나님은 위대하시나, 우리는 그를 모르고 있다.
<욥기 27 – 욥의 맹세>
- 욥은 여기에서 그 자신의 결백함을 지지하기 위해 그가 말했던 것들을 엄숙히 맹세하면서 논쟁을 멎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자신이 모든 책망을 받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맹세의 형식을 살펴보자(2절).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기에서 욥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항상 살아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의미한다)이라고 지극히 높여 부르고 있으며 그를 유일하신 최고의 심판관으로 여겨 그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피하시고(즉, 욥에게 이 논쟁을 판단해 주어 그를 옹호하는 일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책망하게 되는 원인인 그의 환란을 계속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자신의 결백함을 밝히기도 전에 그가 기대한 기회를 없애 버렸다고 말하여, 하나님에 대해 가혹하고도 온당치 못하게 말하고 있다. 엘리후는 이 말에 대해 그를 책망했다(34:5).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행사에 의로우시므로 인간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즉시 은총을 보이시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실망하며, 얼마나 풀이 죽고 곧 그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고 원망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나타나 주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대적하셨다 하고 있으며, 이처럼 무거운 고통을 그에게 가하심으로써 그의 생명과 그 모든 위안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원망하고 있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며, 그리하고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욥은 그의 주장과 하나님의 뜻이 모두 선함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노하신 것같이 보이고 또 현재 그를 대적하여 행하시는 것 같을지라도 그는 기쁘게 그의 고소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다.
- 그가 맹세한 내용을 살펴 보자(3, 4절). 욥은 결코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려 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거짓된 방법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논쟁에서도 그가 생각한 그대로를 줄곧 말할 정도로 그는 거짓말하거나 그의 양심을 그르치는 일은 결코 하려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이론을 주장하거나 어떤 사실을 단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실이라고 믿는대로 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다 하더라도 그는 그 진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친구들이 그를 사곡한 자라고 책망했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심문자들이 요청한다면 맹세 위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욥은 그 자신이 유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 비난을 거부하지 않고 그 사실, 모든 사실이 오직 사실인 것만을 밝히려 했을 것이며, 자신의 사곡함에 대한 수치를 스스로 짊어졌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고, 또 그 자신이 그의 친구들이 표현한 것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결백함을 저버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그 자신이 무죄한 사실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의 부당한 비난의 고통 가운데 스스로를 그릇되게 정죄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거짓된 증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 욥은 살아있는 한 이 결심을 더욱 지지하려 했다(3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다.” 죄를 대적하는 우리의 결의는 이처럼 확고해야 하며, 생명을 위하는 결의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의심스럽거나 무관심한 일에 대해서는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지닌다는 것은 안전하질 못하다. 우리는 무슨 이유로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게시해 주실 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분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결코 사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확신해서는 안 된다. 욥이 그러한 결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그 일부가 여기, 우리의 생명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말 속에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조만간에 마지막 숨을 몰아 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사악하고 거짓된 숨을 내쉬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호흡이 끊어질 때 우리를 대적하게 될 어떤 일을 말하거나 행하도록 우리 스스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우리 안에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왜 우리가 사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를 찬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