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장 – 엘리바스의 책망>
-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이처럼 극심한 고통 중에서 원망하고 있으므로, 그를 괴롭히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욥이 생각하고 있다고 하여, 욥을 책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빈정거림’이었다. 욥은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여기에서 한 말은 욥에게 잘못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말 자체는 매우 진실되고 선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을 베푸시는 것은 그가 우리의 은혜를 입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가 우리로부터 도움을 입고 계시다면, 그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 “그는 우리를 정당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라고 투정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어떤 훌륭한 행위로써 하나님께 도움을 끼쳤다고 생각한다면 그 도움을 밝히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그것을 잃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그러나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의 의로움과 온전함이 하나님께 진정한 이익 또는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그로부터 어떠한 일도 공적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경건이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도, 어떠한 이득도 드리지 못한다(1, 2절). 만일 우리가 어떤 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공로를 얻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경건,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우리의 길을 온전하게 만든다. 만일 그것이 공로를 얻지 못한다면, 분명 그밖의 것으로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그의 경건이나 정직 그리고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움을 끼칠 수 없다. 더욱이 그의 재치나 학식 그리고 세속적인 술책으로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제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다. 분명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방법으로든 할 수 없다.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우리의 지혜와 경건은 우리들 자신에게 매우 유익하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딤전 4:8).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하리라”(잠 9:12). 믿음의 이득은 믿음의 손해보다도 무한히 크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균형을 이룰 때 믿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사람들로 인한 도움이나, 이득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어떤 도움이나 이득을 끼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며, 불완전함이다. 촛불이 태양의 도움이 되며, 양동이의 물이 대양에 도움이 되겠는가? 지혜로운 자는 그 자신의 계획과 방어, 그 자신의 신용과 위인에 대해 그 스스로에게 유익하다. 그는 자기의 지혜로써 스스로를 즐길 수 있으며, 풍요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치 않으시며, 우리의 봉사도 필요치 않으시다. 우리는 그가 없이는 언제나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영원히 행복하실 수 있다. “우리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될 수 있겠는가?” 그의 영광이나 부귀를 진실로 더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아주 온전하다고 한들, 하나님께 어찌 더 유익하겠는가? 그것이 온전한 것과 거리가 멀 때는 더욱 그러하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어하거나 책망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로부터 위험을 당하게 되었거나, 우리를 시기하시기 때문이 아니다(4절). “그가 너를 책망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방백들이 때로 그 신하의 세력이 커져 매우 강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을 쓰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그에 대해 그들이 너무 강대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너의 번창함을 막으시려는 것이냐?” 사탄은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을 유혹할 때 그들이 신같이 되어, 하나님과 경쟁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식의 나무를 금해 놓은 것이라고 실지로 암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악랄한 암시였다. 하나님은 선한 자를 책망하신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큰 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인간과 더불어 심문하시지 않는다. 즉 그들이 그의 영예를 가리우고 그의 세례를 위협할 것이 두려워서 트집을 잡아 그들과 송사하며, 그들을 대적할 기회를 살피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재판장들은 범죄자들을 두려워하여 처벌한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을 압제했다. 헤롯이 베들레헴 자손들을 살해하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박해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의를 남용하지 않으신다(35:5-8 참조).
<욥기 23장 – 욥의 표현>
- 욥은 그 자신의 분노와 고통에 대한 표현을 정상화하고 있다(2절).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는 것을 시인하노라.” 그런데 그것은 내가 당하고 있는 환난, 다시 말해서 원망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그만큼 혹독하기 때문이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상심하나이다”(애 3:19, 20). “오늘도 나의 원망이 패역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나이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슬픔을 나타내는 욥의 순수한 표현을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의 섭리에 대한 비난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패역한 것’이라 불렀다. 그러나, 욥은 말했다. “나는 과장되게 원망하지 않는다.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오늘도 너희가 나를 설득하고 위로하기 위해 말을 많이 하였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전보다는 조금 나았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내 몸의 고통과 심령의 아픔으로 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심술궂은 어린 아이들처럼 우리가 맞은 것보다 더 아픈듯한 신음을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잘못 행하는 것이 된다. 심술궂은 아이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울 때 그 울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맞은 것을 꾹참고 신음 소리를 적게 낸다고 해도 손해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금 말할수록 더 빨리 고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욥은 친구들의 책망을 떠나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가 사곡한 자가 아니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만일 그가 사곡한 자였다면 감히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우에 “그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므로” 그는 사람의 판단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고전 4:3, 4), 때가 이를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자고 했다. 이와는 달리 욥은 매우 초조했다. 그러므로 그는 빨리 심판의 날이 와서, 그의 호소가 특별 명령에 의해 곧 심판 되기를 열렬히 원했던 것이다. 사도들은 환란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자가 오시는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는 격려를 강력히 해 줄 필요를 느꼈다(약 5:7-9).
- 욥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 호소하기를 열망했다(3절).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이것은 경건한 영혼의 호흡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잃게 되었고, 만일 다시 그의 은총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멸망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적당하게 표현한 문장으로 볼 수도 있다. "내가 어찌하여 그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을꼬! 어떻게 내가 그와 언약을 맺고 그와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미 6:6, 7) 이것은 불쌍하게 버림받은 한 영혼의 절규이다. “내 영혼을 사랑하시는 자를 보았는가?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1 그에게로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가도록 명하시고 그 안에서 나를 인도하셨으면!” 그러나 여기에서 욥은 그의 친구가 그를 해한 것과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을 매우 대담하게 원망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그가 그 길을 안다면 그는 그가 앉아 계시는 곳까지 가서, 그것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심판을 기다리는 인내는 우리의 지혜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깊이 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거룩한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죽음과 심판을 열렬히 원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죄가 되는 일로서, 우리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죽음과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때가 되었을 때 서두를 필요가 없도록 그것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가? 욥은 그의 호소가 선한 것임을 매우 확신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밝혀지기를 열망하고 있다(4절). “내가 그 앞에서 호소하며, 그것의 진상을 밝히리라. 내가 합당한 방법으로 나의 신실함을 증거하기 위해,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그것을 증거하리라.” 우리는 이것을 기도의 의무에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성소에 들어갈 심지어 은혜의 보좌의 발등상에까지 나아갈 담력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접근할 수 있는 자유 뿐만 아니라, 말할 자유도 얻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허락을 얻었다. 우리는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세히 호소하고, 모든 문제를 말씀드리고, 그 앞에 우리의 모든 슬픔을 아뢸 수 있다. 우리는 겸손하고 거룩한 영혼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이 세상의 왕들을 대할 수는 없다.
<욥기 24장 – 하나님의 섭리>
- 욥은 모든 것이 전능자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지난 것도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전 3:15), 현재의 일도 그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고(마 10:29), 미래의 일도 그의 예지에서 어긋나지 않는다(행 15:18).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므로 우리는 그가 그것을 인지하시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비록 그 세대를 악하게 만든 악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그는 땅을 버리셨도다”(시 94:6, 7)라고 할지라도, 악한 시대가 그에게서 감추일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의 때가 그의 손 안에, 그의 눈 아래 있으므로, 이 세상의 악인의 세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일도 그의 능력 안에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예지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악인들이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처벌을 받기 전에 죽었다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몰래 그를 피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 일을 예견하셨고,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욥은 악인이 흥하는 이유를 조사해 보려 하기 전에, 선지자로서의 하나님의 전지를 확언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의로우심과(렘 12:1), 그의 거룩함과(합 1:13),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선하심을(시 73:1) 단언했다. 일반적인 진리들은 때로 우리가 특별한 사건 속에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견고하게 지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는 자들이(곧 그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비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지혜롭고 선한 백성들이) ‘그의 날’ 즉 “그들을 위해 심판해 줄 날을 보지 못한다” 라고 단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의 편에 서서, 그의 호소를 들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원망이었다(29:8). 그런데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죄를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날을 여기에서 그의 날(시 37:13)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그날이 오리라고 믿지만 그것을 지금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고 그 전조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이 섭리의 신비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이유는 있는 것이며, 우리는 왜 그 심판이 지연되는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가장 지혜로운 자나,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도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과 인내를 연단시키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한 기도를 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밤낮 부르짖는다(눅 18:7). 악인이 흥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욥은 두 종류의 의롭지 못한 자들을 열거해 놓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 속에서 여전히 흥하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자들이다.
- 여기서는 또 다른 종류의 죄인, 즉 발각되지 않고 따라서 처벌받지도 않는 죄인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광명을 배반한다”(13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의 빛, 하나님의 율법의 빛, 그리고 그들의 양심의 빛을 배반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체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반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인도되거나 다스림을 받기 싫어하고, 또한 명령이나 제어받기를 싫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낮을 싫어하며, 그들이 사악한 행위를 하기에 가장 유리한 때로 밤을 택한다. 그러므로 사악한 행위는 ‘어두움의 일’이라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며(요 3:20),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자는 광명의 길을 피하거나, 혹 그가 발각될까 염려하여 그가 알려지리라고 생각되는 곳에는 거하지 않는다. 따라서 욥은 여기에 가장 악한 죄인들을 묘사해 놓고 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며, 자신의 양심을 거역함으로써 그들의 죄에 배반 행위를 첨가시킨다.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 수많은 계략을 사용하여, 많은 계획과 음모를 꾸밈으로써, 신중하게 죄를 범한다. 그리고서 악을 행한 자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다는 것(34:22)을 잊은 채, 만일 그들이 사람의 눈만 속일 수 있다면 안심해도 좋으리라는 어리석은 상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