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4장 – 디나와 복수>
- 디나는 공허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험 앞에 노출시켰다. 외동딸이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외롭다고 느꼈다. 대화할 수 있는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한 기분을 벗어버리고 아버지의 장막 속에서 늘 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대화를 하면서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밖에 나간 것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간 것” 곧 그들의 옷치장과 그들의 춤추는 것과 무엇이 유행인가 하는 것을 보러 간 것이다. 젊은이들의 자만과 허영은 그들을 많은 함정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 세겜은 디나를 욕 보인 후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이 소식이 야곱에게 전해졌다(5절). 신앙심 깊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비행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괴로울 때, 그것이 자기네들만의 유일한 경우이고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한 것을 알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아마도 덕을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가족의 명예 때문에 더욱 분개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이 일은 후대의 표현 방법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부끄러움’(7절)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다만 한 가족이었다.
- 하몰과 세겜이 이스라엘 가족과 서로 통상을 하기 위하여 공정하게 혼인할 것을 청한다. 그리고 세겜은 디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조건이라도 디나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수응하겠다고 말한다(11, 12절). 또 세겜의 아버지는 사과할 뿐만 아니라 위로하면서 두 집안이 결합하면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9, 10절). 그래서 “땅이 네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고 말했던 것이다.
- 야곱의 아들들은, 실은 조금도 바라지 않으면서, 종교가 서로 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기들의 참된 의도를 숨기고 있다. 야곱의 아들은 다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이상한 제안을 한다. 세겜 사람들 모두가 할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성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쉽게 자기들의 칼의 먹이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살육의 날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계획은 때로 종교를 구실삼아 계획되고 실천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 하몰과 세겜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는 세겜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귀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열심히 믿을 때 크게 전파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말로 호소했다(23절).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이러한 원칙에서 서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그러나 재산에 대한 탐욕이 결혼을 중매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세겜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이 믿고 있는 종교의 원칙보다는 세속적인 관심과 이해 관계로 종교적인 경건을 취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 시므온과 레위의 피비린내 나는 행위 때문에 야곱은 깊이 상심하였다(31절). 그런 짓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닥친 치욕 때문이었다. “너희가 나에게 화를 끼쳤다.” 우리들은 그들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는 뜻이다. 사악한 자녀들의 커다란 과실들은 참으로 경건한 부모들의 슬픔이며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 야곱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숫자적으로 많고 강대한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합쳐 야곱을 대적한다면 그와 그의 조그만 집안이 그들의 손쉬운 먹이가 될 것 밖에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창세기 35장 – 회개와 보호>
-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가 벧엘에서 한 서원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서원을 이루도록 그를 그곳으로 가게 하신다(1절). 야곱은 자기가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28:21, 22) 말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어 야곱으로 하여금 먹고 입을 것 뿐만 아니라 많은 땅과 큰 두 무리를 이루게 하시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서원을 잊어버리고 오랫동안 그 서원의 실현을 지체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가 가나안에 돌아온지도 7, 8년이 지났다. 그는 그곳에서 넓은 땅을 샀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르신 것을 기억하고 제단을 쌓기도 하였다(33:19, 20). 그러나 여전히 벧엘은 잊고 있었다. 시간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느낌과 그 은총으로부터 받은 깊은 인상을 퇴색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의 의무를 몇 번이고 양심을 통해서나 어떤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을 통해서나 간에, 이런 저런 방법으로 회상하도록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살기를 원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시 27:4). 하나님의 집 벧엘은 여관이 아니라 내 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그 서원을 기억하게 하시지 않고 그가 서원을 했던 그 때 사정을 회상하도록 하시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라고 말씀하셨다. 이전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그 고난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 일을 했는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시 66:13, 14).
-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우상과 미신적인 것들을 모두 갖다 버렸다(4절). 만약 야곱이 더 좀 일찍이 그렇게 하게 했더라면, 양심적으로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그들은 좀 더 일찍이 그 모든 것을 버렸을 것이다. 때때로 무언가 개혁하려는 시도는 예상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러한 노력에 대해서 우리가 두려워하듯 그처럼 완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야곱의 종들은 물론 그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신구로 썼든 자기네들의 신을 칭송하기 위해서 썼든 간에 귀거리까지도 갖다 바쳤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개혁은 모든 면에 골고루 미치지 않으면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세겜에게 벧엘까지 갔다(5절).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비록 가나안 사람들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에게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힘이 그들을 사로잡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이사를 하고 있는 이 때가 자기 이웃을 해친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의무를 수행하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야곱의 집이 죄를 범했을 때, 야곱은 이웃에 있는 다른 종족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방의 신들을 다 버렸고 그들은 모두 함께 벧엘로 내려가자, 두려워한 것은 오히려 그의 주변에 있는 다른 족속들이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때 우리는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출 34:24 참조). “네가 매년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은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신다. 야곱과 그의 일행은 안전하게 벧엘에 이르렀다.
-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말씀을 하시던 곳에서 그렇게 올라가신 것은 어떤 영광스러움을 직접 눈으로 보도록 하시려고 한 것 같다(13절).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행복한 교제는 극히 짧고 일시적이어서 곧 끝이 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하늘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나 여기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 곳에서 야곱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14절).
<창세기 36장 – 에서의 자손들>
- 여기에는 단지 에서의 아들들과 그 손자들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역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모세가 간직한 기록은 교회에 대한 것이지 교회 밖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 조상들만이 이 훌륭한 기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유명한 사람들을 배출한 것은 세일산이 아니라 시온산이었다(시 87:5). 그 족보는 3, 4대 이상 더 가지 못했다. 후대 모든 사람들의 정확한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가나안의 상속자가 되었던 이스라엘 족속의 계모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서 약속된 씨가 나왔고 기회가 닥쳐와 필요할 때면 어느 정도 인출되어 가나안이 나뉘어질 때까지 모든 족속의 거룩한 씨이며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왕계열의 거룩한 씨에 대한 계보이다.
- 에서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족장이라고 불렀다(15-19절). 아마도 그들은 군대의 지휘관이었으며 족장 또는 많은 군인을 거느린 두목이었을 것이다. 에서와 그의 가족은 칼을 믿고 살았기 때문이다(27:40). 명예스러운 칭호들은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 더 먼저 사용되었다는 것을 주목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족장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47:3). 그러나 그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되지 않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칭호 때문에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예도 있고, 하나님의 집에는 그보다 더 무한히 가치 있는 이름이 있기도 하다. 에돔 족속들이 사람들 중에서 귀족이었다면 이스라엘 족속은 실로 우리 하나님께 대한 왕과 제사장이었다.
- 하나님은 야곱에게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35:11)는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야곱의 집안에서 왕이 나기 전에 먼저 에서의 혈통이 오랫동안 왕족의 구실을 했다. 외형적인 번영과 명예에 있어서는 계약의 자녀들을 뒤로 제쳐놓고 계약 밖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시작할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악한 자들의 승리는 빠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짧다. 쉽게 익는 열매는 쉽게 떨어진다. 느릴지라도 약속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은 확실하고 영속적이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만족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가장 좋은 시간이다.
- 세일산은 그들의 거처라고 불리운다(43절).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고 있었고 가나안은 약속된 땅이었을 뿐인데 반하여 에돔 족속은 자기들의 땅을 가지고 살고 있었고 세일은 그들의 소유물이었다. 이 세상 자녀들은 각기 자기의 살 땅이 있다. 그러나 소망의 땅을 갖고 있지 못하다(눅 16:25). 한편 하나님 자녀들은 소망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일산을 소유하는 것보다 가나안에 대한 약속을 갖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