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1장 – 떠나는 야곱>
- 야곱이 라반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절). 비록 야곱이 여기에서 지극히 어려운 곤란에 직면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시기 전에는 그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좇아 거기에 왔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되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들의 의무임을 명심하자. 또한, 우리가 나가든 들어오든 하나님의 인도 아래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큰 위로가 되는 일이다.
- 야곱은 라반과 더불어 부가 점점 늘어나 희망에 찬 번성이 약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기 시작할 때도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반과 함께 있는 동안, 그의 경건한 삶의 자세가 때때로 중단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있을 때의 그 경건한 헌신 자세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야곱이 노역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다만 하나님께서 때때로 돌보아 주셨을 뿐인데, 이제는 “네가 기둥에 기름을 붓고 서원했던 그 곳으로 돌아가라. 이제는 네가 부유하게 되기 시작하니 제단에 제사를 지내고 희생 제물을 바칠 것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악의에서 야곱을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금하사 나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해 주실 것을 믿어야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멸망시키려는 라반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야곱에게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 이처럼 정의의 하나님은 라반의 재산을 취하여 야곱의 고역에 보상을 치르셨다. 마찬가지로 후일에도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인들을 위해 일한 대가를 그들의 노획물로 갚아 주셨다. 비록 사람들은 잊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행한 사랑의 봉사와 노동을 잊으시는 불의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기억하자(히 6:10).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한 계획에 휘말려 있는 정직한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 라반은 야곱을 추적해 갔다. 야곱이 도망한지 사흘째 되던 날 라반은 이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즉각 자기의 형제 곧 온 친척을 끌고 다시 일을 시키든지 아니면 야곱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 위해서든지 야곱을 쫓아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밤, 라반이 야곱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사 “선악간에 야곱에게 아무말도 하지 말라”(24절)고 하시면서, 야곱을 감싸고 라반을 꾸짖으시면서 그 싸움에 개입하셨다. 즉 야곱이 가는 길을 반대하는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 마침내 라반과 야곱은 서로 친구가 되어 헤어진다(55절). 라반은 지극한 사랑으로 그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축복한 다음 평화롭게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두려하고 있는 이상으로 인자하시며, 인간들의 마음을 기이히 다스리사,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32장 – 영적 씨름>
- 야곱의 여행을 지켜 주는 호위대가 있었다(1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 것이다. 선한 길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선한 보호자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천사들은 야곱의 일행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히 1:14). 야곱이 장막을 치면 그들도 그 둘레에 자기들의 장막을 쳤다(시 34:7). 그들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게 야곱의 일행을 따라왔지만 이제는 뚜렷하게 눈에 보이도록 나타났다. 왜냐하면, 야곱이 여기에 이르기까지 당한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지금은 더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특별한 보호를 해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신다”(시 91:11)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야곱이 본 바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주변에 수호의 천사를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한 사람 산 사람의 성도들이 제각각 수호 천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논쟁할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이러한 특별하신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명명하였다.
- 그런데 야곱은 형 에서가 자기를 대하여 거의 전쟁을 준비하듯 한다고 하는 엄청난 소식에 접한다(6절). 자기의 친절한 서신에 비하면 너무나 야비한 반응이었고 불쌍한 동생을 맞는 것 치고는 너무나 슬픈 환영이었다. “그가 400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라고 했다. 에서는 자기의 착한 아버지가 돌아가실 그 날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 날이 오기 전에 자기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을 한다. 그는 옛날의 다툼을 기억하고 동생이 지니고 있는 장자의 권리와 축복에 대한 복수를 하고 가능하다면 그 두 가지에 대한 야곱의 기대를 산산이 깨뜨려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했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이제 가까스로 벗어나온 라반에게서 받은 공포보다 훨씬 더한 것이었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서 문제가 된다. 또 어떤 때는 하나의 일이 끝나는 그 끝이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비가 끝나면 또 다시 구름이 몰려오는 법이다. 야곱은 견딜 수 없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위험을 생생하게 느끼고, 이 느낌으로부터 다급한 두려움이 생기는데, 오히려 이런 두려움을 통하여 인간은 더욱 겸허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신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스도 자신도 그의 고통 속에서 심각한 고뇌를 하셨었다.
-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은 하나님께 이 사정을 아뢰는 것이다. 이 법의 한 예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예의 성공은 우리가 이 모범을 따르는데 많은 격려가 된다. 이때야말로 야곱에게는 커다란 시련의 때였다. 그러나 그는 그 시련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어떻게 이 구원을 기도했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렘 30:7). 그는 절망 속에서 여호와를 찾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것이다. 두려움의 때는 기도의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떠한 두려움이 있든지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
- 야곱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했다(9절). 그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의 자기 부정적인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곧 자기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그는 더 좋게 간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하신 의도에 의하여 그 언약은 자기에게 상속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우리 조상들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커다란 위로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참으로 장엄하고 가장 영예스러운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19절에 나오는 ‘은총’ 이란 말은 복수로 되어 있다. 그 은총은 마르지 않는 샘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 그것은 약속에 의하여 베풀어주신 모든 과거의 은총과 약속에 의하여 신실하게 보장된 모든 앞으로의 은총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진리 안에 있는 모든 것도 능동적인 신앙인의 위로와 동시에 찬양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런데 야곱은 더 적극적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최선의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기도 중에 바라는 모든 소원의 가장 확실한 안내자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탄원을 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희망의 가장 견고한 근거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간구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주님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으니 주께서 그 말씀에 신실하지 않으실 이가 있겠습니까?”(시 119:49).
- 호세아 예언자는 야곱이 어떻게 ‘씨름’을 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호 12:4). 그의 무기는 눈물과 기도였다. 그 싸움은 몸의 싸움이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바람이 부닥치는 영적인 씨름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야곱의 영적인 자손들도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침내 야곱은 자기가 원한 점에 도달하여 소원을 이루었다. 얻기 위하여 씨름한 그 축복을 받았고, 그의 기도를 본받는 어떤 후손에게도 기도가 헛되지 않음을 보여 준 실례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겸허하게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기고 영예롭게 해 주시는가를 잘 살펴 보라.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더라도 그 분을 굳은 마음으로 믿는 자는 마침내 정복자보다도 더 위대해질 것이다.
<창세기 33장 – 반전>
- 야곱은 에서가 마중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1절). “눈을 들어 보았다”고 하는 표현은 낙심한 표정과는 전혀 반대인 즐거움과 신뢰의 표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모든 사정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 이 이상 더 슬플 수가 없었던 것이다(삼상 1:18). 자기의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그 문제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마음의 흡족함과 평정을 지니고 다가올 일들을 기다릴 수가 있다. 어떤 것도 하나님께 고정되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속에는 끼여들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야곱은 자기 자신을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려고 높은 파수대 위에 올려놓았다(합 2:1).
- 에서는 야곱을 껴안았다(4절) “에서가 달려와서”라는 것은 미워서 쫓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달려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자기 손에 넣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하시는대로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남몰래, 아무 소리 없이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그 마음들을 바꾸어 놓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울에게, 하나는 참는 은총을 통하여(삼상 26:21, 25), 또 다른 사울은 새롭게 하시는 은총을 통하여(행 9:21, 22), 하셨듯이 갑자기 적을 친구로 바꾸실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의 날에 그에게 부르짖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당연한 문제들이 자기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호전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 야곱은 “자기의 소유가 족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에서가 족하다고 하는 것은 많다는 뜻이지만, 야곱이 족하다고 하는 것은 모두라는 뜻이다. 신앙의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그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는 모든 것이 또한 자기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전 3:3:22). “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또 풍성합니다” (빌 4:18).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족하다고 확신한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는 예견 속에서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 나라에 이르면 자기의 모든 소유는 필요가 없다. 다만 그때까지 극히 짧은 동안만 재산이 필요한 것이다.
-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시종들이 필요 없었다. 하나님을 수호자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군병들의 보호 아래 어떤 위험도 없는 안전한 보호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매일 아침 하나님을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 칼을 잡을 필요가 없다. 야곱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있다.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당신의 은혜를 얻는 것, 그것만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이고,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자기형의 선의를 그렇게 귀하게 여겼다면 하나님의 선의를 우리가 얼마나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 야곱은 제단을 쌓았다(20절). 섭리로 그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저 말로만 감사한다고 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실제로 그 감사를 표현한 것이다. 자기 가정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을 지켜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장막을 치는 곳이면 언제나 그 곳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단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집을 짓는 곳에는 언제나 교회도 있어야 한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 비록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긴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의 주님이요 그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의 영예는 그 영예가 하나님의 영예에 의하여 성별될 때에만 참다운 영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