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0장 – 노아의 자손들>
- 가나안의 후예와 그의 후손들의 가족과 민족들, 그리고 그들이 소유했던 땅에 관한 기사가 본 장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앞에 굴복하는 민족이 되고, 그들의 땅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거룩한 땅 즉 임마누엘의 땅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러는 동안에 그의 백성을 선택했던 바로 그 곳에서 저주의 운명을 가나안 족속에서 내리실 때에 그 땅을 유의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세는 신명기 32장 8절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으니,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라고 했다.
-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었다. 에벨은 셈의 증손자였다. 그러나 그가 어찌하여 아르박삿이나 셀라 등의 조상이라기 보다는 ‘에벨’의 온 조상이라고 불리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백성인 아브라함과 그 백성이 에벨로부터 계승해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Eber→Heber Hebrew)이란 말도 그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장 13절을 보면 ‘히브리 사람 아브람’ 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 인 것이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빌 3:5). 우리들이 생각하기로는 에벨 자신도 모든 사람이 배신한 시대에 믿음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 가족에 대해서는 경건함의 모법이었으며, 따라서 그 경건한 칭호는 ‘히브리 사람’ 에벨로 흔히 쓰여졌고, 아마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있어 바벨의 혼란 상태 속에서 그의 가정을 통하여 그 같은 칭호를 지녔을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신앙 고백자들이 ‘에벨의 자손’ 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 벨렉이라는 이름에 대한 이유가 있다(25절). 즉 그가 나서 이름이 주어질 때에 그 곳에 거주해야 할 인간의 후손들이 세상에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제비로 뽑아 분할하던 것같이, 노아가 그 땅을 질서정연하게 나누었든지 또는 그들이 그 같은 분할에 순종치 아니하여,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가운데서 언어의 혼돈으로써 그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이 같은 시기가 어떤 때였든지 간에 경건한 에벨은 그 아들의 이름으로 이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따라서 우리들의 아들들도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할지 모른다. 우리들의 시대에,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세상과 교회가 지극히 불행하게도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창세기 11장 – 바벨탑>
- 인간의 건축과 하나님의 건축 사이에 그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인간이 바벨탑을 세울 때에는, 벽돌과 역청이 최선의 재료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에는 “청옥으로 그 기초까지도 쌓으시며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미셨다(사 54:11, 12; 계 21:19). 이들의 건축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혹자는 생각하기를, 또 다른 홍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자위(自衛)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실로 이르시기를,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그가 지시하시는 방주를 믿기보다는 자기들 자신이 세운 탑을 믿으려 했을 것이다.
-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막자”고 했다. 요세푸스(Josephus)의 말과 같이, “그것은 ‘땅에 충만하라’(9:1)는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흩어지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오,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죽으리다”라고 대답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이 상호간에 이 거대한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단일 제국으로 뭉치기 위하여 이 같은 도성과 탑을 짓고 그것으로써 그들 왕국의 수도와 자기들의 통일성을 중심이 되게 하려 했다. 야심에 가득찬 니므롯의 무리들이 이 가운데 함께 하였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정책일 수는 있으나, 참된 교회의 절대무오한 징표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바벨 탑 건축자들은 그 가정, 성품, 의견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처럼 이의 없이 단합하여 있지만, 오히려 시온을 세우는 자들은 공통적인 하나의 머리와 성령 가운데 뭉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오늘날과 같이 나뉘어 있어야 한다. 모든 흩으시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가정이나 친지들이나 교회가 흩어진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 인간의 범죄함에 비례하여 벌하시지 아니하고, 그 형벌을 조절하심은 하나님께 긍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죄 값에 “번개로 내려가서 순식간에 저들의 반역을 소멸하자”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며, “땅이 열리게 하여 그 건축물을 삼켜 버리게 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하늘에 올라오려는 자들을 속히 지옥으로 내려보내자”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직 그저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을 흩어버리자”고만 하신다. 그들은 죽어 마땅했다. 그러나 단지 멀리 추방될 뿐이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가 지극히 크시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이 실현되었는지 저들의 말이 실현되었는지 알게 하셨다(렘 44:9). 그들의 단일성과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견고하셨다. 그 점에서 저들은 자기들 위에 계신 이에게 교만하게 행동하였으니, 그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음을 굳게 한 자가 번창하였던가?
- 언어의 혼잡이 인간의 자손들을 나누이게 하고, 멀리 흩어버린 반면에, 사도들에게 주신 언어(방언)의 은사는(행 2:4). 널리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고,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하게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롬 15:6).
- 우리는 여기서 한 족보를 보게 된다. 그것은 끝이 없는 족보가 아니고 아브람에서 끝나는 족보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친구요, 더 내려가면 약속의 씨인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되며,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브람으로부터 헤아리게 된다(마 1:1 이하). 따라서 창세기 5장과 11장,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을 한데 묶어 놓으면,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세상 누구의 족보에서도 불가능한,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얻게 된다. 이 세 족보를 함께 묶으면, 첫 아담과 제 2 아담 사이를 지나는 10을 두 곱, 14를 세 곱한 가계와 자손을 볼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2장 – 아브라함의 소명>
- 여기서는 아브람이 그의 본토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소명을 받는 사건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하란은 갈대아 지방 안에 있어서, 역시 아브람의 본토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며, 또는 그 곳에 5년간이나 머물렀으므로, 아브람은 그 곳을 자기의 본토라고 부르기 시작하다가 그 곳은 하나님께서 원하기는 곳이 아님을 알게 될 때까지는 자기의 근거를 두고자 했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긍휼함을 마련하여, 우리들이 가나안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안식을 취하려는 것을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역사가 이룩되고, 우리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편히 쉬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금 부르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이 같은 명령은 신실한 아브람의 모든 영적 자손들을 하나님과의 계약으로 인도하는 복음과 매우 일치되는 것이다. 본능적인 욕심은 하나님의 은총에서 양보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우리들의 본향, 우리들의 집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나그네 숙소로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살아야 하며 그 애착에서 떠나야 한다.
-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네게 보여줄 땅”이라고만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이 어떠한 땅이라든가 또는 어떤 종류의 땅이라는 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대체로 하나님을 따르려고 자신의 본토를 떠나는 것으로 인해서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특별한 보장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신뢰로써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나머지 모든 약속의 최후를 장식하는 약속이었다. 이것은 메시야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에게서 모든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관계 맺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이것은 바로 아브람의 이름을 위대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보다도, 메시야가 그에게서 계승되어 오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아브람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영광이 된 것이다. 은혜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지극히 큰 영광이 될 것이다(마 12:50).
-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전에도 저들이 그리하고자 했다(11:31). 그러나 미처 다다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저들이 여행을 계속하고, 또 저들의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저들 위에 임하여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었다. 거기서 새로운 계시가 임함으로써 그 곳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은총을 자기 백성들에게 점차적으로 계시하신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땅을 “지시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 그 땅을 그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시니, 은혜가 성장하듯이 위로함도 성장한다.
- 끝으로, 애굽으로부터의 이같은 아브람의 해방과 그 후 그 자손들의 해방과의 유사성을 관찰해 보자. 아브람이 기근의 시기에 애굽으로 간 때로부터 430년 후에, 그 자손들도 역시 기근을 당하여 거기에 갔으며,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림으로써 그를 끌어내심과 같이 그들에게로 그러했으며, 아브람이 바로에게 놓임 받고 애굽 사람들의 노획물로 부유하게 된 것과 그들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