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장 – 동행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오라”고 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방주 속으로 인도하시며, 거기에서 그와 동행하며, 때가 이르면 안전하게 밖으로 이끌어내시겠다는 것을 암시하신다. 우리가 어떠한 곳에 처해 있든지 간에 지극히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이것이 온갖 형편과 처지에서도 가장 큰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자. 노아의 방주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지만, 그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이 되게 한 것이 바로 그 사실이었다.
- 하나님은 노아의 안위와 유익을 배려하시기에 노아 자신이 염려한 것을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행복을 고려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용을 위해 짐승들을 보존케 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염려하심이냐?”(고전 9:9)는 말씀처럼, 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면 더 많이 보존되었고 지금까지도 번식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사자 떼가 소 떼들 같이 많지 않으며, 호랑이 때가 양의 무리들처럼 많게 하시지 않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 아직 홍수가 닥칠 가시적인 징조도 없고, 또한 그러한 일을 일으킬 것 같은 구름도 일지 않으며, 아무 일 없이 계속해서 화창하고 맑은 날씨였지만, 그는 7일 후에는 닥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방주로 들어갔다. 그는 자연의 원인이 아직 작용하기 시작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홍수가 닥쳐오리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방주를 마련했던 것같이, 속히 그 홍수가 이르리라는 경고를 듣고 역시 믿음으로 그 방주로 들어갔다. 그가 취한 모든 행동은 믿음으로 행한 것이며, 결코 감각을 따라 행한 것이 아니었다.
- 노아가 방주에서 만반의 준비를 다한 바로 그 날에 대홍수가 시작되었다. 이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안전을 마련하기까지는 결코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9장 22절에 보면, “네가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고 하셨다. 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받기까지는 바람을 붙잡아 두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계 7:3).
-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6일 동안에 지으셨으나, 그것을 멸하시는 데는 40일이 걸렸다. 왜냐하면 그는 노하시는 데는 더디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멸망이 서서히 점차적으로 임하는 것이기는 했어도 철저히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신다”(시 69:22). 즉, 통상적으로 우리에게 안위함과 유익함이 되는 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재앙도 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이든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든 물보다 더 긴요하고 유용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여기서는 그것보다 더 해독을 끼치고, 그보다도 더 파괴적인 것이 다시 없었다.
- 믿음으로써 방주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닫아 넣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새에 있는 자’처럼 보호하심을 입을 것이다(벧전 1:5).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낙원에 두시었지만 그를 닫아 넣으시지 아니하였던 것 때문에,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방주 안에 두실 때에 그를 닫아 넣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때에는 그 구원을 보증하여 주신다. 그 구원은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의 손을 통해서 지켜지는 것이다.
<창세기 8장 – 기억하시는 하나님>
-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자이기는 했어도, 방주 안에서는 잊혀진 자같이 보였다. 아마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유폐된 생활을 해야 하며, 언제 놓임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이것은 그를 기억하신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해 두자. 그들의 형편이 그 아무리 황량하고 근심에 잠겨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한을 정하실 것이며 그들을 기억하실 것이다(욥 14:13).
-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가 이르게 될 때는 날짜까지도 자세히 알려 주셨지만(7:4), 끝날 때는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거두어 가게 될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시를 주시지 아니하였다. 전자에 관한 지식은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마련하고 그 안에 자리잡게 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지만, 후자에 관한 지식은 그를 호기심만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그것을 그에게 비밀로 하는 것이 그의 믿음과 인내에 필요한 훈련이 되기 때문이었다. 믿는 자는 하나님 앞으로 뛰어가려고 서두리지 아니하나, 그를 만나 뵈려고 서둘러서 나아간다(사 28:16).
- 비둘기는 은혜의 영혼을 상징한다. 발을 붙여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범람하여 더럽혀진 이 세상에서 확고한 화평과 만족을 찾을 수가 없어 그의 방주요 노아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육욕에 찬 마음은 까마귀와 같이 이 세상을 벗삼고 그곳에서 찾아낸 썩은 고기를 먹고 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인 노아에게로 돌아갈지어다”(시 116:7)라고 성경은 말한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그에게로 날아 가리라”(시 55:6). 노아가 그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방주 속으로, 곧 자기에게로 끌여들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로 날아드는 자들은 은혜롭게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환영하여 주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2월 27일까지는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아마도 노아는 갇혀 있는 것이 다소간은 갑갑하여, 방주를 떠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만큼 더 오래 대기하라고 명령하시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욕망보다는 우리들의 유익을 더 고려하여 주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를 알고 계시며, 우리들의 유폐 생활이 얼마나 오래되어야 적당하며, 갈망하는 자비가 얼마나 지연되어야 마땅한가 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땅이 마르기도 전에 우리는 방주 밖으로 나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보이시는 그 때가 분명히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것을 알고 만족해야 한다.
- 노아는 이제 냉랭하고도 황폐한 세상으로 내보냄을 받았다. 그러한 곳에서의 제일 관심사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집을 세우는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노아를 보라.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쌓는 것을 먼저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첫째이니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섬겨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가 시작을 잘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신앙의 태고성을 보게 된다. 즉 새 세상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행한 일은 예배였다(렘 6:16).
<창세기 9장 – 축복하시는 하나님>
- 총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었다”(1절).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호의와 은혜로운 은총을 약속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애하신 모든 약속은 그의 사랑의 뜻과 자신의 계획으로부터 솟아나온다. 에베소서 1장 11절과 3장 11절, 그리고 예레미야 29장 11절을 보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노라”고 했다. 우리는 노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8:20)을 읽은 바 있다.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그를 찬양하는 자들에게 은혜로운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자신이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드리는 것이 그 은혜를 확증하고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이 땅 위에서 번성케 하시고, 영속케 하시는 복을 주신다. 그리하여 조만간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모든 땅 위에는 다소간의 인간들이 거주케 하신다. 한 세대가 지나가도 세상이 존속하는 한 또 다른 세대가 뒤를 잇는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가 영원의 대양으로 인도될 때까지 인종의 흐름은 끊임없이 계승함을 입게 되고, 그것을 세월의 흐름과 병행되게 하시었다. 비록 아직까지는 사망이 권세를 부리고 여호와는 여전히 심판자로서 알려진다고는 해도, 그 당시와 같은 인종의 멸망은 두 번 다시 이 땅에 없게 하시며, 오히려 인종을 충만케 하셨다(행 17:24-26),
-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고 하셨다(3절). 지금까지도 인간은 땅에서 나는 소산인 열매와 채소와 뿌리 및 모든 종류의 곡식과 젖만을 먹도록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상 처음의 허락은 그러하였었다(창 1:29). 그러나 아마도 홍수가 땅의 효력을 대부분 쓸어버렸기 때문에 그 소산물은 보다도 부족되고 자양분이 별로 없게 되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허락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육식을 먹도록 허용하셨다. 이것은 아마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까지는 인간 자신이 결코 생각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채소를 먹듯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육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선한 주인이어서, 우리들이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섬기면서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주시니, 이는 필요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여 버릴 것이 없다”라는 점이다(딤전 4:4). 그 후에, 어떤 고기는 식물로서 매우 적절했으나 의식법에 따라 금지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것이므로, 복음 아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 은혜롭게도 하나님은 계약이라는 방법으로써 인간과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은총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의 의무와 순종을 합당하고도 유익한 봉사임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다. 사람과 하나님의 모든 계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높은 데 계시면서도 인간에 대해서 이처럼 귀히 여기심을 보라”고 하는 우리들의 찬양을 발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보라, 내가 성실하게 지켜서 이룩케 하는 계약을 세우느니라”고 하심으로서 언약의 효력에 대한 우리들의 확신을 확고히 하신다.
- 무지개는 태양 광선의 반사이다. 이는 그 계약의 표가 지니고 있는 영광의 의미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유래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역시 “무지개가 그 보좌에 둘려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계 4:3),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계 10:1). 이것은 그의 권세뿐만 아니라 그가 중보자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시고 계약을 기억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그같이 하여 믿음과 감사함으로써 그 계약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