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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문에 2022년 5월부터 연재되는 제임스강 목사의 ‘행복신앙세미나’ 시리즈
6. 불행보다 더 큰 문제, 자기 판단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삶의 터전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후 인간을 창조하셔서 그곳에 두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이란 이름의 동산으로 ‘낙원’ 곧 영어로는 ‘파라다이스(paradise)’인데, 국어사전은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낙원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인간이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담은 여전히 낙원에 머물러 있음에도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불행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담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 말한 답변은 정확한 불행의 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가 불행의 원인을 생각합니다. ‘~ 때문에 내가 불행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돈이 없어서 불행해, 사업이 실패해서 불행해’ 등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여러 불행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불행은 우리 스스로가 정확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의 원인을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이 생기면 의사에게 찾아가 병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의사가 정확히 병의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의 불행 역시 우리가 아닌 영혼의 의사이신 하나님만이 정확히 아시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발견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두려움을 느낄 때 그 두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 나아가 묻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즉, ‘내가 벌거벗었기에 두려운 것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불행을 자신이 해결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린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을 느낀 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이 두려움을 느끼게 한 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불행의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입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벗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게는 아담의 벌거벗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문제 삼지 않는 벌거벗음을 문제로 여기는 아담의 판단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판단은 하나님과 다른 아담 스스로의 판단으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하나님의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고, 결국은 아담을 불행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자신에 대해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 안에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보시기에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을 떠나게 함으로 아담을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 불행의 근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 안에서 다른 나무 열매들은 다 따먹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게 되면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등 여러 부분으로 자기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데, 문제는 그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과 다르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나님을 떠나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의 죽음은 몸이 영혼을 떠나는 것이듯,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그의 영혼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생긴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말씀처럼 자기 판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판단을 믿는 것이 생명과 행복의 지름길인 것입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 4:5)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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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행의 심리부검
범죄나 사고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면 시신을 해부해서 종합 검사를 통해 사인을 파악하는 부검을 실시하는데, 자살 방지를 위한 심리 부검이란 것이 있습니다. 심리 부검은 자살에 관련된 정신적 요인들을 규명하는 방법으로 자살로 이끄는 마음 상태를 미리 파악하여 자살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1986년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가진 핀란드는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세계 최초로 5년 동안 전문가 6만 명을 동원해 자살자들에 대한 심리 부검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자살자 가운데 80% 정도가 우울증을 앓았는데 단 15%만이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이 결과를 토대로 자살 예방 전략을 세워 대대적으로 자살 예방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고, 매년마다 조금씩 자살율을 낮추더니 마침내 지난 2009년에는 절반 정도나 떨어뜨렸습니다. 그 후 다른 나라들도 핀란드의 심리 부검 제도를 도입하면서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Why Cry’라는 아기 울음 분석기가 있는데,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를 몰라 엄마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스페인에서 발명을 했다고 합니다. 아기가 울 때 이 기계를 갖다 대면 ‘배고픔, 졸음, 귀찮음, 심심함, 짜증’ 등 5가지로 표시가 되어 신속히 아기의 요구를 해소해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파악해주는 기계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의 심리부검과 같이 불행을 겪는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여 그 원인을 파악하는 불행의 심리부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불행의 심리부검을 가장 먼저 시도하셨고 우리에게 꼭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부족한 것이 없는 낙원으로 그들을 위한 행복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어느 날 아담과 하와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것을 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래와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처음으로 불행을 느끼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위의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류의 불행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행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추구해온 것은 낙원과 같은 좋은 환경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덴동산이란 낙원 속에서도 아담이 불행했음을 통해 인간의 행복은 어떤 좋은 조건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라고 고백했던 솔로몬도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누려본 후 결국은 아래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렇기에 행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파악하고 가르쳐주시고자 질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노벨상의 3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연구 능력을 가진 유대인들도, 질문을 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하는 하브루타라는 탁월한 학습법을 사용합니다. 아마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학습 방법을 참고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불행에 빠진 아담에게 질문을 통해 그 원인에 대해 깨우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몸의 위치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아담도 자신의 몸의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아담이 모르고 있는 마음의 위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불행한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것이 마음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불행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몸이나 주위 환경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의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의 원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통해 깨우쳐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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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복은 하나님과 소통된 마음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견해는 ‘행복은 욕구가 충족되어 만족을 느끼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욕구입니다. 욕구는 ‘무언가를 갖고자 원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옛날에 건망증이 심한 선비가 있었는데, 자기 스스로도 건망증이 심한 줄을 알기에 길을 나설 때면 담뱃대를 꽉 붙잡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면서 담뱃대 쥔 손이 뒤로 가면 “어, 내 담뱃대!” 하며 얼굴이 일그러졌고, 다시 손이 앞으로 나오면 “아, 여기 있네!” 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소유와 무소유에 따라 영향을 받기에 모두가 욕구를 가지고 살면서 자기 원함대로 이루어지면 행복해하다가도 원함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해합니다. 이에 그리스 철학자 메네데모스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행복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도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하지 않으면 된다. 어떤 불만으로 인해 자기를 학대하지 않으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욕구나 불만 없이 온전히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에서는 찾기 어렵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다윗을 소개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영어 성경에서는 “I shall not be in want”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나는 원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윗은 온전히 만족해하고 행복해하고 있었기에 원함과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다윗을 표현하신 하나님의 평가는, 세상의 사람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외모나 학벌, 집안이나 스펙 등 개인이 가진 여러 조건들을 보고 평가를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마음과의 소통이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란 말이 나오는데,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몸은 혈관이나 신경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딘가 막히면 통증과 질병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의학의 침술은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막힌 곳이 뚫어지면 자연스럽게 치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양 의학에서도 “모든 병은 근본적으로 정체(停滯)이며, 모든 치료는 근본적으로 순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렘 2:19)고 하며 하나님과 끊어진 마음이 불행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을 하나의 스토리로 요약하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는데,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남으로 불행해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기쁨과 함께하게 됩니다. 하지만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맏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는 매우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했지만 맏아들은 기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라고 했습니다. 맏아들의 마음이 행복을 마땅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재산을 다 탕진한 놈을 보면 화내는 것이 마땅하지’라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류의 행복을 진정으로 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라고,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과 소통된 마음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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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복이 형성되는 곳, 마음
미 일리노이대 심리학 교수인 에드 디너(Ed Diener)는 행복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행복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65년부터 행복을 연구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는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상식을 따라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상하게 부자도 불행해할 때가 많고 농장의 가난한 일꾼일지라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행복은 무엇인가?’란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수십 년간 행복을 연구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달리 “행복은 삶에 대한 마음의 태도이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즉, 행복은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나 믿음처럼 행복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고급 주택에 살아도 불행할 수 있고, 그 반대의 형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메달리스트의 행복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금메달을 딴 선수가 가장 행복하고 그 다음은 은메달리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메달리스트 순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메달을 딴 선수들의 행복도를 조사했는데 은메달리스트보다 동메달리스트가 더 행복했던 것입니다. 은메달을 딴 선수는 행복도가 10점 만점에 4.8점이었고, 동메달을 딴 선수는 7.1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은메달을 딴 선수는 “아이고,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라면서 금메달을 못 딴 것에 마음을 두었고, 동메달을 딴 선수는 “휴, 잘못했으면 메달 하나도 따지 못했을 뻔했네...” 라면서 동메달을 딴 것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빌라에 살며 살림만 하던 한 부인이 어느 날 오랜만에 동창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꼭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부인은 남편에게 우리도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날마다 졸랐답니다. 아내의 성화에 못이긴 남편이 우여곡절 끝에 겨우 아파트를 장만해주자 부인은 행복해하며 아파트로 이사를 간 후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가구들이 눈에 자꾸 거슬렸습니다. 전에 살던 빌라에서는 괜찮았는데 새 아파트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만을 가진 부인은 남편에게 가구를 새것으로 바꾸자고 또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남편이 어렵게 돈을 구하여 가구를 모두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구가 바뀌니 이제는 오래된 가전제품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전히 불만에 사로잡힌 부인은 다시 남편을 졸라 가전제품들까지 싹 바꾸었습니다. 아파트로 이사하고 가구와 가전제품도 모두 아파트에 어울리는 신제품으로 바꾼 부인은 ‘아, 이제 정말 행복하게 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흡족한 마음으로 새로 구입한 푹신한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신 모델인 멋진 TV를 시청하고 있는데, 저녁에 되어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남편이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남편까지 바꾸려다(?)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이런 우화도 있습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술사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는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가 이제는 개가 무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가 이제는 사자가 무섭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며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은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와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 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결국, 생쥐는 원래의 모습으로 바뀌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위치나 조건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높은 위치, 더 좋은 조건 등 외부 형편의 변화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개한 예수님은 먼저 “회개하라.”(마 3:2)고 하시며, 행복의 터닝 포인트는 회개 곧 마음의 교체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행복은 마음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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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복의 방향 전환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생각해야 될 부분은 ‘왜 사느냐?’입니다. 이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래와 같이 여러 질문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왜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까?” “왜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왜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왜 운동을 합니까?” “왜 여행을 합니까?” “왜 영화관이나 공연장에 갑니까?” “왜 사람들과 어울려 취미생활을 합니까?”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의 공통분모는 행복 추구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결국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도 불행해지기 위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과학자이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삶의 목적에 대해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인생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가 평생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고 있지만 실제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입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행복 추구는 헛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행복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독자들 중 서울의 잘 사는 지역의 부인들을 대상으로 행복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첫째 질문인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는 30퍼센트 정도만 “예.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질문인 “당신은 항상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어떻게 항상 행복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고나 실패 등 어떤 불행의 조건들이 찾아오면 그때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행복이 깨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소확행’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 역시 완전합니다. 이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완전한 행복을 얻으려면 행복 추구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즉, 세상에서 하나님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행복을 인류에게 가르치고 전해주고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인 것입니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이고 마음의 교체입니다. 즉, 천국이 가까운 것처럼 행복도 가깝지만 문제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완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그 마음이 회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방향 전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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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럼 연재를 시작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행복신앙세미나를 연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행복신앙세미나는 참되고 바른 신앙을 통해 완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행복을 맛보지만, 그것은 어떤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행복이기에 불완전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복은 번영신학이 추구하는 기복신앙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 완전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창 24:1)는 말씀처럼, 특정 조건이나 상황이 아닌 범사 곧 모든 일에 주시는 온전한 복인 것입니다. 이 복을 얻게 되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언제 어디서나 기쁨을 맛보며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불행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도 상당수가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이 추구하는 불완전한 행복이나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심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완전하신 하나님의 행복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유일한 책인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여 완전한 복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분명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복을 주셨고, 성경의 중심을 차지하는 시편도 “복 있는 사람”(시 1:1)으로 시작하며,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라고 하시며 복에 대한 말씀으로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렘 29:11)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평안과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황태자인 찰스 스펄전도 “주님의 유일한 목적은 당신의 행복이다”(All of Grace)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개혁 신앙의 구심점으로 체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소요리문답에서 첫째 질문인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변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었으며, 둘째 질문의 답변 역시 “성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더불어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은 신앙의 터와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었지만, 19세기에 일어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정통 개혁주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으로 말미암은 참된 신앙이 희미해져갔습니다. 그로 인해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점점 사라져갔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세상적인 축복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본주의에 입각한 번영신학이 일어나 잘못된 기복신앙으로 오히려 완전하신 하나님의 축복에서 더 멀어지게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 10월에 종교개혁의 꽃을 아름답게 피웠던 종교 개혁자들과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 완전하신 하나님의 축복에 초점을 맞춘 ‘Blessing of God Mission’을 영국에 허락하셨습니다. 2019년부터는 한국에 ‘행복신앙연구소’ 라는 이름으로 상담소를 허락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특히, 유럽 대표 한인신문인 유로저널에 ‘행복나침반’ 칼럼을 연재케 하신 주님께서 이제 기독교신문에도 칼럼 연재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연재되는 이번 칼럼을 통해 완전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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