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불행을 허락하시는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가난 속에서 고생하거나 어려움을 만나 고통해하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면 쉽게 위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해서 오는 결과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렘애 3:33)
하나님은 위와 같이 당신의 본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고생하고 근심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불행한 이유는 하나님의 본심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심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가지면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렘 2:19)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악과 패역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든다면, 오래 전 죽마고우처럼 지내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로를 아끼며 굉장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성장하여 둘 다 결혼하였고 과거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한 친구는 합격하였고 다른 친구는 떨어졌습니다. 급제한 친구는 고향의 사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떨어진 친구가 사또가 된 친구를 의지하며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사또 친구에게 찾아가 도움을 받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공부에 게을러졌습니다. 나중에는 어려운 과거 시험 공부를 해야 할 필요조차 못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구는 더욱 빈둥거리다가 나중에는 고을의 골칫덩이가 되었습니다. 고을 사또가 자기 친구라는 이유로 고을에서 큰 소리를 치면서 난봉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날도 장날에 사람들과 싸우다가 관청에 끌려갔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사또 친구가 그 친구를 엄하게 벌을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얼마 후 옥에서 나와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갔더니 자기가 없는 사이에 집에 큰 불이 나서 온 가족이 생사도 모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 슬픔에 젖어 울던 그 친구는 이를 갈면서 눈썹을 밀고 산 속으로 들어가 과거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결국 수 년 후 장원급제한 친구는 암행어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갔고 내려가자마자 사또 친구에게 보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사조차 몰랐던 가족들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친구를 정말 사랑했던 사또 친구가 모두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본심은 정말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친구와 온 가족이 망할 것이기에 일부러 냉정하게 대하며 고난을 겪게 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본심과는 전혀 다르게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진심으로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한 마음을 따라 불행의 길로 갈 때에는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물론, 고난을 통해 우리가 고통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결국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위의 말씀처럼, 장래에 소망과 행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