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순례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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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하나님은 100점, 학생은 0점”

한 신학생이 시험을 보는데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답안지에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라고 적어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위와 같이 채점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구원의 문제에서는 인간의 실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어 제출할 수 있는 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의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순히 ‘점수가 부족한 사람’으로 진단하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부족한 점수를 조금씩 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없는 의를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셨다는 소식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죄와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의 죄와 무능을 드러내시고,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속죄에서 연합으로

복음은 죄 사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관계로 들어갑니다. 지난 여정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의 두 이름, 곧 ‘예수’와 ‘임마누엘’이 복음의 이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준다면, ‘임마누엘’은 그 구원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영원한 속죄가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그 행복의 실체입니다. 이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주는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충분히 누리기 어렵습니다.

영혼의 의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누구보다 깊이 파고든 사람이 20세기의 대표적 강해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입니다.

그는 런던의 가장 오래된 병원에서 왕실 주치의의 조수로 일하던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을 체험한 후 1927년 청진기를 내려놓고 웨일스의 한 작은 교회로 향했습니다. 이후 1939년부터 약 30년간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 사역을 이어 갔습니다.

의사 시절에 익힌 정확한 진단과 치밀한 사고는 성경 해석과 설교에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겉면으로 드러나는 ‘증상’만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영혼의 근본 원인인 ‘뿌리’를 찾아 치료하는 진정한 ‘영혼의 의사’였습니다.

연합의 비밀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6장 강해』에서 죄 사함에서 멈추는 것은 복음의 절반만 붙드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더 본질적이고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는 이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위로가 되는 진리 가운데 하나로 여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여기서 ‘연합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쉼퓌토스(symphytos)에는 ‘함께 자라난’, ‘밀접하게 결합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도움만 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새로운 존재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존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로이드 존스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믿기 전에 체험이나 실천으로 먼저 달려가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입니다.

두 사람, 두 자리

청교도 토머스 굿윈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만 있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은 이 둘 중 하나에 매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도 『로마서 5장 강해』에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태어난 모든 인간, 곧 자기의 의만 가지고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의를 함께 누리는 의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첫 질문이 새롭게 들립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는 공간의 위치를 넘어 영적 위치를 묻는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과 관련하여 “네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람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능력이나 지위, 도덕 수준이나 종교적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였습니다. 방주 밖에는 노아보다 힘세고 똑똑하고 높은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자 그런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서 자신은 심판받지 않으리라 믿고 평안히 잠든 사람이 있고, 피를 바른 집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새 떤 사람이 있었다고 해 봅시다.

누가 살아남았겠습니까? 당연히 피를 바른 집에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이나 행위가 아니라 피를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며, 피 바른 집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보여 주는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방주와 피 바른 집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켰듯,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을 지키십니다.

연합의 능력

로이드 존스는 『위대한 성경 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해결해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그 사람의 것으로 여기셔서 모든 의를 이룬 사람처럼 대해 주십니다.

통장에 비유하면 우리 계좌는 갚을 수 없는 빚으로 가득한 마이너스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 빚을 모두 갚아 0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그 빈 계좌에 입금하셔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100%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8장 1절을 강해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다시는 정죄 아래 놓이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상태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리스도의 의는 변하지 않는 완전한 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능력입니다.

도덕과 종교는 0점에도 못 미치는 우리에게 “점수를 높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100점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100점으로 여겨 주신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의롭게 행했는가?”에서 “나는 누구의 의로 서 있는가?”로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한자 ‘옳을 의(義)’ 자를 신앙적으로 묵상해 보면, 위에는 양(羊), 아래에는 나(我)가 있습니다. 이 글자가 기독교 교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묵상의 실마리는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 나를 덮으시면 나는 가려지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나귀도 그 환영을 함께 받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환호한 것은 나귀가 아니라 그 위에 타신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나귀가 혼자 왔다면 그런 환영은 결코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선포하신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회심과 관련된 한 청년의 일화가 있습니다. 방탕했던 과거에서 회심한 청년이 길에서 예전에 알던 여인을 마주쳤습니다. 반갑게 다가오는 여인을 청년이 피하자 여인이 외쳤습니다. “나예요, 나!” 그러자 청년이 답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내가 아니오.”

이 대답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고백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으로 개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강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혼자였던 여인이 결혼하여 남편과 하나가 되고 남편의 것을 함께 누리게 되듯,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영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목적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라는 질문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답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은혜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면 방종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받게 마련이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결코 옛 삶에 머물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롭게 여겨질 뿐 아니라 새롭게 살아갑니다.

복음의 계산법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복음의 계산법을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길지어다’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조마이(logizomai)는 ‘계산하다, 셈하다, 결산하다’라는 뜻의 회계 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서 4장에서 열한 번이나 쓰인 뒤 6장에 다시 등장하는데, 로마서 4장에서 먼저 계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산입니다. 이어서 로마서 6장에서 계산하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신 사실을 따라 계산하라고 합니다. 계산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미 내리신 결산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듯(롬 6:10), 그분과 연합한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님이 여기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여기고, 하나님이 결산하신 대로 우리를 결산하게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6장 강해』에서 이 계산은 없는 사실을 믿음으로 만들어 내는 기법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통장에 없는 돈을 있다고 상상한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통장에 돈이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면 빈털터리처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만 계산합니다. 자신의 실패와 죄, 부족함과 믿음 없음을 헤아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여전히 죄의 종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당신의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분이 빠졌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을 자기 것으로 계산합니다. 자신의 것만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와 영생, 거룩함과 신실함을 바라보며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상태가 아니라 위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상태에 따라 안심하거나 불안해합니다. 기도가 잘되면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여기고, 안 되면 멀어졌다고 느낍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사랑받는 사람처럼, 넘어지면 버림받은 사람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도 하루에 몇 번씩 흔들립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영적 침체』에서 시선을 자신의 상태가 아니라 위치로 돌리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홀로 서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혼자라면 자기만 바라보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행복은 내가 누구인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산상설교 강해』에서 행복 자체를 목표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결국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마 5:6).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맺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몇 점인가?”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자신에게 연합시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데려가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은 영원한 속죄와 영원한 연합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줍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도 아직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의 두 방향

성경은 ‘예수’를 말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예수를, ‘복음’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했습니다(갈 1:6).

다른 복음은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이것도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에서 불편한 진리를 빼는 것입니다. 죄와 타락, 심판과 회개를 빼고 사랑과 성공과 축복만 말하는 것입니다.

더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의 의와 공로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빼는 복음은 인간의 죄와 타락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단 하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 하나의 죄도 남김없이 해결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공로를 조금도 보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습니다.

왜 참된 복음을 듣지 못했나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했고, 열여덟 살에는 런던의 차링크로스 웨일스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까지 맡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그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그가 교리문답에 바르게 대답했다는 이유로 그를 교인으로 받아들였을 뿐, 그의 영혼이 실제로 거듭났는지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와 거듭남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설교였지만, 그런 설교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설교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전제 아래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죄를 깨우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 선포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설교에 치우친 것입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복음 설교를 듣지 못한 경험은 로이드 존스의 사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다르며, 세례를 받았거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중생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자주 강조했습니다.

특히 교인들의 영혼을 맡은 목회자는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바로잡으려던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참된 복음주의와 진리의 재발견

로이드 존스는 현대 복음주의가 18세기의 복음주의와 청교도들의 신앙과 아주 다르며, 참된 복음주의는 현대 복음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복음주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동역자였던 이안 머레이(Iain Murray)는 『오래된 복음주의』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되어 청교도들과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거치며 이어져 왔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복음이 아니라 옛 복음의 재발견입니다. 진리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인간의 의에서 하나님의 의로, 인간이 주도하는 사역에서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으로 돌아가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복음의 진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앞서 본 로이드 존스의 경험은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남깁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교회에서 어떤 복음을 들어야 할까요?

중한 병에 걸리면 단지 가깝거나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병원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달린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다음 여정에서는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 소중히 여기며 평생 성경을 풀어냈던 매튜 헨리와 함께 이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0.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 다음 칼럼은 ‘한국 선교 및 순교 160주년 기념 영국 부흥지 순례’ 진행으로 인해 순례가 마쳐진 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