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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투데이에 연재 중인 제임스강 목사의 칼럼 ‘행복의 순례’ 시리즈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9)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9)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하나님은 100점, 학생은 0점” 한 신학생이 시험을 보는데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답안지에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라고 적어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위와 같이 채점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구원의 문제에서는 인간의 실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어 제출할 수 있는 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의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순히 ‘점수가 부족한 사람’으로 진단하지 않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부족한 점수를 조금씩 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없는 의를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셨다는 소식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탕자처럼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죄와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의 죄와 무능을 드러내시고,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속죄에서 연합으로 복음은 죄 사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관계로 들어갑니다. 지난 여정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의 두 이름, 곧 ‘예수’와 ‘임마누엘’이 복음의 이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준다면, ‘임마누엘’은 그 구원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영원한 속죄가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그 행복의 실체입니다. 이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주는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충분히 누리기 어렵습니다. 영혼의 의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누구보다 깊이 파고든 사람이 20세기의 대표적 강해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입니다. 그는 런던의 가장 오래된 병원에서 왕실 주치의의 조수로 일하던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을 체험한 후 1927년 청진기를 내려놓고 웨일스의 한 작은 교회로 향했습니다. 이후 1939년부터 약 30년간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 사역을 이어 갔습니다. 의사 시절에 익힌 정확한 진단과 치밀한 사고는 성경 해석과 설교에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겉면으로 드러나는 ‘증상’만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영혼의 근본 원인인 ‘뿌리’를 찾아 치료하는 진정한 ‘영혼의 의사’였습니다. 연합의 비밀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6장 강해』에서 죄 사함에서 멈추는 것은 복음의 절반만 붙드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더 본질적이고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는 이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위로가 되는 진리 가운데 하나로 여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여기서 ‘연합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쉼퓌토스(symphytos)에는 ‘함께 자라난’, ‘밀접하게 결합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도움만 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새로운 존재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존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로이드 존스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믿기 전에 체험이나 실천으로 먼저 달려가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입니다. 두 사람, 두 자리 청교도 토머스 굿윈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 아담과 그리스도만 있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은 이 둘 중 하나에 매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도 『로마서 5장 강해』에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태어난 모든 인간, 곧 자기의 의만 가지고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의를 함께 누리는 의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첫 질문이 새롭게 들립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는 공간의 위치를 넘어 영적 위치를 묻는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원과 관련하여 “네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람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능력이나 지위, 도덕 수준이나 종교적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였습니다. 방주 밖에는 노아보다 힘세고 똑똑하고 높은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자 그런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서 자신은 심판받지 않으리라 믿고 평안히 잠든 사람이 있고, 피를 바른 집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새 떤 사람이 있었다고 해 봅시다. 누가 살아남았겠습니까? 당연히 피를 바른 집에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이나 행위가 아니라 피를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며, 피 바른 집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보여 주는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방주와 피 바른 집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켰듯,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을 지키십니다. 연합의 능력 로이드 존스는 『위대한 성경 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해결해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그 사람의 것으로 여기셔서 모든 의를 이룬 사람처럼 대해 주십니다. 통장에 비유하면 우리 계좌는 갚을 수 없는 빚으로 가득한 마이너스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 빚을 모두 갚아 0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그 빈 계좌에 입금하셔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100%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8장 1절을 강해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다시는 정죄 아래 놓이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상태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리스도의 의는 변하지 않는 완전한 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능력입니다. 도덕과 종교는 0점에도 못 미치는 우리에게 “점수를 높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100점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100점으로 여겨 주신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의롭게 행했는가?”에서 “나는 누구의 의로 서 있는가?”로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한자 ‘옳을 의(義)’ 자를 신앙적으로 묵상해 보면, 위에는 양(羊), 아래에는 나(我)가 있습니다. 이 글자가 기독교 교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묵상의 실마리는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 나를 덮으시면 나는 가려지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나귀도 그 환영을 함께 받았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환호한 것은 나귀가 아니라 그 위에 타신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나귀가 혼자 왔다면 그런 환영은 결코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선포하신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회심과 관련된 한 청년의 일화가 있습니다. 방탕했던 과거에서 회심한 청년이 길에서 예전에 알던 여인을 마주쳤습니다. 반갑게 다가오는 여인을 청년이 피하자 여인이 외쳤습니다. “나예요, 나!” 그러자 청년이 답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내가 아니오.” 이 대답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고백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으로 개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강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혼자였던 여인이 결혼하여 남편과 하나가 되고 남편의 것을 함께 누리게 되듯,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영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목적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고 말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라는 질문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답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은혜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면 방종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받게 마련이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결코 옛 삶에 머물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롭게 여겨질 뿐 아니라 새롭게 살아갑니다. 복음의 계산법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복음의 계산법을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길지어다’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조마이(logizomai)는 ‘계산하다, 셈하다, 결산하다’라는 뜻의 회계 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서 4장에서 열한 번이나 쓰인 뒤 6장에 다시 등장하는데, 로마서 4장에서 먼저 계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산입니다. 이어서 로마서 6장에서 계산하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신 사실을 따라 계산하라고 합니다. 계산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미 내리신 결산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듯(롬 6:10), 그분과 연합한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님이 여기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여기고, 하나님이 결산하신 대로 우리를 결산하게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6장 강해』에서 이 계산은 없는 사실을 믿음으로 만들어 내는 기법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통장에 없는 돈을 있다고 상상한다고 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통장에 돈이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면 빈털터리처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만 계산합니다. 자신의 실패와 죄, 부족함과 믿음 없음을 헤아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여전히 죄의 종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당신의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분이 빠졌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을 자기 것으로 계산합니다. 자신의 것만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와 영생, 거룩함과 신실함을 바라보며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상태가 아니라 위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상태에 따라 안심하거나 불안해합니다. 기도가 잘되면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여기고, 안 되면 멀어졌다고 느낍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사랑받는 사람처럼, 넘어지면 버림받은 사람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도 하루에 몇 번씩 흔들립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영적 침체』에서 시선을 자신의 상태가 아니라 위치로 돌리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홀로 서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혼자라면 자기만 바라보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행복은 내가 누구인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산상설교 강해』에서 행복 자체를 목표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결국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마 5:6).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맺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몇 점인가?”가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자신에게 연합시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데려가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은 영원한 속죄와 영원한 연합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줍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도 아직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의 두 방향 성경은 ‘예수’를 말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예수를, ‘복음’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고 했습니다(갈 1:6). 다른 복음은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이것도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에서 불편한 진리를 빼는 것입니다. 죄와 타락, 심판과 회개를 빼고 사랑과 성공과 축복만 말하는 것입니다. 더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의 의와 공로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빼는 복음은 인간의 죄와 타락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단 하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 하나의 죄도 남김없이 해결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공로를 조금도 보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습니다. 왜 참된 복음을 듣지 못했나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했고, 열여덟 살에는 런던의 차링크로스 웨일스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까지 맡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그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그가 교리문답에 바르게 대답했다는 이유로 그를 교인으로 받아들였을 뿐, 그의 영혼이 실제로 거듭났는지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와 거듭남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설교였지만, 그런 설교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설교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전제 아래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죄를 깨우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 선포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설교에 치우친 것입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복음 설교를 듣지 못한 경험은 로이드 존스의 사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다르며, 세례를 받았거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중생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자주 강조했습니다. 특히 교인들의 영혼을 맡은 목회자는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바로잡으려던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참된 복음주의와 진리의 재발견 로이드 존스는 현대 복음주의가 18세기의 복음주의와 청교도들의 신앙과 아주 다르며, 참된 복음주의는 현대 복음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복음주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동역자였던 이안 머레이(Iain Murray)는 『오래된 복음주의』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되어 청교도들과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거치며 이어져 왔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복음이 아니라 옛 복음의 재발견입니다. 진리는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인간의 의에서 하나님의 의로, 인간이 주도하는 사역에서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으로 돌아가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복음의 진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앞서 본 로이드 존스의 경험은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남깁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교회에서 어떤 복음을 들어야 할까요? 중한 병에 걸리면 단지 가깝거나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병원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달린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다음 여정에서는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 소중히 여기며 평생 성경을 풀어냈던 매튜 헨리와 함께 이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0.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 다음 칼럼은 ‘한국 선교 및 순교 160주년 기념 영국 부흥지 순례’ 진행으로 인해 순례가 마쳐진 후 연재됩니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8)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8)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바라보시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의 인생을 바꾼 한마디였습니다. 1850년 열다섯 살의 스펄전은 죄 문제로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성경과 청교도 서적을 읽으며 여러 교회를 찾아다녔지만, 죄의 짐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1월 6일 주일, 거센 눈보라로 본래 가려던 교회에 가지 못한 스펄전은 발길을 돌려 한 작은 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악천후 때문에 설교자가 오지 못하자, 한 평신도가 강단에 올라 이사야 45장 22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설교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펄전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습니다. “젊은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훗날 스펄전은 그날 ‘바라보라’는 한마디에 사로잡혔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순간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오랫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바라봄의 신학 그날의 ‘바라봄’은 훗날 스펄전의 설교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영혼의 눈’에 비유하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참된 믿음임을 일관되게 강조했습니다. 광야에서 뱀에게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온 구원의 길 역시 ‘바라봄’이었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세례 요한 역시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촉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히브리서 기자 또한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성경이 말하는 ‘바라봄’은 단순히 눈으로 쳐다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세상에서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는 태도가 미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을 두고 여전히 자기 힘으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스펄전은 「주권과 구원」에서 “사람의 눈을 그 자신에게서 돌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과 자격, 선악의 행위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타락한 본성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시 그러나 구원에 있어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기 의존은 하나님을 향한 ‘무시(無視)’로 이어집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시야에 두지 않고, 마치 없는 존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범죄는 인간에게 벌거벗은 수치와 연약함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창 3:7-8). 자신들의 문제를 하나님께 내맡기고 그분의 손길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 힘으로 수치를 가리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단지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 곧 구원에 있어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기 의(義)’야말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불신의 본질입니다. 첫 번째 복음 다행히 창세기는 인간의 절망적인 몸부림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인간이 만든 무화과나무 잎 치마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자기 해결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입혀주신 가죽옷은 그들의 수치를 온전히 가려주었습니다. 스펄전은 「첫 번째 복음」에서 아담의 무화과나무 치마를 ‘스스로 수치를 가리려는 인간의 의’로, 하나님이 입히신 가죽옷을 ‘피 흘림을 통한 대속과 거저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로 설명하며 이를 복음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 자신의 무력한 의에서 눈을 떼어, 능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 시선을 이동시켜 줍니다. 이 시선의 이동은 단순한 관점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의 중심이 ‘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나뉘지 않는 영광 온 우주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 수많은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타협하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나님은 만물을 홀로 창조하심으로 창조의 영광을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영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펄전은 구원에 인간의 공로나 노력을 조금이라도 보태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선은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를 오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오직 예수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별세(別世)’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습니다(눅 9:31).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 ‘엑소도스(exodos)’는 ‘떠남’을 뜻하며, 구약의 출애굽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킵니다. 구약의 출애굽이 종살이하던 백성을 해방시킨 사건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죄와 사망에 매인 인류를 구원하는 더 큰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를 보며 감격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세 분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하자, 구름이 덮이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구름이 걷힌 후 제자들의 눈앞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한 분뿐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시키시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죄를 처리하실 유일한 담당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담당자 한번은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환경미화원들이 파업 중이었습니다. 쓰레기를 처리할 담당자가 손을 놓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쓰레기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죄를 지은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을 뿐 아니라,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 그 죄책과 심판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원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 1:4) 성경대로 죽으신 그리스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 증언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즉 십자가는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 오랫동안 예언하신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그 예언 가운데 하나가 스가랴서에 나타납니다.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특히 구약의 속죄 제사에서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고, 죄인을 대신해 죽어야 했으며, 피 흘림을 통해 용서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 자체는 인간의 죄를 영원히 없애지 못했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 구약의 제사는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 장차 오실 완전한 제물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는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실체이신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신 흠 없는 어린양 죄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타락 직후 약속된 ‘여자의 후손’(창 3:15)으로 오신 예수님은 동정녀를 통해 흠 없는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벧전 1:19)이라 불렀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셨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서야 할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고후 5:21) 세례 요한은 이 비밀을 깨닫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스펄전은 여기서 ‘죄’를 단수(the sin)로 표현한 대목에 주목하여, 세상의 수많은 죄악이 하나의 거대한 죄의 덩어리처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그 모든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를 위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이에 구약의 성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이미 오셔서 단번에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단 한 번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 속죄의 효력은 영원합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스펄전은 이 외침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승리의 선언으로 설명했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제사와 예표와 약속과 예언이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죄인이 자신의 공로나 행위를 더하여 그 구원을 완성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완성된 것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서 있던 제사장, 앉으신 그리스도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히 10:11) 스펄전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항상 서서 제사를 드린 이유를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십자가에서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고, 하늘 성소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선언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모습이 동일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속죄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속죄의 완결을 선언합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 스펄전은 「단번에 이루신 제사」에서 완성된 속죄에 인간의 행위나 참회를 덧붙이려는 시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빚의 마지막 한 푼까지 자신의 피로 완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한 분으로 충분한가 단 한 분의 희생이 어떻게 수많은 죄인을 구원하기에 충분할까요?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는 유한한 피조물 전체의 가치보다 큽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유한한 피조물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흘려진 것입니다. 스펄전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얼마나 완전하고 충분한지를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표현을 가져와 강조했습니다.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사 40:2) 물론 이 말씀은 본래 심판을 마친 예루살렘을 향한 위로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스펄전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의 속죄에 적용하여, 그분의 희생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넘치도록 충분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속죄가 참된 복음이고, 영원한 속죄를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며, 영원한 속죄를 받는 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물론 이는 구원받은 자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하신 말씀처럼, 성도에게는 거룩한 삶을 향한 성화(聖化)가 남아 있을 뿐, 구원을 위한 또 다른 속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속죄의 본질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일시적인 속죄가 아니라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을까요? 그 답을 알려면 속죄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 44:22) 죄를 없애신 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로 돌아오라”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구원의 궁극적 목적지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통로입니다(벧전 3:18). 십자가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죄 사함을 통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이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구원하시는 역사는 결국 임마누엘로 이어집니다. 죄 때문에 멀어진 인간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위한 영원한 속죄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함께하려면 죄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용서받았으나 내일 다시 정죄받는 불안한 관계라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구원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시고 완전히 해결하셔서, 더 이상 정죄의 근거로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구원하여 자기 앞으로 불러 영원히 함께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28) 단 한 번, 그러나 영원히 영원한 속죄에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우리를 자기 앞으로 불러 영원히 함께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영원한 속죄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여기에서 영원한 속죄와 영원한 행복이 만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면, 왜 오늘날에도 죄책감과 두려움, 영적 불안 속에 살아가는 교인들이 많은 것일까요?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복음이 주는 자유와 기쁨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던 20세기의 대표적인 강해 설교자가 마틴 로이드 존스였습니다. 다음 여정에서는 로이드 존스와 함께 그 해답을 찾아가겠습니다.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7)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7)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는 제자로 부름받아 예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만, 은 삼십에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을 넘겼습니다. 그 후 유다는 후회하며 번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배반하고 스스로 불행의 길로 간 유다를 ‘멸망의 자식’(요 17:12)으로 칭하셨습니다. 배은망덕 유다처럼 은혜를 입고도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지만,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망과 불행 가운데 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고 사탄의 유혹도 허락하셨느냐며 배은망덕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의 불행이 아님을 성경은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보여 주는 실제적인 순종의 경계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버리려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까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고 근심하셨습니다(창 6:6). 은혜를 배반한 두 모습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으면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아담처럼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독립이라면 두 번째는 거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건을 얻으려면 값을 지불하고, 일하면 보수를 받으며,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이러한 거래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래의 원리를 하나님 앞까지 들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했으니 복을 주셔야 합니다. 제가 선하게 살았으니 받아 주셔야 합니다. 제가 종교적으로 열심히 살았으니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은혜의 원리를 모르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거래가 됩니다. 그리고 16세기 독일에서 이 거래의 종교를 누구보다 처절하게 경험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했던 수도사 1505년, 거센 뇌우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젊은 루터는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누구보다 철저하게 수도원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철저히 살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훗날 루터는 당시를 회고하며 죄인을 심판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몸부림쳤는데 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었을까요? 루터는 은혜로 받아야 할 것을 자신의 공로로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거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더 해야 저를 받아 주실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답변이 없으셨고, 그럴수록 루터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커져 갔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저서 『노예의지론』에서 인간의 의지 자체가 이미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본성적으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불가능한 하나님과의 거래 기본적으로 거래가 성립하려면 양쪽이 각자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 돈을 내놓고 상대방은 자기 물건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자기 것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엄청난 재물을 드리고도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사도 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기 것을 먼저 드려서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종교적 행위조차 이미 하나님께 받은 것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래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실 이유가 없고, 우리 역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래가 아닌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은혜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오직 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하신 말씀도 이 은혜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은혜로 받고 은혜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은혜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창조에서부터 구원과 제자의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이 은혜에서 시작하여 은혜로 이어지고 은혜로 끝납니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좀처럼 자신의 손을 비우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게 하나님께 보여 드릴 만한 선한 것이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노력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손을 비우는 율법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은 죄인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한 거래의 사다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율법의 기준을 외적인 행위의 수준으로 낮추어 자신을 의롭다고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처럼 ‘나는 불의하지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다’며 자신의 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행동을 넘어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추기 시작하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루터가 자신의 삶에서 처절하게 경험한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라”고 요구했고 루터는 온 힘을 다해 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행하면 또 다른 부족함이 보였고, 외적인 행동을 살피면 마음속의 죄가 보였습니다. 루터가 도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율법이 루터에게 새로운 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손에 의가 있다는 착각을 깨뜨렸습니다. 마침내 루터의 손이 비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주목시키는 은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어느 날 가게에 놓인 체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 주인인 할아버지가 “한 움큼 집어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가만히 있자 주인은 자신의 큰 손으로 체리를 집어 주었답니다. 그 후 어머니가 왜 직접 집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이는 “할아버지 손이 내 손보다 훨씬 크잖아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은혜는 내 작은 손에 무엇을 채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크신 손에서 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내 손에 하나님께 드릴 만한 의가 없음을 보여 주고, 복음은 죄인에게 주실 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루터는 오랫동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손에 하나님께 드릴 만한 의가 있는가?” 그러나 복음은 그의 시선을 자기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돌렸습니다. 마침내 발견한 하나님의 의 루터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처음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받아들여 두려워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그 거룩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비롯한 성경 말씀과 오랫동안 씨름하면서 마침내 마음에 빛이 비치듯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심판하는 무서운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훗날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치 새로 태어나 열린 문을 지나 낙원에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율법은 그의 손을 비웠고, 은혜는 그 빈손에 하나님의 의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의를 어떻게 받을까요? 그 답은 믿음입니다. 은혜 안의 믿음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결국 믿음이 인간이 하나님께 내놓아야 하는 새로운 조건이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순서가 중요합니다. “은혜에 의하여”,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원 역시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값을 지불하는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의를 받는 빈손과 같습니다. 믿음의 가치는 손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 손이 누구를 붙들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을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공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즉, 믿음조차도 은혜 안에서 주어지며 은혜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받은 자와 은혜 입은 자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은혜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두 번 받았습니다. 집을 떠날 때도 받았고,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받음’은 전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받았지만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받았지만 감사하지 않았고, 받은 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는 달랐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19) 이제 자신에게는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달라졌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은혜 입은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행복의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받는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받은 것을 은혜로 알 때 행복이 시작됩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곳에 거래를 위한 상(床)이 즐비했기 때문입니다. 1517년, 루터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거래를 보았습니다. 면죄부가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해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을 그대로 루터의 종교개혁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래로 바꾸려 할 때 종교가 얼마나 쉽게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지는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의 ‘거래의 상’을 뒤엎으셨다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으로 당시 교회 안에 세워진 ‘거래의 상’을 뒤엎기 시작한 셈입니다. 종교개혁은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다시 선명하게 드러낸 운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끝까지 저버리는 인간의 마지막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롬 1:28)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지막에는 영원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를 두고 하신 첫 말씀이 그토록 두려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마지막 메모에는 그의 긴 영적 여정을 압축하는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지다. 이것이 진실이다.” 젊은 수도사 루터는 자기 손에 의를 가득 채우려고 했습니다. 기도를 채우고, 금식을 채우고, 종교적 행위를 채우며 하나님께 보여 드릴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에 이른 루터는 자신의 손이 비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빈손이 은혜를 받는 손이었습니다. 거지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손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 빈손을 누구에게 내미느냐입니다. 루터는 마침내 자기 손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미시는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손에는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행복의 일곱 번째 여정 이제 이번 행복의 여정을 다시 돌아봅시다. 아담도 받은 사람이었고, 가룟 유다도 받은 사람이었으며, 탕자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수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모든 것을 받고도 자신이 주인이 되려 했고, 유다는 그리스도 곁에서 사랑을 받고도 주를 저버렸으며, 탕자는 아버지가 준 재산으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루터 역시 자기 손에 의를 채워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달랐지만 불행해진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바로 “내가 주인이 되겠다, 내 힘으로 이루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시선을 ‘내가’에서 하나님께로, 내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돌립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은혜 입은 자가 행복합니다. 그래서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은혜를 아는 행복은 공로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된 안식이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은혜를 입었는가” 하는 감격이며, 받은 은혜를 거저 나누고 싶어 하는 자유입니다. 또한 구원 역시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을 받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내놓을 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의를 받습니다. 첫 번째가 ‘창조의 은혜’라면 두 번째가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의를 값없이 주신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은혜의 가장 깊고 아픈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은혜는 아무 값도 치러지지 않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 값을 우리가 치르지 않은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그 값은 어떻게 치러졌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다음 행복의 여정에서는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과 함께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겠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6)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6)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이 작은 모형 하나도 저절로 존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저 거대한 우주는 어떻겠는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뉴턴이 무신론자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방 안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천천히 돌도록 정교하게 만든 태양계 모형이 놓여 있었습니다. 친구가 감탄하며 “누가 이걸 만들었나?”라고 묻자, 뉴턴은 담담히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부속품들이 우연히 결합해서 생긴 거라네.”라고 답했습니다. 친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어이없어하자, 뉴턴은 위와 같이 되물었다고 합니다. 뉴턴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작은 물건 하나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고 하면서, 왜 훨씬 놀라운 질서를 가진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는 창조주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요? 최초의 진리 성경은 온 인류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진리를 엄중히 선포함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한 문장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유일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명과 능력, 선과 복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창조만 하시고 손을 떼신 분도 아닙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을 아시며 역사의 모든 순간을 다스리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섬세한 주권에 대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예수님도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은하계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 세미하게 살피시고 돌보시는 분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질적인 관계를 보게 됩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을 존재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 존재하며, 그분으로부터 공급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피조물이 이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이 온 우주의 평화를 위한 영적 질서이고, 이 진리 안에 머물 때 피조물은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대적자 그러나 이 영원한 진리와 질서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 14:13-14) 이사야 14장은 역사적으로 바벨론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 나타난 극단적인 교만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탄의 반역을 예시하는 본문으로 읽혀 왔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탐한 것, 그것이 반역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인간에게도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에덴에서 뱀을 통해 사탄이 인간에게 건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사탄은 그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 말에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서려는 욕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믿었고, 결국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불행 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불행해지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행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행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순간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든 종교개혁자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입니다.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 종교개혁의 교과서로 불리는 칼빈의 대표작 『기독교강요』는 매우 중요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가진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거의 전적으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칼빈은 이 두 지식이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자신을 바르게 알아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일까요?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창조주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생명을 받았고 몸을 받았으며, 공기와 먹을 것과 살아갈 시간을 받았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과 동산과 아내를 받았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창조주로 안다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피조물로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그분께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 사실을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받은 자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랑하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 이 질문 앞에서는 인간의 자랑이 작아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조차 먼저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던 다윗은 성전을 위해 엄청난 재물을 준비하고도 드린 자가 아닌 받은 자로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가진 자나 드린 자이기 전에 우리는 먼저 받은 자입니다. 칼빈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받은 것을 받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받았으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재능을 받았으면서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자랑하며, 기회와 능력을 받았으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여깁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행복의 근원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첫 번째 복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빈곤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자기 의가 없고, 자신 안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영적 부요함이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창조의 복된 질서였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야 하는 인간 곁에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짜 불행은 모든 것을 받아야 하는 피조물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데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떠나 웅덩이를 판 악 그렇다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행복도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여전히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며,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바람 자체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을 피조물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고, 성공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사람에게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으려 하고, 건강만 붙들면 죽음의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의 창조주가 되어 줄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에게 무한한 행복을 요구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조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우상 공장’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우상은 손에서 만들어지기 전에 마음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엇인가를 향해 “이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기대하며 그것에 궁극적인 만족을 요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피조물을 올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생수의 근원을 떠났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물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입니다. 두 아들이 잃어버린 행복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이 문제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으로 받은 뒤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의 것으로 행복해지려고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깨닫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집을 떠날 때의 그는 자기 것을 가지고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에게 받아야 살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가난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풍성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또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맏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었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내가 섬겼습니다. 내가 명을 지켰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행복하려 했습니다. 맏아들은 자기의 것으로 아버지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했습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자기 것에 초점을 맞춘 중심은 같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잃고 잔치에 들어갔지만, 자기 의로 가득했던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사람보다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영적 가난을 깨닫기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비극 여기에서 칼빈의 인간 이해는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그는 죄가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마음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입니다. 전적 타락은 인간이 가능한 모든 악을 다 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인간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인간은 행복의 방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방향을 되돌릴 능력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의 사건 뒤에 하신 말씀도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놀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종교적 노력을 더 보태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칼빈도 이것을 교리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회심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굴복시키시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드셨다는 취지로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그 고백의 주어입니다. 칼빈은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굴복시키셨다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방향을 바로잡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심장을 드린 칼빈 훗날 칼빈을 상징하게 된 문양에는 펼친 손 위에 심장을 올려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습은 이번 행복의 여정과도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심장도 생명도 존재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조차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이로써 『기독교강요』 첫머리의 두 지식이 다시 만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그분께 있음을 아는 것이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그분께 돌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행복의 여섯번째 여정 이제 다시 에덴의 나무 앞으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거짓말에 매료되었습니다. 받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행복을 받는 대신 스스로 행복의 근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였고,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으며, 충만함이 아니라 결핍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피조물에서 행복을 얻으려 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달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같은 착각이 있습니다. 받아 살아가야 할 피조물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는 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느냐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행복의 방향만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그 방향을 되돌릴 능력마저 잃었습니다. 인간이 다시 행복의 길로 돌아가려면 하나님께 받는 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죄인에게 어떻게 다시 행복의 길을 열어 주실까요? 다음 행복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자신의 종교적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몸부림쳤던 마르틴 루터를 만나려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5)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5)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축하드립니다. 순산입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가족들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에 나온 아기는 울고 있고, 아이를 낳은 어머니 역시 해산의 고통을 통과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에는 호흡을 시작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평범한 출생의 장면 뒤에서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결국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왜 태어나는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가? 성장에는 아픔이 있고, 사랑에는 이별이 있으며, 건강에는 질병의 가능성이 있고, 살아 있음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립니다. 욥기의 엘리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불꽃이 위로 날아가듯이, 죄와 죽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고통받도록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출생에는 왜 고통과 죽음이 따라오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 출생의 비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죄와 죽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에게 분명한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선택의 끝에 죽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을 불신하여 그 말씀을 떠났고, 그로 인해 죄와 죽음이 인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후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 그리고 고통이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출생이 지닌 비극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는 생명은, 죄로 인해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시한부 생명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 역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하면서,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왜 이미 한 번 태어난 사람에게 또 하나의 출생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출생으로 받은 생명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조금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새로운 출생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바로 이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통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입니다. 큰 충격을 안겨준 책 한 권 옥스퍼드 대학 시절의 휫필드는 누구보다 진지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와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감옥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죄를 이기기 위해 몸을 혹독하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종교적 노력도 그의 영혼에 참된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찰스 웨슬리가 그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의 『인간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쿠걸은 참된 신앙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휫필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휫필드는 훗날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빛이 자신의 영혼에 비치면서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질문은 달라졌습니다. “나는 얼마나 종교적인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후 휫필드가 평생 외친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거듭남, 외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 몸은 가까웠지만 마음은 먼 사람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맏아들입니다. 그는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기쁨의 잔치를 베풀자 그는 화를 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잘 따랐지만, 그의 말에서는 아버지를 기쁨으로 섬기기보다 자신의 수고를 계산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몸은 아버지 곁에 가깝게 머물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과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 안에 머무는 것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거듭나지 못했던 종교지도자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고, 당시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착하게 살아라”, “기도를 더 해라”, “율법을 더 철저하게 지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필요한 것은 종교적인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 머무는 것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니고데모와 같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난 자에게 임하는 변화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즉 기독교는 죄인을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단순히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믿음에 대해 엄밀하게 구별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그들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지는 않습니다. 휫필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이라는 설교를 통해 이 구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휫필드를 자신의 영적 롤모델로 삼았던 스펄전은, 어떤 약에 대해 잘 알아도 그 약을 실제 복용하지 않으면 그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십자가와 부활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믿음이 단순한 지식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살아 있는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의 정죄와 영적 죽음 아래 있다면, 아무리 종교생활을 오래 하고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의 그리스도인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휫필드의 대표적인 설교 가운데 하나가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이고 아니면 아닌 것인데, 어떻게 ‘거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매우 엄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놀랍게도 이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3)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그분께 속한 사람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휫필드가 「거의 그리스도인」을 통해 경고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훌륭한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종교생활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자동으로 증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휫필드에게 참된 신앙은 본성의 내적인 변화와 하나님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이었습니다. 휫필드가 이 메시지를 강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역시 한때 종교적 열심을 참된 신앙으로 착각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8–29)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 안에 있는가가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죄와 죽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일 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죄 사함과 새로운 생명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인간을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는 죄의 해결과 새로운 생명이 함께 나타납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죄 사함과 성령의 새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 안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휫필드는 「성령의 내주, 모든 참된 신자들의 공통된 특권」이라는 설교를 통해 참된 신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참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죄 때문에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죄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여기에 구원의 놀라운 회복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들어갑니다. 정죄에서 생명으로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못 본 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책과 정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난 성도에게도 죄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평생 죄와 싸우며 거룩함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는 단순히 종교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고,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휫필드의 삶과 설교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찰스 웨슬리가 건네준 스쿠걸의 책 앞에서 젊은 휫필드가 마주했던 질문이자, 훗날 그가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당신은 거듭났는가?” 우리 역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종교생활은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도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나는 교회 안에만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내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는가?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이제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 봅시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은 무엇일까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업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병이 드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일들도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모두 유한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불행입니다. 더 근원적인 불행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영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영원에서만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난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종교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은 아래와 같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누리는 참된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종교생활이 어느 정도의 위안을 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심판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에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지만, 어떤 종교적 행위도 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지난 3편에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나지 못해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영원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한 구절 안에 두 영원이 있습니다. 영벌과 영생입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가장 큰 불행은 이 세상에서 원하는 행복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형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겁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불이 난 집에서 잠든 사람을 깨우는 외침이 사랑이듯, 심판에 대한 경고는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는 사랑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조금 더 행복한 종교생활을 위한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첫 번째 출생에서 두 번째 출생으로 이제 처음 아기가 태어나던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첫 번째 출생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결국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는 것도 비극이지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죽는 것은 더 큰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번째 출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는 죄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생명이 완성되는 날을 이렇게 보여 줍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 첫 번째 출생으로 시작된 삶에는 울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완성되는 날에는 더 이상 죽음도 울음도 없습니다. 휫필드가 평생 외쳤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행복의 다섯 번째 여정에서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죄는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종교생활은 그 단절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출생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출생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행복에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거듭남은 그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인간은 불행해지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행복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행복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음 행복의 여정에서는 아래 제목으로 존 칼빈과 함께 그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br/>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4)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4)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결국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어. 그런 하나님을 뭐 하러 믿어?” 오래전 제 친척 중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고 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위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 후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여러 번 접하면서 제 마음에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이처럼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마음에는 불안과 원망과 두려움이 가득할 수 있을까요? 지난 칼럼에서 꿀이 달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실제로 맛보는 것이 다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혹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과 가까운 것은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요? 생각 속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 청년 시절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던 나이키 운동화를 길거리에서 아주 싼 가격에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신지 않아 신발이 떨어지기 시작해 자세히 살펴보니 NIKE가 아니라 NIKI였습니다. 복제품으로 진짜 제품을 오해하듯 신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실제 하나님이 아니라 각자의 생각 속에서 바라거나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한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내 인생이 잘 풀려야 한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도 보답해주셔야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래처럼 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과,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그 자체를 복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기복신앙과 행복신앙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행복신앙은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임을 발견합니다. 성경도 하나님과 가까워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때문에 복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 그 자체가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통해 복을 얻는 것과 하나님을 복으로 얻는 것은 다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참된 평안이 없어 깊이 고민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입니다. 이보다 더 열심히 믿을 수 있을까 웨슬리는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며 자랐고,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는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섬겼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까지 방문했습니다. 그와 동료들의 종교생활이 너무나 철저하고 규칙적이어서 훗날 ‘메소디스트(Methodist, 규칙쟁이들)’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웨슬리는 편안한 영국 생활을 떠나 험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미국까지 선교사로 갔습니다.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뜨거운 종교적 열심이 인간에게 구원의 확신과 참된 평안을 줄 수 있다면 웨슬리야말로 누구보다 평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철저한 종교생활로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드러났습니다. 폭풍이 드러낸 두려움 1736년 미국 조지아로 향하던 배가 대서양에서 거센 폭풍을 만났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배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웨슬리 역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함께 배를 타고 있던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침착하게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목회자였습니다.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지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반면 모라비안 교도들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한 가운데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은 웨슬리의 믿음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종교적 열심 아래 숨어 있던 두려움을 드러냈습니다. 웨슬리는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을 수 있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왜 웨슬리는 평안할 수 없었나 그렇다면 왜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웨슬리는 평안할 수 없었을까요? 그의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문제는 구원과 행복을 얻기 위해 바라보아야 할 곳을 아직 분명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선행하고 자신을 절제하며 죄와 싸우는 것은 모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구원을 받는 근거로 삼는 순간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충분히 기도했는가?’ ‘나는 충분히 거룩한가?’ ‘나는 충분히 회개했는가?’ ‘나는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면 완전한 확신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잡념이 생깁니다. 사랑하면서도 이기심이 섞입니다. 봉사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오늘 뜨거웠다가 내일 식기도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도 다시 넘어집니다. 그래서 종교생활을 구원과 행복의 근거로 삼는다면 마지막까지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종교와 복음의 결정적 차이 불완전한 인간은 스스로 이 질문에 완전한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복음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종교는 자신의 행위와 경건을 하나님께 인정받는 근거로 삼으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종교적 노력에 의지하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구원에 대한 시선이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행복의 중심에는 죄인인 내가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해 쌓아 올린 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성된 사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교적 성취를 구원의 근거로 삼아서는 완전한 평안에 이를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자신을 바라보면 구원도 행복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나는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내일은 믿음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가 잘되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내일 고난을 만나면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주 변하는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삼으면 구원에 대한 확신과 행복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웨슬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종교적 열심과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서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불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달라진 웨슬리의 시선 결국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안 목사인 피터 뵐러(Peter Böhler)를 만났습니다. 뵐러는 참된 구원과 행복은 인간의 종교생활로 얻어내는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주었습니다. 특히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가 ‘성결과 행복(holiness and happiness)’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놀라운 전환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것도 성결과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노력 끝에서 얻으려 했습니다. 뵐러는 그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성결과 행복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 있는 믿음에서 맺히는 열매였습니다. 마침내 웨슬리는 “주여,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자신의 종교생활의 한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구원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로 신뢰하는 믿음을 얻기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뵐러가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웨슬리는 거듭된 내적 갈등과 영적 무력감 때문에 더 깊은 고뇌를 겪었습니다. 드디어 복음의 꿀을 맛보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의 한 모라비안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에 이루시는 변화를 듣던 웨슬리는 한순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와 사망의 정죄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는 훗날 그 순간을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감정 체험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웨슬리가 실제로 맛본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복음이 ‘죄인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복음’으로 다가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게 된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리면, 꿀의 단맛을 아는 자리에서 그 단맛을 실제로 맛보는 자리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죄 사함의 확신과 평안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고백 이처럼 복음의 능력을 실제 체험한 이후 웨슬리는 자신의 이전 종교생활을 매우 엄격하게 돌아보고 왜 자신이 당시에는 확신과 평안을 갖지 못했는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형 새뮤얼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두가 깜짝 놀라게 하는 고백을 합니다. “나는 지난 5월 24일 전까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열심 있는 목회자로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했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고, 선교사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갔습니다. 웨슬리의 회심 이전 상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적 경건’으로, 어떤 이들은 ‘불완전한 믿음’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당시 웨슬리 자신은 그만큼 자신의 이전 종교생활을 엄격하게 평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정말 같은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활동을 했는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원과 행복의 유일하고 완전한 근거로 믿고 있는가?” 웨슬리가 발견한 것은 더 많은 종교적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불완전한 행위에서 눈을 들어 완전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에서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성결과 행복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한 행복과 완전한 근거 이제 처음 이야기했던 새벽기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확인하고 있습니까?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떨어지면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사업이 잘되면 사랑하시는 것이고 실패하면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건강하면 사랑하시는 것이고 병들면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만일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 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행복은 환경이 변할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할 결정적인 장소를 보여 줍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았는가?’에서,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을 나는 신뢰하는가?’로 바뀝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도 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충분히 했는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충분히 이루셨는가?’로 바뀝니다. 내가 불완전해도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합니다. 내가 흔들려도 그리스도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사랑은 변해도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의 근거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완전한 행복에는 완전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 근거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종교적 열심이나 행위도 아닙니다. 나를 위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과 그분의 의가 완전한 행복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입니다. 행복의 네 번째 여정 첫 번째 여정에서 인간은 왜 행복을 갈망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째 여정에서는 세상의 행복이 왜 시한부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 여정에서는 진정한 행복은 죽음으로 끝날 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 안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존 웨슬리와 함께 걸은 네 번째 여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실제로 알고 신뢰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는 것과 하나님을 행복으로 얻는 것도 다릅니다. 웨슬리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질 때 비로소 그가 찾던 확신과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네 번째 여정에서 이것 하나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완전한 행복에는 완전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 근거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종교생활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시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이었던 니고데모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오랫동안 종교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생명이 필요한 것일까요? 다음 여정에서는 존 웨슬리의 동역자이자 18세기 대각성운동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휫필드와 함께 이 질문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3)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3)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만일 엄청난 금액의 복권에 당첨된 날, 의사로부터 ‘암 말기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요?” 조금은 극단적 질문일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걱정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인생을 꿈꿉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왜 시한부 선고는 일상의 행복을 무너뜨릴까요? 그동안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나쁜 것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누릴 시간이 조만간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더 불편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암 환자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기에 결국 시한부 인생을 살아갑니다. 다만 시한부 환자는 남은 시간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고 살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행복에는 결국 끝이 찾아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시간의 한계를 가진 유한한 세계이며, 무엇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얻어도 죽음 앞에서는 결국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 행복을 마음껏 누려 본 사람의 고백 성경에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누려 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입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원함을 따라 마음껏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모두 누려 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누려본 솔로몬은 결국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탄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름다운 왕궁과 산해진미와 즐거운 음악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의 ‘헛됨’은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입김처럼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삶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주어졌음을 고백합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즉 인간은 유한 세계에 살면서 영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행복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누리면서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진짜 갈망은 단순히 ‘행복하고 싶다’가 아니라 ‘영원히 행복하고 싶다’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이 줄 수 있는 대부분의 행복을 누려 본 뒤 그 행복의 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는 세상을 정복하여 행복이라 이름 붙은 수많은 것들을 차지한 뒤 그 끝을 피하려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불로초를 찾은 황제 이 갈망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진시황입니다. 그는 광활한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최고 권력자로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지만, 그 막강한 권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로장생을 갈망하며 불로초를 찾아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천하를 얻었지만 그 천하를 영원히 누릴 생명은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죽음 앞에서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의 한계를 보았고, 진시황은 죽음을 피함으로 그 모든 것을 계속 누리려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질문에서 만납니다. 언젠가 죽는 인간이 어떻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여기에서 세상 행복의 근원적 문제가 드러납니다. 시한부 행복은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을 끝까지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누리려면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한 단어로 부릅니다. ‘영생’ 죽음 앞에서도 평안했던 사람 여기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를 주목해 봅니다. 미국 식민지 시대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던 에드워즈는 훗날 대각성 부흥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인물이지만, 그의 남다른 점은 젊은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70개의 「결심문」을 작성하여 자기 삶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기 위해 세운 결심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자주 생각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파란 젊은이가 죽음을 묵상하겠다고 결심하다니 어둡고 우울한 사람이었을까요? 정반대입니다. 에드워즈는 현재의 삶을 언제나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오늘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가 아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이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영원에서도 이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였습니다. 즉 그가 죽음을 미리 생각한 것은 인생을 어둡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이 무너뜨릴 수 없는 행복을 붙잡고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인생의 끝에서도 그가 평생 바라보았던 영원의 시선이 드러납니다. 1758년, 프린스턴 대학의 전신인 뉴저지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한 직후 에드워즈는 당시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시행되던 접종을 받은 뒤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54세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생애의 정점에서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종을 전하는 기록을 보면, 그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평안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자신과 아내 사라 사이의 특별한 연합이 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고, 자녀들에게는 아버지를 잃게 되는 일이 그들로 하여금 결코 실패하지 않으실 아버지를 찾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권면을 남겼습니다. 죽음을 자주 생각했던 젊은 날의 결심이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지막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한 사람이었기에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일상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예기치 않게 죽음 앞에 섰지만, 그에게 죽음은 모든 행복을 끝내는 마지막 절벽이 아니라, 그가 평생 바라보아 온 영원을 향해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분 여기서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난 여정에서 예수님은 영원 세계에서 유한 세계로 오신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왜 영원 세계에 계시던 분이 유한 세계로 내려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리고 그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28) 즉 예수님께서는 유한한 생명과 죽음의 한계 속에 있는 인간에게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영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통해 우리를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유한한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세상에서 바르게 살거나 행복하게 살라고 가르치기보다 반복해서 영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시한부 생명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행복에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말씀하셨다는 것만으로 정말 영생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진시황도 영원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생도 인간의 오래된 소망을 종교적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 앞에서 성경은 한 사건을 제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슬퍼하며 마중 나온 그의 자매 마르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영생의 소망을 확증한 부활 진시황은 ‘죽지 않는 불로초’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죽어도 사는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불로장생은 죽음을 피하려는 인간의 꿈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있다는 소망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 부활을 통해 자신이 말씀하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드러났다고 선포합니다. 진시황은 죽음을 피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영생은 단순한 불로장생의 소망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건 위에 세워진 영생의 소망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고전 15:17)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놀라운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첫 열매라는 것은 뒤따라올 열매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 분에게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장차 누리게 될 부활 생명의 시작입니다. 영생을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데 영생은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끝없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행복은 아닙니다. 만일 영원히 살더라도 그 삶이 공허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인데,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언약으로 그립니다. 신부가 신랑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과 신랑과 언약을 맺고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사는 것이 전혀 다르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창 1:27). 그렇기에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교제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단순히 끝없이 계속되는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생명입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 바로 여기에서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 「천국은 사랑의 세계」가 빛을 발합니다. 에드워즈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고전 13:8)라는 말씀을 따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의 원천으로 묘사합니다. 태양이 빛의 근원이듯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며, 천국이 사랑의 세계인 이유는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드워즈에게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환경이 완벽해서 생기는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하면서도 헤어집니다. 만나면서도 언젠가 작별해야 합니다. 즉 이 유한한 세계에서 나누는 사랑 역시 이별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바라본 천국에는 사랑을 깨뜨리는 죄와 미움이 없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는 죽음이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걱정하지 않는 세계, 행복하면서 그 행복의 유효기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원한 행복입니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에드워즈의 마지막 고백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아내와의 영적인 연합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사랑의 끝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죽음은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완성되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마지막 목적일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생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고난과 근심은 하나님의 마지막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따라가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주기 위해 오셨고, 성경의 마지막에는 다시는 사망도 애통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행복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완성으로 이끌어 갑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영원히 나눌 수 있는 행복, 이것이 「행복의 순례」가 찾아가는 하나님의 본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꿀에 대해 아는 것과 맛보는 것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천국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을 영원히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결국 영원한 행복은 좋은 것들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행복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을 나누는 영원한 행복,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저서인 『신앙감정론』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영적 감각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실제로 맛보기 시작합니다. 꿀이 달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 단맛을 맛보는 것이 다르듯,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도 다릅니다. 꿀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단맛의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생에 대해 알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천국에 대해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맛보며 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행복의 세 번째 여정 이제 이 글을 시작하며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생 최고의 행운이 찾아온 날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행복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주는 행복은 그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러나 에드워즈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여정에서 어거스틴과 함께 인간이 왜 행복을 갈망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째 여정에서는 존 번연과 함께 세상의 행복이 왜 시한부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드워즈와 함께 죽음 너머까지 질문을 가져갔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죽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에는 영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은 단순히 끝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생명입니다. 에드워즈가 바라본 천국은 바로 그 사랑이 완성되는 세계였습니다. 더 이상 행복의 유효기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영원한 행복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꿀 비유가 중요한 질문을 남깁니다. 영생을 아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평생 꿀에 관해 공부하면서도 그 단맛을 맛보지 못할 수 있다면, 평생 성경을 배우고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그 생명을 실제로 맛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웨슬리는 하나님에 관해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박식한 목회자였고 기도와 전도에 열심이었으며, 심지어 선교사가 되어 대서양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안에 참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에드워즈의 비유를 빌리면, 웨슬리는 하나님과 복음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과연 그 복음의 단맛을 실제로 맛보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했던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다음 칼럼에서는 존 웨슬리와 함께 네 번째 질문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2)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2)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만일 당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 유효기간이 적혀 있다면, 그것을 완전한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조금 낯설고 불편한 질문일지 모릅니다. 웃음이 넘치는 가족과의 저녁 식탁, 오랜 수고 끝에 마련한 소중한 집, 빛나는 햇살 아래 산책하는 아름다운 공원, 평생 꿈꾸던 성공,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이 행복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젊음에도, 건강에도, 성공에도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이 땅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글에서 이러한 행복을 ‘끝이 있는 행복’, 곧 ‘시한부 행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에게 시한부 행복만으로 충분할까요? 이 질문 앞에서 약 350년 전, 인생을 ‘순례’라는 거대한 비유로 그려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입니다. 감옥에서 영원을 바라본 사람 번연은 화려한 학자도, 높은 신분의 성직자도 아니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땜장이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어권 기독교 문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남겼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순례 이야기가 편안한 서재가 아니라 음침한 감옥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허가받지 않은 설교를 계속하다 투옥된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야만 했고,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린 딸에 대한 염려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감옥은 행복과 멀리 떨어진 장소였습니다. 자유를 잃었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감옥 생활 속에서 『천로역정』의 씨앗이 자라났습니다. 세상의 행복을 누리기 어려웠던 곳에서 번연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바라보았습니다. 멸망의 도시를 떠난 순례자 『천로역정』의 주인공 이름은 상징적입니다. 크리스천(Christian).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멸망의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성경을 읽으며 번민하던 그는 전도자(Evangelist)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떠납니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천성(Celestial City)’입니다. 여기서 번연이 던지는 질문은 날카롭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더 좋은 집, 더 안정된 직장, 더 많은 재산, 더 건강한 몸.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들. 그러나 번연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 모든 것을 얻은 뒤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가 떠오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회개는 행복의 방향 전환 회개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최고의 행복으로 삼을 것인가, 어디를 최종 목적지로 바라볼 것인가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의 방향을 세상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삶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즉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과 행복이 이 땅에 있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행복을 최고의 것으로 삼았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를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말씀과 번연의 ‘멸망의 도시를 떠나라’는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 행복을 향해 있습니까?” 시한부 행복만 파는 허영의 시장 『천로역정』에는 이 문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크리스천과 동료 신실(Faithful)이 어느 시장을 지나게 됩니다. 그곳의 이름은 ‘허영의 시장’입니다. 번연은 그 시장에서 집과 토지, 명예와 지위, 쾌락과 즐거움, 온갖 욕망의 대상들이 거래된다고 묘사합니다. 오늘날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크고 화려해진 허영의 시장을 살아갑니다. 광고는 “이것을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속삭이고, SNS는 “저 사람처럼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 유혹하며, 세상은 “조금만 더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 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삽니다. 물건만이 아닙니다. 학력, 경력, 경험, 인정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가 보입니다. 목표했던 집을 얻으면 더 좋은 집이 보이고, 바라던 자리에 올라가면 더 높은 자리가 보입니다. 행복이 손에 잡힌 것 같은 순간, 또 다른 행복이 저 멀리서 우리를 부릅니다. 그렇기에 허영의 시장에는 물건은 넘쳐나지만 영원한 것은 팔지 않습니다. 세상의 행복은 모두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시장 사람들이 두 순례자에게 무엇을 사겠느냐고 조롱하며 묻자 그들은 “우리는 진리를 사겠소(We buy the truth)”라고 대답합니다. 허영의 시장이 결코 팔 수 없는 것을 구한 두 사람은 결국 붙잡혀 박해를 받았고, 신실은 그곳에서 순교합니다. 허영의 시장은 단지 유혹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시한부 행복에 붙잡아두는 곳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파는 시한부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행복의 순례자가 됩니다. 시한부 행복의 세 가지 한계 그렇다면 왜 세상의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될 수 없을까요? 첫째, 채워도 갈망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만 가지면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를 얻고 나면 또 다른 하나를 원합니다. 소유가 늘어나도 인간의 갈망 자체가 완전히 멈추지는 않습니다. 둘째, 누려도 그 감흥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평범해집니다. 처음에는 가슴 뛰던 집도 일상이 되고, 성공이나 승진의 기쁨도 오래지 않아 다음 목표로 바뀝니다. 셋째, 조건이 사라지면 행복도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탕자가 바로 그랬습니다. 먼 나라에서 돈과 자유를 누리던 그의 행복은 가진 것이 바닥나자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시한부 행복이 가진 만족의 한계, 지속의 한계, 조건의 한계입니다. 시한부 행복을 누리는 지혜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시한부 행복이라고 해서 하찮은 것은 아닙니다. 꽃이 며칠 뒤 시든다고 해서 꽃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고, 노을이 잠시 뒤 사라진다고 해서 노을의 아름다움이 거짓인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시한부 행복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꽃에게 영원히 시들지 말 것을 요구하고 돈에게 완벽한 평안을 보장받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유한한 것에게 무한한 역할을 맡기는 순간, 하나님의 선물은 우상이 되고 행복은 속박이 됩니다. 그래서 시한부 행복을 바르게 누리는 방법은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감사히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을 시한부 행복으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 행복을 자유롭게 누리는 지혜입니다. 영원한 아버지의 집 그렇다면 성경이 세상의 행복을 시한부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죽음과 변화 때문만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자신들이 의지했던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불안해하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 더 좋은 집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많은 재산을 주겠다고도, 고난 없는 삶을 보장하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어떤 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의 집이 아무리 좋아도 영원히 살 집은 아닙니다. 평생 꿈꾸며 마련한 집일지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남겨 두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떠나지 않아도 되는 집, 다시는 이별하지 않아도 되는 처소를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시한부 행복과 영원한 행복의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집은 아무리 좋아도 임시 처소이지만, 아버지의 집은 영원한 행복의 처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이 영원한 행복의 처소인 궁극적인 이유는 그곳이 이 세상보다 더 화려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국이 행복한 것은 그곳에 무엇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영원한 행복의 중심에는 장소보다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얼마나 좋은 집을 가졌는가”로 행복한 사람을 정의하지만, 영원 세계에서 유한 세계로 오신 예수님은 그 질문을 바꾸십니다.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는가?” 이것이 번연의 순례자가 걸어간 행복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이 드러내는 시한부 행복 죽음은 시한부 행복의 유효기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 줍니다. 돈과 명예, 건강과 성공도 죽음 앞에서는 멈춥니다. 죽음과 함께 끝나는 행복이 세상 행복의 전부라면, 우리의 행복은 아무리 찬란해도 결국 시한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너머에 본향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번연이 허영의 시장에서 순교한 신실을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의 순례자에게 죽음은 행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경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오래 사는 행복이 아니라, 죽음조차 끝낼 수 없는 행복입니다. 자유한 행복의 순례자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세상을 등지고 천국만 생각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행복의 순례자는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목적지로 착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 사랑을 하나님보다 더 큰 행복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돈을 벌고 사용하지만 돈에게 영혼을 맡기지 않으며, 성공을 기뻐하지만 성공이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행복을 맛보며 그 완성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순례자는 자유합니다. 시한부 행복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매이게 되고 그 행복조차 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의 순례길에 잠시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그것에 매이지 않고 감사하며 영원한 행복의 순례자로 살아갑니다. 행복의 두 번째 여정 이제 이 글을 시작하며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유효기간이 적힌 행복을 완전한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은 끝없는 갈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두 말씀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시한부 행복을 좇아 살았던 삶에서 영원한 행복을 향해 돌이키라는 말씀이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는 그 순례자가 향할 영원한 본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약속입니다. 행복의 순례자는 시한부 행복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히 받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신 분보다 선물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선물을 품에 안고 계속 걸어갑니다. 그의 눈은 선물 너머에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빼앗지 못하고, 환경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으며, 소유를 잃어도 끝나지 않는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번연이 영원한 행복의 목적지를 보여 주었다면, 에드워즈는 영원한 행복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아래 제목으로 세 번째 여정을 걸어가려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다음 여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넘어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라는 순례의 의미가 한층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1)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1)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당신은 왜 살아갑니까?” 이 질문을 갑자기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잠시 머뭇거립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 산다고 할 것입니다.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저 주어진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대답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 보면 마지막에는 놀랍도록 비슷한 한 단어가 남습니다. ‘행복’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이고, 좋은 집을 원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은 것도,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고 싶은 것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고생을 자청하는 사람조차 오늘의 수고를 견디면 내일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평생 행복을 찾아 여행하는 ‘행복의 순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난 사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난 한 청년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흔히 ‘탕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한 뒤, 모든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왜 떠났을까요? 아버지에 대해 뭔가를 오해했을 수도, 답답한 집이 싫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가 원한 것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이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산과 생명, 자유는 모두 아버지가 주신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문제는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선물을 주신 아버지’보다 ‘선물 그 자체’를 더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을 생각할 때 놓치기 쉬운 첫 번째 문제입니다. 행복의 근원을 떠난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600년 전의 한 행복 순례자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 속 작은아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를 살았던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인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나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신학자로 기억하고 존경하지만, 젊은 시절의 어거스틴은 그저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행복에 목말라 이곳저곳을 헤매던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찾아 달려갔고, 쾌락을 좇았으며, 여러 학문을 탐구했습니다. 명성을 원했고 뛰어난 웅변가로 성공하기를 갈망했습니다. 한때는 마니교에 빠졌고, 철학의 숲에서 참된 진리를 찾아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말랐습니다. 그렇게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 돌아와 그토록 갈구했던 행복을 찾은 어거스틴은 자신의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s)』 첫머리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백 중 하나를 남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감상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긴 방황 끝에 인간 행복의 근본적인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행복과 안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향한 근원적인 갈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갈망에는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인간 본성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행복을 갈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유한한 것으로는 완전히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있어 평생 행복 얻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복이 존재하는 참된 주소 곧 행복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원하는 것이 잘못일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기독교는 세상의 행복을 부정하고 금욕적인 삶만을 강요하는 종교일까요? 좋은 집을 원하는 것도 잘못이고, 돈을 버는 것도 잘못이며,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가족과 즐겁게 사는 것도 내려놓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반복적으로 선언했음을 알려줍니다. 어거스틴 역시 세상의 좋은 것들, 곧 가족, 건강, 일용할 양식, 아름다운 자연이 모두 하나님의 ‘선한 선물 (Good gifts)’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과 일용할 양식, 건강과 우정, 아름다운 자연과 삶의 기쁨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좋은 선물입니다. 문제는 선물의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사랑의 질서 (Ordo Amoris)’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며 사랑하는 것이 바른 질서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이 사랑의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보다 선물을 더 사랑하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것들을 하나님을 대신할 행복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가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면 내 삶 전체가 무너질 정도로 성공을 최고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근원인 하나님보다 피조물인 선물을 더 사랑하여, 유한한 선물을 ‘최종 행복’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선물이나 행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젊음에는 끝이 있습니다. 건강에도 끝이 있습니다. 성공과 재산도 언젠가는 두고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 땅에서의 만남에도 언젠가는 이별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 연재에서 저는 이러한 행복을 한 가지 이름으로 불러보려고 합니다. ‘시한부 행복’ 나쁜 행복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지만, ‘끝이 있는 유한한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행복할수록 불안해지는 역설 좋은 것을 얻으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정말 소중한 것을 얻고 나면 그 행복 뒤에서 또 하나의 감정이 따라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행복하지만 헤어짐이 두렵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여유가 생기지만 잃어버릴까 염려합니다. 건강하면 감사하지만 병이 찾아올까 걱정합니다. 행복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는 그 행복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거스틴의 통찰을 따라가면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이 역설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지음받은 영혼이, 언젠가 사라져 버릴 유한한 것들에 자신의 궁극적인 안식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놓치고 변하고 사라질 피조물에 자신의 최종적인 행복을 걸어버리면, 인간은 그것을 얻어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얻기 전에는 ‘가지지 못해서’ 불안하고, 얻은 뒤에는 ‘잃어버릴까 봐’ 불안합니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행복의 자리에 올려놓는 순간,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지도 못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 우리는 흔히 우스갯소리처럼 말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탕자는 정말 그랬습니다. 행복을 찾아 아버지의 집을 떠났는데, 결국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는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유한한 자유를 선택했던 결과는 지독한 결핍과 방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돼지우리와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잊고 있었던 한 곳을 기억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순간을 짧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 15:17)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습니다. 행복의 근원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살았던 먼 나라의 정체를 파악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시한부 행복의 자리에 머물렀던 그가 이제 행복의 방향을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찾아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사람이 행복의 방향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참된 행복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도 그랬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과 쾌락, 지식과 성공과 종교와 철학 속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안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더 멀리 가야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야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선물에서 선물을 주신 분에게로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초청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라는 초청입니다. 즉 선물에서 선물을 주신 분에게로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피조물에서 창조주에게로, 유한한 선에서 최고의 선에게로, 무질서한 사랑에서 바른 사랑의 질서로, 먼 나라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는 초청입니다. 다시 말해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행복의 자리를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돌아갈 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리에서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궁극적 만족을 요구하지 않고 돈이나 성공에 최종 기대를 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을 더 자유롭게 사랑하고, 물질을 감사히 사용하며, 성공과 실패를 넘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다른 좋은 것들도 우상이 아니라 선물이 됩니다. 행복의 첫 번째 여정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을까요? 어거스틴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음받았으며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안식과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남습니다. 유한한 것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유한한 것으로 영원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과연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탕자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습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행복의 여정은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오시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받아들이시는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 역시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합니다. 앞으로 열한 번의 여정에서 우리는 바로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돈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사랑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건강도 소중한 행복이라면 왜 그것들은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찾아 헤매는 세상의 행복에는 정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일까요? 다음 칼럼에서는 존 번연과 함께 아래 제목으로 두 번째 여정을 걸어가 보려 합니다.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천로역정』의 순례자가 아름답고 화려한 세상을 지나면서도 계속 천성을 향해 걸어야 했던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한부 행복’의 한계가 비로소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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