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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순례
크리스천투데이에 연재 중인 제임스강 목사의 칼럼 ‘행복의 순례’ 시리즈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1) 바로 가기] 행복의 순례 (1)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당신은 왜 살아갑니까?” 이 질문을 갑자기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잠시 머뭇거립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위해 산다고 할 것입니다.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저 주어진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대답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 보면 마지막에는 놀랍도록 비슷한 한 단어가 남습니다. ‘행복’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이고, 좋은 집을 원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은 것도,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고 싶은 것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심지어 고생을 자청하는 사람조차 오늘의 수고를 견디면 내일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평생 행복을 찾아 여행하는 ‘행복의 순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난 사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난 한 청년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흔히 ‘탕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한 뒤, 모든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왜 떠났을까요? 아버지에 대해 뭔가를 오해했을 수도, 답답한 집이 싫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가 원한 것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이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산과 생명, 자유는 모두 아버지가 주신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문제는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선물을 주신 아버지’보다 ‘선물 그 자체’를 더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을 생각할 때 놓치기 쉬운 첫 번째 문제입니다. 행복의 근원을 떠난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600년 전의 한 행복 순례자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 속 작은아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를 살았던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인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성인이나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신학자로 기억하고 존경하지만, 젊은 시절의 어거스틴은 그저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행복에 목말라 이곳저곳을 헤매던 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찾아 달려갔고, 쾌락을 좇았으며, 여러 학문을 탐구했습니다. 명성을 원했고 뛰어난 웅변가로 성공하기를 갈망했습니다. 한때는 마니교에 빠졌고, 철학의 숲에서 참된 진리를 찾아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말랐습니다. 그렇게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하나님께 돌아와 그토록 갈구했던 행복을 찾은 어거스틴은 자신의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s)』 첫머리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고백 중 하나를 남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 감상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긴 방황 끝에 인간 행복의 근본적인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행복과 안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향한 근원적인 갈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갈망에는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인간 본성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행복을 갈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유한한 것으로는 완전히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있어 평생 행복 얻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행복이 존재하는 참된 주소 곧 행복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원하는 것이 잘못일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기독교는 세상의 행복을 부정하고 금욕적인 삶만을 강요하는 종교일까요? 좋은 집을 원하는 것도 잘못이고, 돈을 버는 것도 잘못이며,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가족과 즐겁게 사는 것도 내려놓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반복적으로 선언했음을 알려줍니다. 어거스틴 역시 세상의 좋은 것들, 곧 가족, 건강, 일용할 양식, 아름다운 자연이 모두 하나님의 ‘선한 선물 (Good gifts)’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과 일용할 양식, 건강과 우정, 아름다운 자연과 삶의 기쁨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좋은 선물입니다. 문제는 선물의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사랑의 질서 (Ordo Amoris)’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며 사랑하는 것이 바른 질서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이 사랑의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보다 선물을 더 사랑하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것들을 하나님을 대신할 행복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가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면 내 삶 전체가 무너질 정도로 성공을 최고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근원인 하나님보다 피조물인 선물을 더 사랑하여, 유한한 선물을 ‘최종 행복’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선물이나 행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젊음에는 끝이 있습니다. 건강에도 끝이 있습니다. 성공과 재산도 언젠가는 두고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 땅에서의 만남에도 언젠가는 이별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 연재에서 저는 이러한 행복을 한 가지 이름으로 불러보려고 합니다. ‘시한부 행복’ 나쁜 행복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지만, ‘끝이 있는 유한한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행복할수록 불안해지는 역설 좋은 것을 얻으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정말 소중한 것을 얻고 나면 그 행복 뒤에서 또 하나의 감정이 따라옵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행복하지만 헤어짐이 두렵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여유가 생기지만 잃어버릴까 염려합니다. 건강하면 감사하지만 병이 찾아올까 걱정합니다. 행복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는 그 행복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거스틴의 통찰을 따라가면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이 역설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도록 지음받은 영혼이, 언젠가 사라져 버릴 유한한 것들에 자신의 궁극적인 안식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놓치고 변하고 사라질 피조물에 자신의 최종적인 행복을 걸어버리면, 인간은 그것을 얻어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얻기 전에는 ‘가지지 못해서’ 불안하고, 얻은 뒤에는 ‘잃어버릴까 봐’ 불안합니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행복의 자리에 올려놓는 순간,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지도 못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 우리는 흔히 우스갯소리처럼 말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탕자는 정말 그랬습니다. 행복을 찾아 아버지의 집을 떠났는데, 결국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는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유한한 자유를 선택했던 결과는 지독한 결핍과 방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돼지우리와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잊고 있었던 한 곳을 기억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순간을 짧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 15:17)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습니다. 행복의 근원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살았던 먼 나라의 정체를 파악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시한부 행복의 자리에 머물렀던 그가 이제 행복의 방향을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찾아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사람이 행복의 방향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참된 행복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도 그랬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과 쾌락, 지식과 성공과 종교와 철학 속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안식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더 멀리 가야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야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선물에서 선물을 주신 분에게로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초청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라는 초청입니다. 즉 선물에서 선물을 주신 분에게로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피조물에서 창조주에게로, 유한한 선에서 최고의 선에게로, 무질서한 사랑에서 바른 사랑의 질서로, 먼 나라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는 초청입니다. 다시 말해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행복의 자리를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돌아갈 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리에서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궁극적 만족을 요구하지 않고 돈이나 성공에 최종 기대를 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을 더 자유롭게 사랑하고, 물질을 감사히 사용하며, 성공과 실패를 넘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다른 좋은 것들도 우상이 아니라 선물이 됩니다. 행복의 첫 번째 여정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을까요? 어거스틴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음받았으며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안식과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남습니다. 유한한 것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유한한 것으로 영원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과연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탕자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습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행복의 여정은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찾아오시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받아들이시는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 역시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합니다. 앞으로 열한 번의 여정에서 우리는 바로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돈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사랑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건강도 소중한 행복이라면 왜 그것들은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찾아 헤매는 세상의 행복에는 정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일까요? 다음 칼럼에서는 존 번연과 함께 아래 제목으로 두 번째 여정을 걸어가 보려 합니다.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천로역정』의 순례자가 아름답고 화려한 세상을 지나면서도 계속 천성을 향해 걸어야 했던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한부 행복’의 한계가 비로소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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