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펼쳐든 호세아 세 장은 상처를 깨달은 이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시는 아팠지만, 그 아픔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장에 이르면 가시에 찔린 사람이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발견합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상처가 있는데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치료자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도 구원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그러나 병을 발견했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깨달았다고 곧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 상처를 가지고 누구에게 가느냐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자기 병을 알았고 유다는 자기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가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고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문제를 정확히 발견했지만 치료자를 잘못 찾았습니다. 상처는 보았지만 상처를 고치실 분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먼저 붙들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 전에 사람을 찾고, 은혜를 구하기 전에 자신의 방법을 찾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돈이 조금 더 있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패하면 더 큰 능력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서 완전한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영혼의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에게도 잘못된 앗수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행을 바라보고, 눈물을 바라보며, 회개의 정도를 바라보고,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했는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자기 죄의 치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죄를 바라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의 상처를 계속 들여다본다고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발견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수 있지만 그 병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5장 마지막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들이 더 좋은 앗수르를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강한 왕을 찾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문제가 얼마나 깊은지를 다시 발견합니다. 죄는 단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아닌 것에서 생명과 도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단순히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는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바라보던 눈이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6장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제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앗수르도 아니고 애굽도 아니며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자신들을 만드셨고 떠났던 바로 그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들을 아프게 하신 분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찢으신 손이 동시에 치료하시는 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찢으신 목적이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상처를 싸매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징계 안에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자비의 사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울게 한 사건이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간다면 그 눈물조차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린 실패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면 그 실패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어지는 것을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사라졌는데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진다면 그것이 반드시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고난은 남아 있어도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만 회복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4장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하셨으며 이제 6장에서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세상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많은 정보를 기억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며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단지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알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영생도 결국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모릅니다. 6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조금 전에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아침에 잠시 나타났다가 햇빛이 비치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았습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반드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했다고 반드시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잠시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말씀으로 그들을 치고 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짓을 잘라내기 위해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돌을 다듬는 망치가 돌을 미워하기 때문에 치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부분을 떼어내고 필요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무조건 피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 듣는다면 마음속의 우상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진리가 때로는 우리를 살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7장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매우 흥미로운 모습에 비유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비둘기에게 날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날아갔다가 앗수르로 갑니다. 한 곳에서 도움을 얻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불신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며 새로운 사람을 찾아갑니다. 돈에게 날아갑니다. 사람에게 날아갑니다. 성공과 인정으로 날아갑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다시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심지어 종교 안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에서 저 방법으로, 이 감동에서 저 감동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정작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이 움직이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 7장의 가장 슬픈 말씀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고난도 당했습니다. 상처도 받았습니다. 실패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시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께 돌이키고 가시가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향하게 할 때 그것이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상처를 가지고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에브라임처럼 앗수르를 찾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한 방법에서 다른 방법으로, 하나의 세상적인 도움에서 또 다른 도움으로 날아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앗수르를 찾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 얼굴을 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상처를 감추지 말고 그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께 오십시오. 죄를 발견했다면 자기 자신만 계속 들여다보지 말고 죄인을 고치실 분을 바라보십시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이유도 이것입니다. 가시로 길을 막으셨던 이유도 이것이며 우리를 찢으시고 다시 싸매시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하나님 아닌 것에서 돌려 다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에 이르면 우리는 그 얼굴을 더욱 분명하게 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복음은 상처받은 죄인에게 자기 상처만 바라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회개가 충분한지, 눈물을 충분히 흘렸는지, 선한 일을 충분히 했는지 계속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상처를 보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료자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병을 보았지만 앗수르에게 갔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병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갑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지 마십시오. 우리 영혼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분이 우리를 낫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상처보다 치료자를 바라보십시오.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