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 장의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2장에 이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때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면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형편이 좋아지고 필요한 것이 채워질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2장은 때로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보다 길을 막으시는 것이 더 큰 은혜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곡식도 있었고 새 포도주도 있었으며 기름과 은과 금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주셨는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선물은 보았지만 선물을 주신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얻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받았지만 그 생명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재능은 하나님께 받았지만 그 재능으로 자기 이름을 높이고, 물질은 하나님께 받았지만 그것으로 다른 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이 범한 죄였습니다. 죄의 깊은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선물에는 주목하면서 그 손의 주인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단순히 나쁜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하나님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마음을 하나님 아닌 것으로 채우려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라가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른 존재가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그것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려는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시를 놓고 담을 쌓아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방해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에게는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죄의 길을 편안하게 달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시고, 붙잡으려는 것을 붙잡지 못하게 하시며, 가려는 길을 막으십니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이 길을 막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그 길의 끝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길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열린 문이 반드시 복은 아니며 모든 닫힌 문이 반드시 불행도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더 큰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이라면 가시조차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내가 본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가시가 그녀의 눈을 열었습니다. 얻지 못한 것이 오히려 잊었던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충성했기 때문에 사랑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배신했고 하나님을 잊었으며 다른 것을 따라갔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그를 타일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곧바로 궁전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광야로 데려가십니다. 광야에는 그녀가 의지하던 풍요도 없고 사랑하던 우상도 없으며 마음을 채우던 많은 것들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데려가셨을까요? 하나님 아닌 것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무엇을 더 주심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을 비우심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하십니다. 인간의 몸은 숨과 물과 음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그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영혼을 돈과 성공과 인정과 쾌락으로 채우려 할 때 우리는 더 많이 가지고도 여전히 목마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곳인 동시에 하나님만 남는 곳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작아지고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골은 죄와 심판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기억이 있는 바로 그 장소를 소망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바꾸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문이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심판의 골짜기로 끌고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골짜기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망의 문을 여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심판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바뀝니다.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지 억지로 복종하는 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두려움만으로 섬기는 관계에서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처음에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마지막은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입니다. 호세아 2장은 이렇게 시작과 끝이 연결됩니다. “그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리고,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죄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지만 은혜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죄는 선물만 바라보게 하지만 은혜는 선물을 주신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마음을 채우게 하지만 은혜는 그것들을 비우고 하나님 자신으로 다시 채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호세아 3장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자신을 떠난 여인을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배신당했지만 다시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값을 지불하여 그녀를 다시 데려옵니다.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돌아올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찾아간 것도 아닙니다. 사랑받을 자격을 잃은 사람에게 사랑이 먼저 찾아갔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값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심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말이 아니라 사랑이 지불한 값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멀리서 “돌아오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죄인을 되찾기 위하여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싼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라는 값으로 이루어진 은혜입니다.
호세아 3장의 마지막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합니다. 심판을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향해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무 크고 용서가 너무 놀라우며 배신한 자신을 다시 받아주시는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 앞에 경외함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가볍게 아는 사람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만 은혜의 값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랑 앞에서 떨게 됩니다. 그러나 4장에 이르면 다시 무서운 현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문제는 다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단지 성경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지식입니다. 머리에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가 가득하면서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호세아 4장 17절에 이르면 두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4장에서는 “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이 두 말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가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계획이 무너지고 길이 막히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길을 막으시는 것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실패하게 하시는 것이 사랑일 수 있고, 붙잡고 있던 것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길에서 돌이키시기 위해 세우신 가시라면 그 가시는 버림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표시입니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런 가시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데 모든 일이 잘되고, 죄를 짓는데도 마음이 아프지 않으며,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길을 막지 않으시고 “그를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이야말로 두려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가시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내 길을 막으시는지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그것까지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빈손으로 만들기 위해 광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비우고 하나님 자신으로 채우기 위해 데려가십니다. 광야의 목적은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선물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주신 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것으로 마음을 채울 때 그것을 비우시고, 우리가 다른 길로 달려갈 때 가시로 그 길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광야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배신한 사람에게 다시 사랑을 말씀하셨고 값을 지불하여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을 여시고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불리던 사람을 다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시보다 더 두려운 것은 가시가 없는 것입니다.
길이 막히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막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징계조차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혜의 마지막 목적은 하나입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결국 하나님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