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펼쳐 든 예레미야 24장에서 26장까지의 거룩한 두루마리 속에는, 인간의 유한한 시선으로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포로의 사슬에 묶여 바벨론의 먼 땅으로 끌려간 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예루살렘의 성벽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이 그 광경을 바라본다면, 누가 참으로 복을 받은 자처럼 보이겠습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조상의 집을 잃지 않았고, 성전도 여전히 예루살렘에 서 있었으며, 선조의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서 있습니다. 반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집은 폐허가 되고, 그들의 성전은 먼 추억이 되었으며, 그들의 발은 이방의 흙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의 판단은 인간의 판단과 얼마나 하늘과 땅처럼 다른지요!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가리켜 “좋은 무화과”라 하시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완고한 자들을 “먹을 수조차 없는 나쁜 무화과”라 선언하십니다.
오, 하나님의 저울은 우리의 저울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통을 복이라 부르고 고난을 저주라 부르기 쉽습니다.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기뻐하고, 모든 것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때때로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손길로 찾아옵니다.
우리를 낮추는 그 손이 우리를 버리는 손이라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바벨론의 거친 광야로 보내시는 그 손이,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은혜의 손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눈앞에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펼쳐 보이십니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것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좋은 무화과가 가득하였고, 다른 광주리에는 너무 썩어 먹을 수조차 없는 나쁜 무화과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가리켰습니다.그들이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본래 선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임한 징계의 불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장의 중심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놀라운 약속이 빛납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의 환경을 바꾸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그들의 마음을 바꾸시겠다고 하십니다. 죄인의 가장 깊은 문제는 바벨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어도 마음이 그대로라면, 인간은 또 다른 바벨론을 만들어 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어도 마음이 그대로라면 탐욕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패한 자가 성공해도 마음이 그대로라면 교만의 산은 더욱 높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큰 기적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돌 같은 마음이 자기 힘으로 살처럼 부드러워질 수 없습니다. 죽은 심장이 스스로 뛰기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오, 여기에 은혜의 바다가 출렁입니다!
회개의 첫 발걸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믿음의 첫 숨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발자국 뒤에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죄인은 마지막 날에 이렇게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이 구원의 아름다운 목적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지옥의 불길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다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5장에 들어가면 분위기는 더욱 엄숙해집니다. 예레미야는 무려 이십삼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두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습니다.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러나 백성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계속 듣고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 죄를 지었을 때에는 양심이 천둥처럼 소리칩니다. 두 번째에는 그 소리가 조금 작아집니다. 계속 거역하면 마침내 그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심판이 늦어진다고 심판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이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보십시오!
바벨론이 강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느부갓네살조차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습니다. 제국이 일어나고 무너지는 것도, 왕의 왕관도, 군대의 칼도,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도 하나님의 보좌를 넘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잔을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손에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아 여러 나라가 마시게 합니다. 이 잔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보여 줍니다.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실수라고 부르고, 약점이라고 부르며, 인간적인 일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는 심판받아야 할 반역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이 잔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보다 더 먼 곳을 바라봅니다. 겟세마네의 어두운 동산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레미야 25장에는 열방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이르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그 잔을 받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입술에 조금 대고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온전히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잔을 그분이 받으셨기에,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잔이 주어집니다.
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못 본 척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완전히 만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보여 주는 동시에, 죄인을 얼마나 놀랍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26장에 들어가면 우리는 다시 성전 문 앞에 서 있는 예레미야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오, 모든 설교자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심판을 빼지 마십시오. 시대가 불편해한다고 죄를 빼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떠날까 두렵다고 회개를 빼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은혜도 빼지 마십시오. 십자가도 빼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도 빼지 마십시오. 참된 설교자는 자기 생각을 크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감하지 않고 충실하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왜 이처럼 엄중한 심판을 전하게 하십니까?
백성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의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심판의 경고 속에도 회개의 초청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죄인이 죄 가운데 편안히 죽도록 내버려 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돌이키도록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들은 설교를 듣고 자기 죄를 죽이려 하지 않고, 설교자를 죽이려 합니다. 말씀이 마음을 찌르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마음을 낮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거울 속 얼굴이 더럽게 보인다고 거울을 깨뜨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거울을 깨뜨린다고 얼굴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를 침묵시킨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미가 역시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미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은혜를 구했습니다. 여기에 말씀 앞에서 마음을 굳히는 길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길 두 길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다시 24장의 두 광주리를 바라보십시오.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좋은 무화과가 어떻게 좋은 무화과가 되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고쳤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죄인은 자기 마음을 고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새 마음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교육도 새 마음을 만들지 못합니다. 결심도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을 받으셨고, 성령께서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금 바벨론과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느껴집니까?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낮추고 있습니까?
고난 자체가 구원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조차 헛되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을 흔드심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분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바뀌기를 구하기 전에,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구하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굳히지 마십시오. 심판의 잔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잔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2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십니다. 25장에서는 죄인이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이 나타납니다. 2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말씀도 감하지 말고 회개를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길의 끝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잔을 받으신 그리스도,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그리스도,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 그러므로 오늘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굳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변치 않는 복된 약속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