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펼쳐 든 예레미야 10장에서 12장까지의 말씀은, 거짓 신들의 차가운 무덤 한복판에서 홀로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인간은 제 손으로 신을 깎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떨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인간을 빚으시고 그의 생명과 호흡과 모든 발걸음을 친히 주장하십니다.
우상은 사람의 손에 들려 겨우 옮겨지지만, 만군의 여호와는 천지를 손가락으로 움직이십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우리를 우상을 빚는 그 기이하고도 비참한 작업장으로 인도합니다.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 한 그루를 베어 옵니다. 장인의 손길이 그것을 깎고 다듬으며, 은과 금으로 화려하게 입힙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못과 장도리로 단단히 박아 고정합니다. 그리고는 제 손으로 만든 그 죽은 것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처절한 광경입니까!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가 지은 신을 섬깁니다. 자신을 붙들어 주어야 할 신을, 오히려 사람이 못으로 붙들어 놓습니다.
사람이 메어 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는 것을 향하여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선지자는 단호히 선언합니다.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옛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어서는 안 됩니다.
현대인은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을 버렸을지 모르나, 마음속 깊은 곳에 더욱 정교하고 교활한 우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돈을 향하여 “나를 안전하게 지켜 다오”라고 속삭입니다. 성공을 향하여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다오”라고 간청합니다. 권력을 향하여 “나를 높이 올려 다오”라고 외칩니다.
사람을 향하여 “나를 행복하게 해 다오”라고 애원합니다. 건강을 향하여 “나를 오래 살게 해 다오”라고 매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인생의 보좌에 앉히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다!” 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 세워진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서운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반드시 그 앞에서 향을 피우는 돌 조각상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차지하셔야 할 그 거룩한 자리에 앉아, 우리의 사랑과 신뢰와 소망을 가로채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손에 들고 있는 우상이 아니라, 마음의 보좌에 앉아 있는 그 우상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죽은 우상들의 행렬 한복판에서 갑자기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보십시오. 여기에 성경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사람이 지켜 주어야 하는 신이 아니라, 만물을 그 능력의 말씀으로 붙드시는 하나님!
시대가 바뀌면 사라져 버리는 신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우상들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태어나 인간과 함께 흙으로 돌아가지만, 여호와께서는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십니다. “그가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성도 여러분, 당신이 오늘 아침 눈을 뜬 것도 그분의 은혜입니다. 심장이 지금 이 순간에도 뛰고 있는 것도 그분의 허락입니다. 우리가 딛고 선 땅과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과 숨 쉬는 공기까지,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께 감히 말합니다. “나는 당신 없이 살겠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는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의 목록이 아닙니다. 죄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반역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모든 죄의 깊은 뿌리를 파고 내려가면, 결국 우상숭배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신뢰하며,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10장의 후반부에서 선지자는 놀라운 고백을 토해 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오, 인간의 교만을 산산이 부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계획하고, 십 년 뒤를 설계하며, 미래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심장 박동조차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의 배에 올라타 키를 붙잡고 “내가 선장이다!”라고 외치지만, 바람을 명령할 수도 없고 파도를 멈출 수도 없으며, 내일 아침 바다가 어떤 모습일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주님, 나의 길은 내게 있지 않습니다. 나의 걸음을 친히 인도하여 주옵소서.” 11장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유다의 죄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이 언약의 말을 듣고 행하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으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참함이 있습니다. 죄인은 빛이 없어서만 길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 앞에 굴복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성경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받는 것과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을 거역합니까! 귀에는 복음이 들어가지만 마음에는 닿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수백 번 듣고도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은혜를 노래하면서도 은혜의 왕께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지식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 완악한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세우셨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이 회개하기는커녕 선지자를 죽이려 합니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그들이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돗 사람들, 곧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진리는 언제나 환영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하는 종교는 좋아하지만, 자신의 우상을 깨뜨리는 진리는 미워합니다.
상처를 덮어 주는 설교는 환영하지만, 죄를 드러내는 말씀은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 진리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청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박수를 보내든지 등을 돌리든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2장에 들어가면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만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아마 우리도 이 질문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악인은 잘됩니까?” “왜 거짓된 사람은 성공합니까?” “왜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평안한데, 하나님을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찾아옵니까?” 예레미야도 이 문제 앞에서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이 얼마나 엄숙하고 무서운 말씀입니까! 예레미야는 지금 자신이 감당하는 고난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지금 사람이 뛰는 속도에도 지쳤다면, 앞으로 말들과 어떻게 경주하겠느냐?”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고난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고난에서 꺼내시는 대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파도를 없애시는 대신 더 깊은 믿음을 주십니다. 전쟁을 끝내시는 대신 전쟁터에서 견딜 갑옷을 입히십니다. 보행자를 치우시는 대신 말과 달릴 힘을 주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더 깊은 믿음으로 훈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이것만 외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말과 경주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죄를 이길 힘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서 힘을 찾지 않고 그리스도께로 갑니다. 당신의 다리를 바라보지 말고, 당신과 함께 달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를 바라보지 말고,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강하신지를 바라보십시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발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고난을 견디라고 명령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먼저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으셨고, 자기 백성에게 배척받으셨으며, 친구에게 배신당하셨고, 거짓 증인들에게 고발당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가장 큰 우상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랑을 끝냅니다. 인간의 모든 공로 위에 사망 선고를 내리고, 오직 한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 세웁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우상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