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펴든 이사야서의 세 장은 죄의 장벽을 베어 내는 거룩한 단도(短刀)와도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부패와 위선, 그리고 가증한 우상숭배를 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수치스러운 죄악의 높은 성벽을 단번에 부수고 내려오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팔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 줍니다.
이 거룩한 복음의 정수를 단 한 문장으로 만든다면 이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득한 절벽을 만들었으나, 그분의 구원의 팔은 결코 짧아지지 않았도다.” 이사야 57장의 문을 열면, 우리는 먼저 기이하고도 서글픈 풍경 하나를 목도하게 됩니다. 의인이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경건한 자들이 하나둘 세상에서 거두어집니다.
그러나 이 가련하고 눈먼 세상은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거대한 권력자나 부유한 자의 몰락에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아우성을 치지만, 하나님의 조용한 성도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거룩한 순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보좌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눈길은 다릅니다.
세상은 그것을 비극이라 부르지만, 하늘의 눈에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안전한 포구로 들어가는 귀향(歸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죽음은 결코 어두운 소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입니다! 이 땅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쉬는 순간, 성도는 지친 몸을 내던지고 영원한 평안에 편히 눕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진 백성은 미친 듯이 우상을 향해 달려갑니다. 높고 푸른 산 위에서, 어두운 골짜기의 바위 틈에서,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온갖 거짓 신들을 향해 입을 맞춥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요, 타락한 인간의 추악한 초상입니다! 죄는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가증한 영적 간음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찍어내는 ‘악마의 공장’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은 조잡한 돌과 나무로 우상을 깎았으나, 문명화된 현대인들은 더욱 매끄럽고 세련된 우상을 금빛으로 칠해 세워둡니다. 돈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성공이라는 신전에서 절을 하며, 자녀와 건강을 신으로 삼고, 마침내 ‘자신’이라는 가장 드높은 우상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그 신들을 향해 애걸합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다오. 나를 이 어둠에서 구원해 다오. 나를 높여 다오.” 오, 불쌍한 영혼들이여! 우상은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당신을 버릴 것입니다. 무너지는 태산 아래에서 당신을 짓눌러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이사야 57장의 가장 찬란한 은혜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오, 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복음의 음성입니까!
피조물의 미천한 이성으로 생각하기에, 저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별빛 너머의 드높은 보좌에만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천사들이 감히 그 얼굴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노래하며, 그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온 우주가 떨리는 그 존귀하신 분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거처가 어디라고 말씀하십니까?
높고 거룩한 하늘 보좌, 그리고 또 하나는 통회하고 상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드높은 영광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상한 심령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으셨습니다. 교만한 자는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그분의 옷자락조차 만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낡은 누더기 같은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은 결코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치고, “오 하나님, 나는 전적으로 무능한 자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주의 긍휼뿐입니다!”하고 울부짖는 자에게, 하늘의 왕께서 친히 걸어 내려오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그릇을 버리지 않으시고, 깨어진 마음을 자신의 궁전으로 삼으십니다. 그분은 선언하십니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리라.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진노가 가벼워서이겠습니까? 죄가 사소해서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분의 자비가 진노의 바다보다 더 크고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태양은 저 칼바리 언덕,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가장 찬란하게 방사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벼락과 심판을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대신 맞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멀리 있는 자에게나 가까이 있는 자에게나, 깊은 죄악에 빠졌던 자에게나 이제 막 도망쳐 나온 자에게나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너를 고치리라.” 하고 음성을 높이십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잠잠할 수 없나니”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비단옷을 걸치고 웃고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는 거친 파도와 검은 흙탕물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금은보화로도, 어떤 기쁨과 쾌락으로도 그 영혼의 폭풍을 잠재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영혼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환상에 불과합니다. 참된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의 피로 회복될 때 영혼 깊은 곳에서 샘솟습니다.
이제 이사야 58장으로 걸음을 옮기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종교라는 이름 뒤에 숨은 가장 음흉한 무기, 즉 ‘위선(Hypocrisy)’을 향해 단칼을 휘두르십니다. 백성들은 금식했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거룩함의 모범이요, 경건의 거인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코를 막으시고 외면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금식의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면서도 뒤으로는 일꾼들의 임금을 떼어먹고 압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이웃을 향해서는 불의의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 여러분, 종교적 형식과 의식 자체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금식의 횟수가 여러분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지 못합니다. 입술의 기도가 여러분을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교회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여러분의 죄를 자동으로 씻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영혼이 없는 종교적 껍데기가 아닙니다. 은혜로 변화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사랑과 공의의 폭포수입니다!
참된 경건은 성전 문을 나설 때 비로소 증명됩니다. 나무에 생명이 흐르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듯, 그리스도의 생명이 유입된 영혼은 정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창문을 열어 약속하십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터져 나올 것이요, 네 치유가 햇살처럼 급속히 번져 갈 것이라.
너는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서도 물 댄 동산 같겠고, 결코 물이 끊이지 않는 영원한 샘이 되리라! 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보장입니까! 세상 전체가 가뭄으로 타들어 가고 바짝 말라버릴지라도, 만군의 여호와를 우물로 삼은 성도의 영혼은 사시사철 푸르른 ‘물 댄 동산’이 될 것입니다! 환경에서 수분을 흡수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 생명수를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9장에 이르면, 인간의 부패함은 깊디깊은 절망의 늪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한복판에서 영원히 빛나는 복음의 대선언이 울려 퍼집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 똑똑히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구원의 기쁨이 없고 기도가 하늘을 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쇠하여 손이 짧아졌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편에 있습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죄, 그 은밀하고 달콤하게 핥고 있는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먹구름이 되었고, 두터운 청동 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비극을 가난 탓으로, 시대 탓으로, 타인 탓으로 돌리려 애씁니다. 그러나 성경의 검은 손가락은 정확히 우리의 심장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문제의 뿌리는 바로 너의 죄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에 빠진 인간의 처참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더듬으며”
빛이 찬란히 부서지는 대낮에도 영혼의 눈이 멀어 어둠 속을 헤매는 가련한 소경!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실상입니다. 길을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곁에 계신 구원자를 두고도 제 손으로 허망한 사다리를 쌓으려 몸부림치는 자들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거룩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굽어살펴보셨습니다.
죄인의 죄를 담당하고 중재할 의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셨습니다. 그러나 천사도, 율법도, 선지자도, 그 어떤 거룩한 성자도 인간의 죄악을 씻을 수 없었습니다.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오, 이 거룩한 신비를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겼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사람이 없을 때, 하나님은 친히 자신의 팔을 내밀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땅에서 하늘로 기어 올라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잿더미 속으로 친히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왕께서 친히 도망친 죄인을 찾아 숲속을 헤매신 사랑의 추적기입니다! 그 친히 펴신 ‘하나님의 구원의 팔’이 누구이십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의 오른팔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거룩하신 인자께서 죄인의 더러운 누더기를 입으셨습니다.
그 강하신 팔이 십자가 나무 위에 뻗어지셨으니, 못 박힌 그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모든 죄를 씻었습니다! 보십시오. 갈보리 언덕에 높이 들린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왜 그분의 두 손이 무자비한 못에 박혀 찢어져야 했습니까? 그 손이 약해서 묶이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멀리 도망친 죄인에게까지 그 구원의 팔이 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죄악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당신을 건져내기 위해, 그분의 팔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길게, 그리고 넓게 펼쳐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죄가 밤하늘보다 더 캄캄합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의 팔은 그 어둠보다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십니다. 더 이상 스스로 고친 후에 하나님께 나오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병자가 병을 스스로 고치고 의사에게 가겠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찢긴 심령 그대로 나오십시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으며 나오십시오. 높고 거룩하신 분께서 바로 그 통회하는 심령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침묵한 것이 아니라 만족되었고, 하나님의 자비가 막힌 것이 아니라 활짝 열렸습니다.
선지자의 위대한 약속을 들으십시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구속자가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셨고, 우리가 그분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기 팔로 친히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그 팔을 붙드십시오. 아니, 당신을 붙들기 위해 펼쳐진 그리스도의 팔에 당신의 온 영혼을 맡기십시오. 여호와의 손은 지금도 짧지 않습니다. 그 팔은 오늘도 죄인을 구원합니다. 그 팔은 넘어지는 성도를 붙듭니다. 그 팔은 죽음의 강을 건너 영원한 시온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