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래스고 투어
1) 글래스고
① 스코틀랜드의 수도는 에딘버러(인구 약 50만)이지만 가장 인구가 많고 큰 도시는 글라스고입니다(인구 약 60만). 영국에서 런던, 버밍엄 다음으로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글래스고 부근 광역권에는 18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 인구의 약 33%에 해당됩니다.
② 6세기 경 글래스고의 성인인 St Mungo에 의해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세워진 이후 도시로 발전하였고, 본격적인 대도시로의 발전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합병된 1707년 이후입니다. 대도시로 발전한 역사가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와 통합한 18세기 이후인지라 중세 스코틀랜드의 흔적은 글래스고 대성당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③ 18세기에 미국과 담배, 설탕, 럼 등을 매매하여 세계적인 무역 항이 되었으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황태자의 반란군에게 점령되어 도시가 망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도와 목화 무역을 하면서 면직물 등의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고, 미국과의 무역 또한 되살아나 다시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항구로도 유명했지만 중세시대에는 시계 공업이나 정밀 기계 공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④ 19세기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매장되어 있던 철광석과 석탄을 바탕으로 제철업, 조선업 등이 발전하였고, 1863년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런던에 세워진 후 1896년 영국에서는 두번째, 세계에서는 1875년의 이스탄불 지하철에 이어 3번째로 지하철이 개통되었습니다.
⑤ 1451년 개교하여 영어권 국가들에서는 4번째로서 세계적인 역사를 자랑하는 ‘글래스고 대학교’가 있으며,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텔레비젼 발명가 존 로지 베어드 등을 포함하여 7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3명의 영국 총리가 주요 동문입니다.
⑥ 산업혁명을 따라서 발전한 대도시이다 보니 노동계급 위주의 거친 문화가 형성되어 있고,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을 정점으로 셀틱스와 레인저스의 축구 훌리건 문제 등으로 한때 영국의 폭력 도시 1위라는 악명을 쓴 적이 있습니다.
⑦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전반적인 음울한 스코틀랜드의 날씨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역시 노동계급적인 정직한 인심으로 영국에서 가장 친절한 도시이자 영국 특유의 계급주의적 편견 및 차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이란 명성을 자부하는 도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⑧ 현재는 스코틀랜드 최대 항구 도시이자 쇼핑의 도시(쇼핑 거리는 아가일 스트릿)로 스코틀랜드의 유행이 시작되는 곳이자 현지인들이 물가가 싸서 쇼핑하러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도시 중심에 흐르는 클라이드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스코틀랜드의 경제 중심지라는 말이 실감나죠. 특히, 가우디와 함께 세계적 건축가 매킨토시의 고향으로 그의 건축물들이 많아 건축도들의 성지라고 불립니다.
2) 글래스고 대성당
① 글래스고 대성당은 글래스고의 성인인 Saint Mungo가 6세기에 처음 세웠다가 1238년에 현재 모습의 성당으로 지어진 것으로 13세기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곳입니다. 글래스고의 수호성인이자 성당을 처음 세운 Saint Mungo의 이름을 따 Saint Mungo 성당 이라고도 불립니다.
② 이 성당이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때 일시적으로 장로교 교리를 채택해, 파괴를 면했던 덕분입니다. 글래스고 대성당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중세 카톨릭 성당중에서 종교개혁 당시에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당입니다. 현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교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③ 전설에 의하면 6세기에 세인트 뭉고는 두 마리 들개가 이끄는 수레에 성인인 퍼거스의 시신을 싣고 개에게 ‘신이 정하신 곳으로 가라’고 말했는데 개들이 현재의 글래스고 대성당 부지로 끌고 왔다고 합니다. 아래층에는 세인트 뭉고의 납골당이 있습니다. 성당 뒷편에 위치한 글래스고 네크로폴리스에는 글라스고의 역대 지도자와 유명 인사들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3) 네크로 폴리스
① 네크로폴리스는 원래 그리스에서 대규모 묘지를 뜻하는 단어로, 직역하자면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1832년에 만들어진 이 빅토리안 양식의 묘지에는 대략 5만명의 사람들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묘비가 없는 채로 묻혀져 있고 묘비가 세워져 있는 사람들은 대략 3500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② 네크로폴리스가 조성된 언덕위에 세워진 탑은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종교 개혁가인 존 녹스의 기념탑입니다. 존 녹스의 무덤은 글라스고가 아닌 에딘버러에 묻혀져 있습니다.
재밌게도 네크로폴리스에 묻힌 5만명의 사람들의 인적사항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기록되서 Mitchell Library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Mitchell 도서관에 가면 이곳에 묻힌 모든 사람들의 이름, 생년월일, 사인, 직업 등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③ 글래스고 네크로폴리스는 또한 종교적인 다양성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네크로폴리스가 만들어진 19세기 초만해도 영국에서는 사자를 묻는 것은 교회의 특권이었고 교회 근처 묘지에 묻힐 수 있는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한정 되었습니다. 자살을 한 사람이나, 이교도들은 교회 묘지에 묻힐수 없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막강한 위세와 힘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묻히고 싶으면 교회 말을 잘 들어야 했으니깐요. 하지만 갈수록 묻혀야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교회 묘지는 부족해져가자 영국에서 공동묘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생겼는데 글래스고 네크로폴리스는 그렇게 해서 영국에 생긴 최초의 계획 묘지 중의 하나입니다.
④ 이 묘지 아래에는 카톨릭 신자들, 개신교 신자들, 유대인들, 루터교 신자들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묻혀있습니다. 또한 네크로폴리스는 원래 지금처럼 개방된 형식의 공동묘지가 아닌 언덕 아래로 긴 굴을 파서 카타콤베 형식으로 사람들을 묻는 형식이였는데 그 당시에는 시체 도굴꾼들이 밤에 몰래와서 갓 묻힌 시신들을 파내 해부용으로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체도굴행위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법안이 1832년에 통과되자 더 이상 시체 도굴을 염려하지 않게 되었고 오늘날의 모습으로 네크로폴리스가 세워지게 됩니다.
4) 켈빈그로브 박물관 및 미술관
① 1854년 글라스고 장인인 아키볼드 맥렌란이 글라스고 시에 개인 소장하고 있던 그림 400 점을 기증하면서 시작 되었습니다. 기증받은 400 점의 그림들을 토대로 나머지 콜렉션들이 순수하게 주민들의 기부로 마련되었습니다. 중앙홀에 기부자의 이름이 기록된 이 박물관 및 미술관은 1901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관했습니다.
② 자그마치 20가지 테마로 구성된 갤러리에 전시된 8,000점의 예술품과 공예품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관광 명소 입니다. 3개 층에 걸쳐 22개의 갤러리를 갖춘 이 미술관 및 박물관에는 유럽 예술, 도자기, 은, 자연사, 스포츠 관련 전시물과 조각으로 구성된 귀중한 콜렉션이 있습니다.
③ 1층에 있는 라이프 갤러리에서 여러 박제된 동물들을 구경할수 있습니다. 1902년에 인도에서 가져온 코끼리 박제 상 로저 경을 만나 보실수 있습니다. 천장에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④ 라이프 갤러리를 보시고 난 후에는 1층 반대편에 있는 Expression 즉 표정 갤러리를 구경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모든 표정을 표현한 구조물이 천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pression 갤러리를 둘러보시고 계단을 올라가면 French Art 갤러리가 바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모네, 고흐, 밀레, 피카소 등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⑤ 2층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에 달린 성 요한의 예수와 산드로 보티첼리의 수태고지가 있습니다. 캐냈을 때 처음에는 부드러워 깎아내기 좋으면서도 철분이 함유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는 스코틀랜드의 전형적인 건축재료인 사암의 붉은색 벽돌이 인상적인 외부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것이 좋습니다.
5) 글래스고 대학
① 글라스고 대학교는 에딘버러 대학교, 세인트 앤드류즈 대학교, 애버딘 대학교와 더불어 전통적인 스코틀랜드의 명문 대학중 하나입니다. 1451년에 설립되어 영국에서는 옥스포드 대학교, 캠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앤드류즈 대학교 다음으로 4번째로 오래 된 대학교이며 스코틀랜드에서는 두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입니다.
② 1451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2세는 당시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등 2개의 대학을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도 2개의 대학을 갖길 원했으며, 교황 니콜라스 5세에게 글라스고의 윌리엄 턴불 추기경이 대학을 설립하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에 처음으로 세인트 앤드류즈 대학이 개교한지 40년 후인 1451년에 글래스고 대학이 설립되게 됩니다. 개교 당시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을 모델로 삼았으며, 초창기부터 당시 중세유럽 지성의 핵심이었던 도미니크 수도사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③ 근대화 이전에는 부유한 학생들만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19세기부터 중산층 학생의 입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백인 학생들이 90% 정도나 될 정도로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약대와 뇌과학 분야에서는 영국 1위이며, 우주공학과는 스코틀랜드에서 유일하게 제공되고 있으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애덤 스미스 비즈니스 스쿨은 스코틀랜드에서 최대, 영국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큽니다.
④ 글래스고 대학교는 세계 대학 1%안에 드는 세계 명문 대학으로 세계 대학순위에서 59위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 7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3명의 총리를 배출해냈으며 대표적인 졸업생으로는 국부론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1925년 텔레비전과 광섬유, 적외선 야간 투시경 등을 발명한 존 베어드가 있습니다. 또한,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33년 직접 강의를 하고 명예학 박사를 수여받은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석학들의 요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⑤ 한국인으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 친척이자 이복 형인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인 윤치호의 영향으로 1919년에 글래스고 대학 의학부에 합격하여 졸업 후 한국 최초의 남자 산부인과 의사이자 1947년 조선산부인과학회 초대회장이자 세브란스병원장이 된 윤치왕 박사가 있습니다. 윤치왕 박사는 한국 현대의학의 선구자이자 산부인과 개척자로서, 산부인과는 물론 마취과와 신경외과 등에서 많은 공헌을 하여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에 제3호 헌정자로 추대되었습니다.
6) 리버사이드 박물관
① 정형적인 형태의 기존 건축 방식을 해체하고 건축의 미를 추구한 건축가들이 해체주의인데, 해체주의의 대표적인 건축가가 유명 여류 건축가 자하 하디드입니다. 그녀의 설계는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가져다 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건축된 건물은 많지 않습니다. 모양이 너무 특이하여 불안한 나머지 건축주들이 꺼리기 때문입니다.
② 한국의 해체주의 건물은 대표적으로 삼성동 사거리의 현대산업개발건물과 종로의 랜드마크인 종로타워가 있는데, 종로타워가 완공된 후에도 시민들이 지나다니면서 ‘야, 이 건물이 다 지어지면 정말 멋지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③ 자하 하디드가 설계하여 건축한 한국 내 건물로는 동대문디자인프라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최초로 공공건물 설계 공모에 당첨되어 무려 1,300억을 들여 2011년 완공한 건물이 리버사이드 박물관입니다.
④ 리버사이드 박물관은 교통 박물관으로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발명한 나라답게 산업혁명 이후 세계 최대의 자전거와 자동차, 그리고 기차 회사들을 보유했기에 자신들이 만든 교통 관련품들을 전시한 것입니다. 영국은 2차 산업혁명을 거쳐 3차,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즉, 생명공학 분야에서 세계 최초의 복제양 돌리가 있고, IT 분야에서 전 세계 모든 사이트가 이용하는 www(월드와이드웹)을 발명했으며,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세계 최초의 AI 알파고를 발명했습니다.
7) 조지 스퀘어
– 글래스고 시청 앞 중앙 광장으로 가운데 중심에 높게 솟아 있는 동상은 작가 월터 스콧이고, 그 앞 좌우로 시인인 로버트 번즈와 여러 장군들, 그리고 제임스 와트가 있으며, 좌측으로는 빅토리아여왕과 그 남편 알버트 및 위쪽 양면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총리들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웰링턴 장군의 조각상에는 주차금지 곶깔이 씌워져 있는데, 이는 술취한 한 글래스고 시민이 왜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사람 동상을 세웠냐면서 밤에 꽂아놓은 것입니다. 광장 인근에 글래스고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쇼핑가가 있으니 그곳에서 자유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하이랜드 투어
1) 스코틀랜드
①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국토가 대부분 거칠고 야생적인 것처럼 성격도 강인한데, 그들만의 확고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국토의 자연을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여 스코틀랜드 북부 지방인 하이랜드와 스카이섬을 가면 자연이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② 그래서 스코틀랜드 양고기, 소고기, 사슴고가, 송어, 연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스코틀랜드의 명물을 얘기할 때 스캇치 위스키 또한 빼먹을 수 없습니다.
③ 스코틀랜드에는 우리나라 아리랑과 비슷한 단조풍의 구슬픈 멜로디로 된 민요들이 많습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몽골 등 수많은 침략을 당한 우리나라와 비슷한 한이 많이 맺혔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민요 중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곡은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과 애니 로리(Annie Laurie),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석별의 정’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올드랭사인이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올드랭사인은 1788년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가 어떤 노인이 부르던 노래를 시로 표현했는데, 그 시가 가사가 되어 작곡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전 세계적으로 이별할 때나 졸업식 등에서 가장 많이 불리고 있으며, 다시 만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축가로도 쓰이고, 영화 애수의 주제곡으로도 쓰여졌습니다.
④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비슷해서인지 1900년경에 애국가를 올드랭사인 곡조를 따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07년 즈음, 조국애를 북돋우기 위해 완성된 애국가의 가사를 올드랭사인의 곡조에 붙어져 널리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1919년 3·1 운동 때도 올드랭사인의 멜로디를 당시 국민들이 라디오로 들르며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고 합니다. 후에 안익태가 애국가를 외국의 이별 노래 곡조에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35년 현재의 애국가 곡을 작곡하였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령에 따라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의 멜로디를 공식 사용하면서 올드랭사인의 애국가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초창기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였으니 우리나라와 스코틀랜드의 관계가 멀지만은 않았던 것입니다.
⑤ 또한, 한국어 성경을 처음 번역한 분이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였고,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녹스로 인해 시작된 장로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단이며, 1910년 에딘버러의 세계선교대회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리기도 했으니 스코틀랜드와 우리나라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1) 러스 마을
– Luss는 Loch Lomond의 서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두운 마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면 Luss마을은 산으로 되어 있어서 산의 그늘 때문에 낮 시간이 적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러스 마을은 많은 부분이 18세기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슬레이트를 생산하는 한 기업의 대표가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마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러스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시골의 목가적인 주택과 아기자기한 정원을 볼 수 있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종종 선정되기도 합니다. 특히, 결혼 장소로 Luss 마을을 방문하는 곳이고 수많은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2) 로몬드 호수
– 로몬드 호수는 영국에서 가장 큰 호수로 산악지대인 하이랜드와 평야지대인 로우랜드를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나 북쪽은 좁고 넓으며 많은 섬들이 있습니다. 여의도의 9배되는 면적에 평균 수심 37m에 최대수심 204m되는 호수입니다. 또한 영국에서 서식하는 식물 종의 4분의 1이상이 서식하여 식물의 천국으로 불리어지기도 합니다. 이 호수의 길이는 36km의 네스호보다 2km가 더 긴데 글렌코까지 가는 도로가 호수가를 따라 있기에 마음껏 호수를 보실 수 있습니다. 로몬드 호수는 ‘스코틀랜드 호수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을 정도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호수인데, 이 아름다운 호수에도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1745년 7월, 스코틀랜드 왕정을 지지하는 이른바 제코바이트(Jacobite)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잉글랜드에 통치권을 빼았긴 그들은 그 동안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었던 제임스 2세의 손자 찰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로몬드 호수 가까이 살던 어느 한 병사도 이 반란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병력이나 화기에 열세이었던 제코바이트 반란군은 잉글랜드 군에게 여지없이 참패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이 병사도 포함되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포로를 관대히 처분하지 않아 대부분의 포로를 잔인하게 처형했습니다. 이 병사 역시 내일이면 처형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사랑하는 고향의 연인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읊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쪽의 아름다운 기슭들과 저쪽의 아름다운 산비탈을 따라 어디서나 태양은 로몬드 호수 위를 눈부시게 비추네. 나와 나의 진실한 사랑이 수많은 행복한 날들을 보낸 곳이라네. 로몬드호수의 아름다운 기슭들은 그런 곳이지. 당신은 높은 길로, 나는 낮은 길로 가리라. 그래서 우린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에서 죽어서도 만날 수 없으리라.”
이는 당신은 이승에 나는 저승에 있으니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들로 인한 슬픔들을, 스코틀랜드인들은 노래로 달랬습니다.
3) 글렌코
–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하이랜드의 진수인 글렌코가 시작됩니다. 이 글렌코는 영국의 알프스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을 소개하는 책자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소개하여 태초의 지구 모습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산악이 많은 스코틀랜드에는 잉글랜드와 달리 글렌이란 말이 유난히 많이 사용하는데, 글렌이란 말은 겔릭어로 협곡, 계곡이란 뜻입니다. ‘통곡의 계곡’으로 알려진 글렌코는 계곡을 따라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와 비가 오면 바위산에 파인 골을 따라 내리는 모습이 통곡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하며, 특히 통곡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1692년 맥도날드 가문이 영국 정부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 곳이 바로 글렌코입니다. 잠깐 글렌코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 해보자면, 1692년 명예혁명 당시 윌리엄 공이 제임스 2세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합니다. 그때 당시 수많은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은 제임스 2세를 지지하고 있었는데요. 새롭게 왕이 된 윌리엄은 충성맹세가 담긴 서한을 각 부족에게 보냅니다. 이 시절 글렌코 지방엔 맥도날드 부족이 살고 있었는데 워낙 글렌코가 험한 지대라서 서한이 늦게 도착하여 맥도날드 부족의 충성 맹세 전갈은 그보다 6일 늦게 도착하게 됩니다. 이에 윌리엄 왕은 맥도날드 부족이 충성 맹세를 거부한 걸로 받아들여 모든 부족들에게 맥도날드 부족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다른 부족들은 맥도날드 부족의 영토인 글렌코로 오게 되었고 맥도날드 부족은 손님이 왔다하여 축제를 벌여 환영을 해줬는데 축제의 마지막 날 모두가 잠든 시간에 다른 부족들이 맥도날드 부족의 모든 사람들을 왕의 명령에 따라 처참히 학살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글렌코는 웅장하고 인상적인 자연경관으로 도보 여행과 등산을 위한 명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주로 등장하는 산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래 전 화산이 있었던 곳으로 주로 바위산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앞으로 더 들어가면 툰드라 지역이라 나무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뷰 포인트가 많이 있으니 자주 들러 기념 촬영을 많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4) 007 스카이폴 촬영지
– 여기서부터는 007영화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으로 만들어진 스카이폴 영화 촬영 장소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 달리는 이 도로 위로 007이 상관인 M과 함께 자가용을 몰고 가는 장면을 위에서부터 앞에 보이는 산악 지대까지 촬영했습니다. 왼쪽은 스키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호텔이 있는데, 이곳에는 트래킹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닙니다. 군데 군데 도로에 세워져 있는 빈 차들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차를 세워놓고 트래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곳은 영국에서 촬영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산악 지형 중 하나입니다. 지난 2004년 가을에는 한 노인분이 가족들과 같이 이곳을 다녀온 후 한국의 아들에게 전화하면서 내가 달나라에 갔다 온 것 같다고 관광 소감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곳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특히 007의 제임스 본드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영화에서 이야기합니다.
5) 쓰리 시스터즈
– 앞쪽 왼쪽에 보이는 3개의 봉오리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중 하나로 지정된 쓰리 시스터즈라는 곳입니다. 100미터나 되는 거대한 바위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이곳은 야생 사슴도 자주 다닙니다. 이 협곡에는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이 주변은 빙하 시대에 빙하가 지나가면서 형성된 U자 계곡으로서 길이가 16킬로미터에 달합니다. 특히, 해리포터 등 여러 영화들이 자주 촬영되어 한번씩 촬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6) 가장 아름다운 뷰 포인트
– 다음에 방문하는 곳은 글렌코에서 마지막으로 들리는 곳으로, 이곳에는 산과 호수가 있고, 계곡과 폭포가 있으며, 다리와 시내가 있고, 양과 평원이 있으며, 또한 아름다운 집이 있는 곳으로 저희 의견에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추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 주차장 주위에는 스코틀랜드 야생화인 분홍색 꽃 디기탈리스 (Digitalis purpurea)가 많이 피어 있는데, 이 꽃은 심장병에 좋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심장꽃으로도 불립니다. 이곳에 방문하여 기념 사진을 찍은 후 마지막으로 글렌코 비지트 센터에 들려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3. 에딘버러 투어
1) 에딘버러
– 2015년 영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선정된 인구 50여만명, 주변 인구까지 합하면 130여만명 되는 스코틀랜드의 수도입니다. 또한, 유네스코 선정 세계 최초의 문학 도시이자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도시입니다. 문학 도시답게 작가들을 우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작가 기념탑과 박물관이 있습니다. 유명 작가들로는 아이반호 작가 월터 스콧, 지킬 앤 하이드의 로버트 스티븐슨, 셜록 홈즈의 코난 도일, 해리포터의 조앤 롤링이 있습니다. 또한, 지난 300년간 금융업이 융성했던 도시로, 현재 영국 제2의 금융업 거점이며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가는 제2의 경제 도시입니다. 시의 인구 43%가 대학 졸업자 이상인 고학력인 점도 인재 경쟁에서 앞서나가고 있고, 매년 세계 최대의 축제인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며 한해 1,600여만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관광도시입니다. 도시는 올드 타운과 뉴 타운으로 구분하고 올드 타운의 중심은 로열마일이고, 뉴 타운의 중심은 프린세스 스트릿입니다.
2) 칼튼힐
–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칼튼힐입니다. 높이는 110m로서 한쪽으로는 리스 항구와 바다가 보이며 다른 쪽으로는 홀리루드 궁전이 보이는 아름다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에든버러 대표 명소입니다. 특히 이 언덕 위에서 에딘버러의 신시가지인 뉴타운과 구 시가지인 올드타운의 극명한 차이를 느낄수 있습니다. 언덕 위에는 마치 그리스에 있을법한 신전 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모방하여 만든 기념물입니다. 이 기념물로 인해 에딘버러가 ‘중세의 아테네’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튼힐에 높게 세워진 탑은 넬슨 제독 기념탑으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과 맞서 싸워 승리한 넬슨 제독의 기념탑입니다. 특히, 칼튼힐의 대표적인 사진들에서 도시 전경과 함께 왼쪽에 등장하는 원형의 기념비는 데이비드 흄과 함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두갈드 스튜어트의 기념비입니다.
3) 로열마일
– 로열마일은 올드 타운의 중심 거리로 맨 아래의 홀리루드 궁전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부터 가장 위쪽의 에든버러 성까지 1마일 길이의 거리입니다. 길을 따라 오래된 에든버러의 건물들을 볼 수 있고 또 레스토랑 및 상점이 밀집되어 있어 에든버러의 상징과 같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때 왕과 귀족들만 걸어다닐 수 있었다고 하여 로열마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민들은 로열마일 사이의 클로즈라는 작은 골목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4) 성 자일스 성당
– 864년부터 지어진 이 성당은 스코틀랜드 종교계의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일으켰던 종교개혁이 유럽에서는 대부분 실패했는데,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빈의 제자였던 존 녹스가 세인트앤드류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켜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구세군 등 대부분의 개신교파가 영국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존 녹스의 생가와 무덤이 에딘버러에 있는데, 그가 시무했던 곳이 이 성 자일스 성당입니다. 성당의 현재 건물은 1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성당은 그 이후 수많은 전쟁과 민족 분쟁,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대변되는 에든버러와 스코틀랜드 역사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외관은 1829년, 건축가 윌리엄 번에 의해 재건축됐습니다. 반면 성당 내부는 나무 조각 장식의 화려한 아름다운 엉겅퀴 예배당을 비롯해 정교한 솜씨를 뽐내는 스테인드글래스, 훌륭한 오르간들로 인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여왕의 기사 작위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합니다.
4) 메리 킹즈 클로즈
– 귀신이 많이 나타나기로 유명한 이곳은 메리 킹즈 클로즈입니다. 클로즈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골목이라는 뜻인데 에든버러에는 수많은 골목이 존재합니다. 이 골목에 살았던 메리 킹이라는 지역 유지의 이름을 따와서 지어진 이 골목의 이름을 말 그대로 메리 킹즈의 골목이라는 뜻입니다. 이 골목에는 상점가도 있었고, 도살 전 소들을 키우는 축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 창문 밖으로 쓰레기와 오물들을 골목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그래서 길바닥은 항상 더러웠고 질병 투성이였습니다.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 이 당시 중상층 계급 사람들은 고층 지대로 옮겨갔고 자연스레 하층민들이 저층 지대에 살게 됩니다. 17세기 메리 킹즈클로즈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게 되는데1644년 크리스마스 즈음 리스 항구에서 쥐를 통해 흑사병이 들어와 에든버러 시내에 퍼져나가게 되자, 의회에서는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바로 이 메리 킹스 클로즈에 가두어 죽게 만든다는 흉흉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메리 킹즈 클로즈에는 Street of Sorrow, 절규의 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됩니다. 이러한 흉흉한 소문때문인지 이 거리는 전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이상한 현상이 많이 발견 되는 곳입니다. 1680년부터 여성이 우는 소리가 난다는 등, 애완 동물 귀신들이 돌아다닌다는 등, 회색 수염의 머리 꺾인 남자가 돌아다닌 다는 등 수많은 목격담이 들리기 시작했고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유령은 ‘애니’라는 소녀의 유령인데 1645년 무정한 부모에 의해 흑사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그 후로 400년에 가까이 ‘애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고 이 메리킹즈 클로즈 박물관안에는 애니의 방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니를 위로하기 위해 인형과 장난감을 놓고 간다고 하네요. 이러한 수많은 목격담과 괴담때문에 이 메리 킹즈 클로즈는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장소 중에 하나로 꼽힙니다.
5) 에든버러 성
– 에든버러 성은 ‘죽기 전에 꼭 봐야 되는 성’으로 선정된, 133m 높이의 화강암인 캐슬락 바위산 위에 세워진 에든버러의 상징입니다. 6세기 에든버러의 방어를 위해 요새로 지어진 이 성은 지어 진후 점차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대연회장에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상징하는 ‘운명의 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스코틀랜드왕의 대관식 때 왕으로 임명받은 사람이 왕관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었던 돌입니다. 성서에 야곱이 베고 자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으로 믿어지는 이 돌은 스코틀랜드의 국보로 스코틀랜드 왕가의 힘과 정신을 나타냅니다. 1296년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돌을 빼앗아 갔으나 1996년에 잉글랜드로 부터 반환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죽고 다음 왕이 즉위 할때 이 운명의 돌은 다시 영국으로 옮겨져 대관식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에든버러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에든버러에서도 가장 오래되었을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가 신앙심이 독실했던 어머니를 위해 1130년에 지은 예배당입니다.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1시 정각에 대포를 쏘는데 이것은 시계가 없던 옛날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 에게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매일 오후 1시 정각에 대포를 쏘았던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에든버러 성은 최소 26회 이상으로 영국에서 가장 포위가 많이 되었던 성으로 고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분쟁, 14세기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 등등 수많은 역사적 갈등에 연루 되어있습니다.
6) 엘리펀트 하우스
– J.K 롤링의 베스트셀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판타지 소설인 ‘해리포터’가 탄생한 카페입니다. 빚쟁이인데다가 이혼녀였던 롤링은 아이들이 심심할 때 읽어주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할 겸 해리포터를 쓰게 되는데 쓸 곳이 마땅히 없자 이 카페에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1권을 쓰게 됩니다. 롤링은 해리포터를 쓰다가 이 작품을 출판하자는 마음을 먹고 수많은 출판사를 찾아갔지만 12번이나 번번히 퇴짜를 맞게 됩니다. 번번한 대표작도 없는 무명 작가인 롤링에게 출판사들은 오늘날의 아이들은 마법이나 마술사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출판을 거절합니다. 지금 그 출판사들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번번히 퇴짜를 맞다가 13번째로 찾아간 소규모 출판사 블룸즈버리와의 계약으로 해리포터 1권이 발간되고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얻어 이후 롤링은 졸지에 돈방석에 앉고 영국 여왕에게 훈장 까지 받게 되는 등 한방에 인생을 역전시킨 작품입니다. 블룸즈버그 출판사 또한 해리포터 덕분에 세계적인 출판사로 성장하게 되는데 롤링이 처음 찾아갈 때만 해도 구멍가게 수준의 출판사였다고 합니다. 당시 롤링이 받은 계약금이 440만원이였다고 하네요. 블룸스버그 출판사 사장의 딸이 원고를 읽어 본 후 적극 추천해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블룸버그 출판사에서는 처음에 5만부만 팔아도 많이 팔리는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은 5억부에 달하는 판매량을 보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100만부가 팔렸다는 말에 편집장 나이젤 뉴턴을 비롯하여 블룸즈버그 직원들 전체가 대박이라며 기뻐했다가 해외 수출되고, 수백 만부, 수천만부 넘기자 기쁜 정도가 아니라 단체로 멍을 때렸다고 합니다. 뉴턴은 후에 직원들이 1억부가 넘었다고 할 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해리포터는 대박을 치게 됩니다. 또한 소설이 후에 영화화가 되고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롤링의 재산이 영국 여왕을 상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억만장자가 된 유일한 작가인 롤링이 매일 아침 이 구석진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에든버러의 오래된 건물과 좁디좁은 골목들, 회색 빛의 도시를 보며 해리포터를 쓴 곳이 바로 이 엘레펀트 하우스 카페입니다. 사실 블룸즈버그 출판사만이 아니라 이 카페 사장 또한 해리포터가 대박을 치자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최소한 백만장자는 되었을 것이라는 후문이 있습니다.
7) 보비 동상
–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 교회 묘지는 ‘보비(Bobby)’라는 이름의 스카이 테리어(Skye Terrier)종 개 덕분에 반려견의 성지 같은 공간으로 유명해졌다. 사연은 1850년,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시골 조경사가 에딘버러로 이사를 오면서 시작된다. 도시라고 일감이 넉넉한 건 아니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굶길 수 없던 그는 낯선 도시의 밤 거리를 도는 야경꾼(night watchman)으로 취직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더운 여름 밤이든 길고 어두운 겨울 밤이든 그레이는 에딘버러의 자갈길을 돌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의 곁에 떠돌이 개 ‘보비’가 친구처럼 함께 있었다. 1858년 2월 15일 그레이가 폐렴을 앓다가 숨져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단짝을 잃은 보비는 그날부터 그레이의 무덤 곁을 한사코 지켰고 시민들은 무덤 곁에 보비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에딘버러시는 1867년 조례로 모든 애완견 등록을 의무화했다. 당시 시장 윌리엄 체임버스(William Chambers)는 시장 직권으로 보비를 ‘그레이프라이어스 보비’라는 이름으로 등록, 황동 이름표까지 달아 주었다. 보비는 만 16년을 살고 1872년 1월 14일 숨져 그레이의 무덤 곁에 묻혔다. 이듬해 한 귀족이 조각가를 시켜 묘지 맞은편에 음수대를 겸한 보비의 동상을 건립했다.
8) 프린세스 스트릿과 공원
– 과거에는 올드 타운에서 흘러내려온 하수물이 모여 있던 냄새나는 웅덩이였는데, 1820년대에 상류층 사람들이 복잡하고 지저분한 올드 타운을 떠나 뉴 타운을 건설하면서 웅덩이의 물을 모두 제거한 후 그들만의 정원으로 조성하였다. 현재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기에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다. 특히, 가든 분수대(Ross Fountain)에서 바라보는 에딘버러 캐슬의 전경은 사방에서 바라보는 캐슬 전경들 중 가장 멋진 에딘버러 캐슬 뷰포인트이다.
9) 월터 스콧 기념비
– 잉글랜드의 셰익스피어와 비교되는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의 기념비이다. 1844년에잉글랜드를 대표하는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모뉴먼트보다 5m 더 높게 지었다. 61m 높이의 기념탑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287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층계마다 스콧의 소설에 등장하는 64명의 인물 조각상을 볼 수 있다. 건축 당시에는 높은 건축물들이 거의 없었기에 파리의 에펠탑처럼 주변의 경관을 손상시킨다고 반대 의견도 많았다.
4. 세인트앤드류스 투어
1) 세인트 앤드류스 성당
– 1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인트 앤드류스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세인트 앤드류스, 스코틀랜드 수호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만든 도시답게 스코틀랜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규모의 대성당을 중심으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국기에도 사용되는 앤드류 성인을 모시는 도시의 대성당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의 모습으로 남아있답니다. 최초로 세인트 앤드류스에 정착한 사람들은 약 740년대의 픽트족이었습니다. 그러다 1140년, 데이빗 1세 왕이 세인트 앤드류스 지역에 성역을 지으라는 허가를 내립니다. 1160년대에 이 어마어마한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하는데,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 양식이 지어질 시기에 맞춰서 일정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완성된 대성당은 109미터의 중앙 회랑을 자랑하는 어마어마한 십자가 모습으로 지어집니다. 거대한 중앙 첨탑과 함께 위용을 뽐냈죠. 이런 위용을 자랑하는 대성당 덕분에 세인트 앤드류스 지역은 곧 성지순례의 장소로 등극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수만 명의 성지순례자들이 이 지역을 찾아오게 되고요, 이렇게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한 수로 찾아오던 곳이 종교개혁이라는 어마어마한 물결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1559년,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창시자 존 녹스(John Knox)가 설교를 하면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있던 카톨릭과 연관된 모든 건물들과 흔적들을 지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안쪽 끝 담까지 가면 골프의 아버지인 올드 톰 모리스와 그의 아들 영 톰 모리스의 무덤이 있고, 그 옆으로도 가족들의 묘지가 나란히 조성되어 세인트앤드류스 사람들이 모리스 집안을 존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세인트 앤드류스 성
– 지하에 광산과 으스스한 지하 감옥이 있는 이 성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13세기 유적인 이 세인트 앤드류 성은 해변과 북해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요.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여러 성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중의 하나지요. 세인트 앤드류의 대주교들이 살았고 악명 높은 수많은 죄수들이 갇혀있던 이 성의 흥미로운 과거 역사에 대해 들어보세요.멀리서 바다를 배경으로 성의 멋진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세요. 방문자 센터에 가시면 이 성의 역사에 대한 전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세인트 앤드류 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진과 그림을 살펴보세요. 중세 시대의 유물도 구경하시고요.예쁜 다리를 건너면 성에 들어가실 수 있어요. 바위를 깎아 만든 지하 감옥은 중세 시대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답니다. 조지 위샤트와 존 녹스 등의 종교 개혁가들도 이곳에 갇혀 있었어요.이렇게 습하고 어두운 곳에 갇혀있는 기분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이 지하 감옥은 화형과 교수형 등 무시무시한 과거 역사와 얽혀 있답니다. 성 아래의 광산 갱도에도 가보세요. 1500년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 있었던 긴장 상태를 보여주기도 하지요. 희미한 불빛이 켜진 으스스하고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 보세요. 이 광산은 답답하고 무서울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고요. 이 성에서 가장 잘 보존된 주방 타워와 남쪽 벽도 구경해 보세요.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동그란 우물도 있습니다. 바닷가의 고요한 분위기도 만끽하실 수 있어요.
3)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 스코트랜드에는 4개의 오래된 명문대학이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Ancient Universities라고 부르는데 그중 1413년 개교한 세인트 앤드류 대학이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대학입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입니다. 도시인구 전체가 16,680인데 그중 세인트 앤드류 학생수가8000면 정도이니까 대학에서 일하는 직원까지 합하면 거의 대학도시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영국대학들이 학점을 쉽게 주지 않는데 졸업생의 86%가 Upper Second 이상을 받는다고 하니 공부도 열심히 하는 대학이죠. 2011년 타임지가 선정한 영국의 대학순위 선정에서 랭킹 4위를 했습니다. 학생들의 40%가 사립학교 출신이니까 아주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귀족적인 분위기이고 전통적으로 미국 학생들이 많습니다. 에딘버러 외곽에서 출생한 앤드류 카네기는 세인트 앤드류대학 학생들이 선출한 렉토(Rector: 명예회장)였고 1776년 미국 독립 선언문 서명자중 3명이 세인트 엔드류대학에서 수학한 사람들입니다. 전통을 중시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유일하게 아직도 졸업식에서 라틴어로 기도를 하는 곳입니다. 이런 전통과 역사 그리고 중세의 도시분위기와 학풍이 왕자 윌리엄을 이곳 세인트 앤드류에 공부하러 오게 만든 것 같아요. 윌리엄 왕자는 이곳에서 예술사와 지리학을 전공했는데 케이트와 대학생활을 하면서 연인이 되었고 그들의 사랑을 만들어갔습니다. 얼마전 대학 설립 600주년 기념행사에서 윌리엄왕자가 초대되어 의미있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각개의 유명인사가 졸업생중에 있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졸업생은 윌리엄왕자와 케이트인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 작지만 고풍스런 도시를 더 품격있고 고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은 대학교정에 들어가는 입장료가 없고 도시 곳곳에 대학건물이 있어서 걸어가시다가 멋있다 싶으면 들어가 보세요. 가끔 학교 직원에게 부탁하면 강의실, 교수 회의실 그리고 도서관까지 입장이 가능합니다. 볼만한 건물로는 Salvator’s College-채플실에 들어가 보세요. Salvator’s College바로 앞에는 바닥에 PH라는 영문 이니셜이 모자이크되어 있는데요 1528년 처형될 때 나이 24살이었던 Patric Hamilton은 개신교 교리를 가르치다가 카톨릭에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된 장소입니다. 세인트앤드류 대학생들은 그 모이자크를 밝지 않으려고 합니다. 혹시 밝고 지나가면 학점이 내려 간다나요. 대학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St Mary’s College는 신학부 건물이구요 몇몇 건물들은 16세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구요 킹 제임스 6세가 건립한 도서관도 있습니다.
4) 골프 박물관
– 브리티시 골프 박물관은 영국 왕립 골프협회인 R&A에 의해 1996년도에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세인트 앤드류스 올드 코스 그리고 R&A 건물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어 스코틀랜드를 방문하는 골퍼들은 한번 쯤 꼭 들리는 곳입니다. 골프의 기원과 발전, 골프 클럽과 공의 변화와 함께 경기 규칙이나 유명 선수 등의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는데요. 600년에 이르는 골프의 역사를 각종 멀티미디어와 터치 스크린 전시물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어 더 쉽게 골프에 대해서 알 수 있답니다. 골프의 기원과 발전사 그리고 처음 만나는 올드 톰 모리스를 비롯한 유명한 선수들을 터치 스크린이나 영상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골프공 역시 처음부터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공이 아니었습니다. 골프공의 발전은 초창기에는 나무, 가죽, 깃털 등을 이용하여 만들다가 차차 천연고무, 합성고무 등의 소재로 발전을 하여, 1900년도에 와서 현재의 형태와 같은 딤플이 있는 공이 탄생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 1960년대 부터는 2피스 골프공이 나오게 되면서 피스 경쟁이 시작되었지요. 현재 가장 비싼 공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전설 속 인물인 올드 톰 모리스의 공인데요. 거위털을 채워 넣어 만든 공으로 1860년도 올드 톰 모리스가 디오픈 대회를 휩쓸 당시에 연습했던 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그 공은 올드 톰 모리스가 연습했던 지역 호수 속에 빠져 있어 그 공을 찾으려 많은 잠수부들이 호수 속을 헤메고 있다고 한답니다. 초창기 골프채는 클럽의 헤드 부분을 우드는 나무로 만들고 그립은 양, 돼지, 말 등의 가죽을 덧대어 묶어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후 1700년대에 철 재질의 골프채가 등장하면서 부터 우드와 아이언으로 나누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옛날 골프채들을 골프 박물관을 통해 보게 되면서 클럽 ‘우드’의 이름 그대로 나무로 된 클럽헤드로 공을 치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 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골프 박물관에는 미니 퍼팅장이 준비되어 있어 여러가지 재질로 만들어진 퍼터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데요. 나무 퍼터로 퍼팅을 하는 느낌은 현재 사용하는 퍼터보다 상당히 가벼운 느낌이라 색다른 경험이었답니다. 골프 박물관에는 브리티스 오픈 역대 우승자들과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장에서 우승한 선수들을 전시해 놓는 코너가 있는데, 한국 선수로는 박세리, 신지애, 박인비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박세리에 대해서는 ‘1988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투어 첫 한국 선수’라는 설명과 함께 ‘현재 세계 여자 골프를 주름잡는 한국 선수들 대부분이 롤 모델로 삼는 대상’이라며 골프 명예의 전당에 가입해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습니다. 또 브리티시 여자 오픈에서 두 차례 정상에 오른 신지애가 사용한 공과 의상, 퍼터가 박물관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신지애가 2008년에 브리티시 오픈에서 처음 우승할 당시 실제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5) 세인트 앤드류스 해변
– 세인트 앤드류스에는 2개의 넓은 해변이 있습니다. 제일 큰 것은 올드 코스를 끼고있는 서쪽 해변입니다. 길이가 2마일 이니까 작지 않습니다. 해변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분위기가 있습니다. 종종 세인트 앤드류 대학생들이 해안을 따라 조깅을 하기도하고 가족이 강아지를 데리고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합니다. 여름에 날씨가 좋으면 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젊은이들도 가끔 봅니다. 아주 시원하죠 한국보다는 훨씬 물이 찹니다. 이 서쪽 해변은 1924년 올림픽 육상 400m에서 우승한 뒤 나중엔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에릭 리들(Eric Liddle)을 영화화한 영화 “불의 전차”를 촬영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참 걸어가다 보면 여러명이 모여서 하늘 높이 해변에서 연을 날리는 모습도 보이고 동호인들이 모여서 윈드서핑을 하기도 합니다. 날씨가 받쳐주면 확 트인 해안과 잔잔한 모래사장을 걸으며 조개도 줍고 이야기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죠.
6) 스윌컨 브리지
– 골프의 성지인 올드 코스 17번 홀과 18번 홀 중간에 있는 올드 코스의 아이콘 스윌컨 브리지(Swilcan Bridge) 에서 사진을 찍는 것 추천합니다. 스윌컨 브리지에서는 가장 최근에는 2010 오픈 챔피언쉽에서 톰왓슨이 우승컵(Claret Jug)에 키스를 하는 사진으로 알려졌고 2005년에는 잭 니콜라우스가 그의 프로골프를 공식 은퇴하며 지는 석양에 이 역사적인 다리에 올라 마지막 촬영을 한곳으로 유명합니다. 브리티쉬 오픈 경기의 우승자에게 주는 트로피를 Claret Jug이라고 부르는데요 우승자에겐 카피본을 주고 진품은 클럽하우스에 영구 보관하고 있습니다. 올드 코스는 바다를 끼고 있는 링크스 코스라 프로골프들도 스코틀랜드의 강한 바다바람과 기온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날씨 때문에 고전하기도 하는데, 시에서 운영하는 퍼블릭 코스라 일요일에는 쉬기에 그날에는 골프장 18홀 전체를 따라 걸어가 보실 수 있습니다.
7) 톰 모리스 샵
– 골프의 아버지인 올드 톰 모르스와 그의 아들 영 모리스로 디 오픈을 각각 4번씩이나 우승했고, 특히 1868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우승과 준우승을 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골프 역사의 전설적인 부자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올드 코스 18번 홀 이름이 톰 모리스입니다. 골퍼이자 골프 디자이너와 잔디 관리자였던 올드 톰 모리스는 골프 클럽까지 제작하며 1866년 18번 홀 옆에 세계 최초의 골프 샵을 오픈했고, 지금도 성업 중이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샵입니다.
8) 던디
– 영국, 스코틀랜드 동부, 테이사이드 주의 주도, 항만도시. 북해의 테이 만 북안에 면함. 인구 17만 2000명. 상공업이 활발하고 전통이 있는 주트공업 외에 조선. 통조림(던디마멀레이드) · 석유 정제 · 화학 등의 공업이 활발함. 15세기의 탑이 있는 시교회와 던디대학, 16세기 건설된 앨버트인스티튜트(도서관 · 박물관 · 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테이강(江) 하구부의 북안에 있으며,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넓은 항구입니다. 12세기경부터 이 지방의 중심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13세기에는 칙허(勅許)자치도시가 되었으나, 그후 이곳을 둘러싸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자주 벌어진 쟁탈전으로 옛 건물은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중세 이후 주요 산업이었던 황마를 원료로 한 방직업은 지금도 영국 최대의 산지일 뿐 아니라 아마포·융단 등의 섬유공업 지대입니다. 직물기계·전기기기·식품·화학공업 등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도시로, 옛 성당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던디대학을 비롯하여 교육대학·상과대학·미술대학·기술대학 등이 있습니다. 최근 통합 친환경 에너지 파크로 도시 건설 추진, 2018년 영국 스코틀랜드 던디 시가 친환경 수소버스의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던디 시의 수소버스는 2,500만달러 규모 유럽연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2대가 도입됐습니다. 남극 해양탐사에 사용되었던 디스커버리 호 (Royal Research Ship Discovery)이 던디에서 만들어져서 항구에 정박해있습니다.
5. 더블린 투어
1) 아일랜드
– 아일랜드 국기는 녹색, 하얀색, 주황색으로 녹색은 카톨릭을, 주황색은 개신교를, 하얀색의 배경은 두 종교 집단의 평화와 이해를 상징합니다. 17세기 영국은 카톨릭과 개신교로 대표되는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으로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시기속에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자 우리에게는 스페인의 공주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서 카톨릭을 떠나 새로운 교회인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부터 명예혁명을 일으킨 메리 여왕과 윌리엄 공까지 영국은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각기 종교가 다른 군주들에 따라 구교와 신교를 넘나들며 극심한 혼란을 겪습니다. 헨리 8세의 탄압아래에 수많은 카톨릭 교도들이 체포된 후 처형당했고 영국은 성공회를 국교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이혼한 스페인 공주 캐서린의 딸인 (우리에게는 블러디 메리로 잘 알려진) 메리 1세가 1553년에 여왕으로 즉위하자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그녀는 헨리 8세 시대에 반포된 종교관련 법률을 모두 무효화시키면서 영국의 국교를 성공회에서 카톨릭으로 다시 복귀시킵니다. 그 과정속에서 또다시 수천명의 성공회 사제들과 교도들이 체포되거나 처형을 당했고 그러한 행적으로 피의 메리라는 악명을 얻게됩니다. 피의 메리 다음으로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다시 영국의 국교를 성공회로 복귀시켰고 이 과정속에서 메리 시대보다는 아니지만 적지않은 카톨릭 교도들이 탄압을 당하게 됩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 이후 최초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왕으로 등극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성공회 교도였고 그의 아들인 찰스 1세는 재임기간 내내 의회와 마찰을 빚다 마침내 벌어진 의회와의 내전에서 패배, 크롬웰에게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크롬웰은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적인 규율로 영국을 다스렸고 그에게 염증을 느낀 영국 국민들과 의회는 크롬웰의 사망 이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를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왕정복고를 이루어 냅니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독실한 카톨릭 교도로서 외적으로는 에스파냐 같은 카톨릭 국가들과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영국 내 카톨릭 부활과 왕권 강화에 힘을 쏟으며 개신교가 주류였던 의회와의 사이가 악화됩니다. 당시에 제임스 2세는 50세가 넘는 고령이었고 슬하에 딸만 메리, 앤 둘이었던 데다, 딸들도 전부 성공회 신도였기에 당초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서거만을 기다리던 상황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임스 2세가 늘그막에 아들 제임스를 낳게 되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의회는 당시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 공주와 그녀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통치자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두분에게 영국의 왕위를 양도할테니 부디 영국에 와주십시오’ 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명예혁명을 일으켜 제임스 2세를 왕위에서 쫒아내게 됩니다. 왕위에서 쫒겨난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을 가게되고 1689년 프랑스 군대와 함께 왕위 복귀를 노리고 아일랜드에 상륙하게 됩니다. 카톨릭 교도들이 대부분이었던 아일랜드는 제임스 2세를 지지하게 되고 개신교 군대였던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의 군대와 1690년 전투를 벌이게 되지만 패배합니다. 당시 제임스 2세를 지지했던 아일랜드 군대의 깃발이 녹색이였기 때문에 녹색은 카톨릭을 상징하게 되고 주황색은 오렌지 경 윌리엄의 영향으로 개신교를 상징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삼색기는 아일랜드가 수백년동안 지속됬던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길 바라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유럽 대륙의 서쪽 끝 변방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는 자그마치 8백년 여의 걸친 영국의 지배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며 독립과 자존을 추구해 왔으며, 종교와 정치적 갈등을 극복하고 1980년대 이후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가 바로 아일랜드입니다.
1)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www.guinness-storehouse.com/en)는 유럽 전통 흑맥주 기네스의 제조 과정과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전 세계 흑맥주 시장에서 기네스는 단연 1위인데, 일반적으로 북미, 남미, 브라질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시는 기네스는 멕시코에서 생산하고. 인도, 중국 등 아시아에서 마시는 기네스는 말레이시아에서 생산, 유럽에서 마시는 기네스는 아일랜드에서 생산됩니다.
고소한 맛에 크림거품과 걸쭉한 식감의 불투명한 검은색이 특징인 기네스의 흑맥주는 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고 볶은 보리로 만든 발효 맥주입니다. 기네스 창립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맥주 재료 맥아를 볶던 중 깜빡 졸아 까맣게 태웠는데 초콜릿 향에 아름다운 검은 빛을 보고 감탄했고, 이때부터 오늘날의 아일랜드 정통 스타우트 기네스 맥주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창립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1759년 12월 31일, 10년간 폐허로 있던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St. Jamess’s Gate Brewery)을 더블린 시로부터 임대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9000년 동안 연간 45파운드의 금액에 장기 임대 계약을 체결한 것. 1988년까지 이 건물은 생산기반시설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기네스 스토어하우스(Guinness Storehouse)가 되었다. 2,000년에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을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이름을 바꿔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건물의 내부는 기네스를 따라 마시는 커다란 파인트 잔의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다. 이 잔은 이상적인 대류 흐름을 만들기 위해 유체역학적으로 제작됐으며. 아일랜드의 흑맥주 기네스 잔이 대표적입니다. 1층은 기네스의 원료인 보리부터 맥주의 풍미를 결정하는 홉을 직접 만져 볼 수 있으며, 보리 로스팅에서 발효까지 맥주 공정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놓았습니다. 옛날 공장에서 사용하던 도구와 맥주 제조 기계도 그대로 옮겨놓고 전시하며, 맥주를 보관하던 오크통 제작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2층에서는 기네스 맥주의 재료와 생산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첫 번째 공정은, 보리를 볶는 로스팅 과정입니다. 선명한 색을 위해 밀보리의 껍질까지 로스팅 기계에 넣고 섭씨 232도로 볶습니다. 볶은 보리를 이용하여 맥주를 만드는데, 우리가 집에서 먹는 보리차가 살짝 커피색을 띠는 것처럼. 기네스는 볶은 보리로 맥주를 만들기 때문에 특유의 검은 빛깔을 띠게 됩니다. 껍질이 조금 남아있기 때문에 기네스의 쓴맛, 탄맛이 나기도 합니다. 가라앉은 것은 보리 껍질이므로, 끝까지 마시지 않는 것이 기네스를 마시는 매너입니다. 두 번째 공정은, 볶은 보리를 껍질 째 기계에 갈아서 완전한 가루로 빻는 밀스톤(맷돌) 과정입니다. 세 번째 공정은, 잘 빻아진 보리 가루를 높은 온도에서 90분 동안 끓이는 보일링 과정입니다. 기네스는 효모균을 이용해 발효시키는데, 상할 수 있기 때문에 홉이라는 천연방부제를 넣습니다. 홉은 기네스의 톡 쏘는 맛을 내고 뜨거운 물을 붓고 일관되게 저어서 죽처럼 만드는데, 이는 보리 가루가 까맣고 달달한 맥아즙으로 되는 과정입니다. 네 번째 공정은, 끓인 보리 물에 이스트를 넣고 약 48시간 동안 발효시키는 과정으로 기네스의 맛을 더욱 풍미롭게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스타우트이고, 10일 이상 숙성시킵니다.
각 나라마다 물맛이 다르기 때문에 맛도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리지널을 좋아하기 때문에, 디아지오 그룹에서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맥주를 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네스는 신선도 관리가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더블린 펍 중 기네스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펍에만 납품하므로 더블린 어느 펍에서든 신선하고 일정항 맛이 나는 기네스를 즐기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5분가량 지난 후 기네스 맥주의 색깔이 충분히 흑색을 띨 때 마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아이리시가 생각하는 기네스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안주는 굴(오이스터)과 홍합찜이라서 실제 아일랜드에는 굴 아가씨 선발 대회도 있습니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는 지하 1층과 지상 7층으로 층별마다 테마가 있어 전부 구경하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건물 내부는 1904년 당시 창고 철골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요. 구겐하임 미술관 구조와 비슷하게 기네스 전용 파인트 잔 모양에 맞춰 중앙에 오픈스페이스를 설계하고 빈 공간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였으며, 주변에 나선형 통로를 배치했습니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7층 바에서 티켓 가격에 포함된 1회 음료 쿠폰으로 기네스나 홉하우스13(기네스 사에서 내놓은 2nd 브랜드 라거)을 즐길 수 있다. 더블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경을 감상하며 시원한 기네스나 홉 하우스13을 즐겨보자. 아주 꿀맛일 것입니다.
2) 성 패트릭 성당
–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교회로, 800년대부터 교회가 있던 부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약 45m 높이의 미놋 타워 위에는 31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첨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 보시는 성당은 1220년에 지어진 성당입니다. 초기 영국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있는 이 웅장한 성당은 아일랜드의 수도 성인인 성 패트릭이 5세기경 아일랜드 선교 여행중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행한 우물가에 그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성당 옆에 있는 성 패트릭 공원에 그 우물터 유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교회를 건축했지만 1192년 존 코민 대주교가 브리스톨 지역에서 가져온 석회암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거대한 석조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카톨릭 성당이였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아일랜드 성공회 교회가 되어 현재에도 성공회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800년대 벤자민 기네스 경의 덕택으로 성당이 대대적인 보수 공사 및 개축되었고 그 보답으로 성당 옆에 벤자민 리 기네스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내부에 입장하시면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보실수 있습니다. 성가대석에는 갈색, 빨간색의 복잡한 바닥 패턴이 어우러져서 따뜻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18세기에 이 성당의 주임 사제였던 조나단 스위프트는 우리에게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묘비 또한 이 성당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성 패트릭 성당의 오르간은 4,000개가 넘는 개별 파이프로 이루어져 아일랜드에서도 최고 규모를 자랑합니다. 오르간 파이프들의 일부는 17세기 때부터 이어져 오던 것입니다.
3) 트리니티 칼리지 대학교
– 트리니티 칼리지는 1592년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주로 프로테스탄트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올 할로우즈 수도원의 흔적이 있었으나, 수도원의 원래 토대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몇 채의 훌륭한 건축물의 건축 시기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건축물로는 ‘루브릭스’ ‘프린팅 하우스’ 그리고 예배당 등이 있습니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명성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아일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교육 기관으로 오스카 와일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드라큘라』의 작가 브램 스토커, 현 아일랜드 대통령인 메리 매컬리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졸업생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건물 중 대부분은 더블린의 건축학적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조지 왕조 시대에 세워졌습니다. 도서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는 귀중한 유물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켈스 서(書)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먼저 들르는 장소는 웅장한 ‘롱 룸’이 있는 ‘올드 라이브러리’입니다. 길이가 64m에 달하며 원통을 반으로 자른 듯한 둥근 천정이 달린 이 방은 그야말로 이름에 걸맞습니다. 현재는 학생들이 이용하는 열람실로 안 쓰이고,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서가를 따라 유명한 대리석 흉상 컬렉션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 중 루이-프랑수아 루비약이 제작한 조나단 스위프트의 흉상은 최고의 걸작입입니다. 두 대의 중세 하프도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아일랜드의 왕 브라이언 보루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트리니티의 가장 큰 자랑서리는 바로 켈스 서입니다. 800년경부터 전해져 온 이 화려한 필사본은 그야말로 켈트 장식예술을 보여 주는 최고의 본보기입니다. 이 복음서는 아마 이오나 섬에서 제작된 후 미스 카운티에 있는 켈스 수도원으로 옮겨갔던 것 같습니다. 1600년대에 미스의 주교 헨리 존스가 이 책을 트리니티 칼리지에 선사했습니다.
4) 파넬 기념탑
–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인이자 1880년대 영국 하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던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동상과 기념비입니다. 그는 1880년 31세의 나이로 영국 하원내의 아일랜드 신 자치당의 당수가 되어 아일랜드 자치를 위해 힘쓴 인물입니다. 아일랜드의 민족 운동가였던 파넬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하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아일랜드 권리 옹호에 힘썼고, 아일랜드 토지를 영국 지주들의 손에서 되찾아내는 운동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파넬 기념비 건너편 왼쪽에 위치한 건물은 극장입니다. 이 기념비에서 더블린 핵심거리 중 하나인 O’Connell 거리가 시작이 되는데 이 거리를 따라 내려가면 더블린의 명물인 더블린 첨탑 ‘스파이어’와 중앙우체국, 그리고 여러명의 독립운동가 기념 동상들이 자리 하고 있습니다. O’ Connell 거리의 끝에는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을 해방시킨 다니엘 오코넬의 동상이 있습니다. 파넬의 기념비를 자세히 보시면 아일랜드의 상징인 하프가 자리하고 있고 옆에는 생전 파넬의 가장 유명한 연설문이 쓰여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한 나라의 주권을 방해할 권리는 없다라는 내용입니다. 파넬 동상 밑에는 아일랜드의 4개 지방이 쓰여져있고 좌우로 아일랜드의 여러 도시들의 이름들이 쓰여져있습니다. 찰스 파넬은 말씀드렸다시피 1880년대 영국 하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아일랜드 출신의 젊은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는데 그의 말로는 꽤나 비극적입니다. 하원에 입성한 그는 영국 출신 여성이자 당원의 아내였던 캐서런 오세이를 보자마자 반해버리게 되고 당시 여러 차례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별거하던 캐서린과 내연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5년동안 캐서린은 파넬의 아이 셋을 낳게 됩니다. 부인의 부정을 알게된 오세이 대위는 파넬에게 정치적 보상과 돈을 보장받고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하게 되지만 10여 년 가까이 유지되던 이 관계는 돈 많은 캐서린의 숙모가 죽으면서 오세이 대위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으면서 문제가 됩니다. 오세이는 유산을 노리고 캐서린을 상대로 소송을 걸게되고 파넬과 캐서린의 은밀한 내연관계는 공론화 되게 됩니다. 오세이는 자신을 철처하게 희생자라 주장하며 결국 재판에서 승소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혼 소송은 가장 인기 있는 뉴스거리였고, 파넬은 가정파괴범으로 매도당하고 맙니다. 결국 파넬은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고 21세기의 한 기자는 그는 사랑을 얻는 대신 권력을 잃었다고 평하게 됩니다. 정치에서 물러난 파넬은 아일랜드로 돌아와 1891년 6월 25일 캐서린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지만 비극적이게도 결혼식을 올린 이후 넉달이 채 되지 않은 1891년 10월, 45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불륜 스캔들에 휘말렸지만 파넬은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그의 장례식에는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간 아일랜드의 풍운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오코넬 스트릿
– 파넬 기념비를 지나 현재 걷고 계시는 거리는 오코넬 거리라고 불리는 거리입니다. 각 나라의 수도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거리가 있기에 마련인데 예를 들어 조선 왕조의 역사가 숨 쉬는 서울의 세종대로, 전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져 있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구역 등등. 각 도로의 성격은 제 각기 다르지만 모두 그 도시를 대표하는 거리입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도 그런곳이 있는데, 바로 더블린에 살면 하루에 한번 이상은 지나칠 수밖에 없는 더블린의 대표 거리, 오코넬 거리입니다. 이곳은 더블린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리피강 북쪽에 위치해 있는 거리로 18세기에 형성되었습니다. 더블린의 가장 유명한 번화가이자 더블린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거리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넓은 거리들 중 하나이며 뭐든지 세계 최고를 주장하길 좋아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거리라고 자부합니다. 더블린을 대표하는 거리지만, 이곳의 도로는 고작 4차선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이라도 도로의 폭보다 인도의 폭을 더 넓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코넬 거리는 아일랜드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인데 바로 다니엘 오코넬 동상으로 시작해 파넬 기념비, 존그레이 경, 오브라이언, 라킨 등 아일랜드 독립 및 교육에 큰 이바지를 했던 인사들의 동상이 도로 중앙에 줄지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6) 스파이어
– 오코넬 거리를 내려가다보면 동상들 사이에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이는 뾰족한 첨탑이 하나 서있습니다. 바로 ‘스파이어’라고 불리는 더블린 첨탑으로 아일랜드의 12년간 고속 성장과, 아이리쉬들의 식민 지배국이었던 영국인의 국민 소득을 추월한 기념으로 세워진 120미터 높이의 첨탑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나폴레옹을 쳐부순 영국의 국민 영웅인 넬슨 제독의 동상이 있었는데 밑의 사진 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넬슨 기념탑과 굉장히 흡사한 모습으로 지어진 것을 볼수 있습니다.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을 당시에 오코넬 거리의 상인들은 그 동상을 향해 “교통 체증을 불러일으킨다”고 불평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영국의 식민지를 상기 시킨다”고 비판했습니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시인 예이츠는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며 시인답지 않은 주관적인 평가로 그 동상을 비난했습니다. 결국 미운 오리 새끼같은 존재의 넬슨 동상은 1966년 아일랜드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에 의해 부활절 봉기 50주년 기념 테러로 산산조각이 나게 됩니다. 밑에 보이는 사진들은 당시 넬슨 동상의 폭발 사실을 전하는 신문 기사인데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넬슨만 깔끔하게 날아간 것으로 보아 전문가들의 작품이 분명하다며 굉장히 통쾌해하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건을 소개하는 기사 제목중 하나는 ‘드디어 넬슨이 패배했다’라며 영국을 향한 신랄한 농담을 던지는 기사도 볼수 있습니다. 넬슨 동상 폭발 이후 그곳에는 한동안 아무것도 세워져 있지 않다가 1990년부터 더블린 정부가 오코넬 스트릿의 대대적인 정비를 시작하면서 국제적 공모를 통해 2002년에 영국 건축가 이안 리치 아키텍트가 ‘스파이어 첨탑’을 건설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넬슨 동상을 폭파한 단체와 선정된 건축가의 약자가 모두 ‘IRA’라는 것. 또한 영국 식민지의 상징이라 파괴했지만, 그 자리에 다시 영국 건축가가 첨탑을 설계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120미터 높이를 자랑하는 이 첨탑의 컨셉은 ‘우아하고 역동적인 간결함을 미술과 기술의 결합으로 승화하자’는 것이였는데 손님들께서 보시기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기술적으로는 500년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하부의 지름은 3미터지만 가장 높고, 좁은 원추 꼭짓점은 15센티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블린의 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최첨단 공법을 사용하여 끝 부분은 좌우로 1.5미터 가량은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7) 오코넬 동상
– 아일랜드 카톨릭들의 ‘해방자’라고 불리는 다니엘 오코넬의 동상입니다. 오코넬은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정치 지도자이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카톨릭이 영국 하원의원이 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카톨릭 차별법이 존재했는데 오코넬의 노력으로 1829년 카톨릭 차별법이 폐지되게 됩니다. 이것은 아일랜드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인데 그동안 카톨릭이라는 이유로 영국 하원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수많은 아일랜드 카톨릭들이 영국 하원으로 진출할수 있게 되었고 아이리쉬 정치가들은 이후 영국 하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오코넬은 또한 1800년 제정된 영국-아일랜드 연합법을 폐지하기 위해서 노력한 인물입니다. 오코넬은 정치와 외교를 통해 아일랜드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려 했던 대표적인 온건파입니다.
8) 템플 바
– 템블바는 지역 이름으로 전통의 아이리쉬 펍이 밀집되어 있는 곳들입니다. 기네스 맥주를 맛볼 수 있는데 더블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기 때문에 다른 펍에 비해 비싼 편입니다. 다만 거리에서 각종 공연을 하기에 여러 다양한 문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6. 북아일랜드 투어
1) 벨파스트
– 북아일랜드의 수도로 타이타닉호가 만들어진 곳입니다. 타이타닉은 1912년 첫 출항때 침몰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배로서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타이타닉으로 더욱 유명해진 초호화 여객선입니다. 벨파스트에는 타이타닉 세계 최대 박물관이 있어 전 세계에 단 하나 남아 있는 화이트 스타 기종이자, 타이타닉을 본떠 1/4크기로 만든 SS 노마딕 선에서, 타이타닉 당시의 화려한 장식이 있는 문과 내부, 계단을 실제적으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벨파스트 캐슬은 1180년에 벨파스트를 지키고자 하는 군사 요새로 높은 언덕에 건축되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박물관 및 예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벨파스트 청춘들이 결혼하고 싶은 곳 1순위로 손꼽을 만큼 귀족풍의 건물과 정원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벨파스트와 함께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2) 다크 헤지스
: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길로 유명한 곳입니다. 너도밤나무 수십 그루가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는 터널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이 너도밤나무들의 나이는 모두 260년이 넘습니다. 지난 1750년 무렵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부호가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서 저택 입구에 심었던 나무들입니다. 이 멋진 풍광이 관광객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5년 전부터입니다. 1998년 북아일랜드 관광청이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홍보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 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또한, 왕자의 게임이란 영화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지고, 컴퓨터 배경 화면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사진 촬영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3) 자이언트 코즈웨이
–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오래 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총 4만여개의 주상절리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1986년 유네스코의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세계 8대 불가사의이자 세계 최대의 주상절리입니다. 대부분은 육각형의 모양이지만 사각형과 오각형, 칠각형과 팔각형의 모양도 있습니다. 기둥의 크기와 규모는 용암이 식는 속도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는데, 가장 큰 주상절리는 12m에 달합니다. 아이랜드 전설로는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그 이름처럼 거인이 지은 둑길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아일랜드 거인인 핀이 스코틀랜드 거인 버낸도너로부터 결투 도전을 받아들이고는 그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둑길을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버낸도너가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된 핀이 두려워서 숨었는데, 핀의 아내 오너프가 핀을 아기로 변장시켰습니다. 아기로 변장한 핀을 핀의 아기로 착각한 버낸도너는 ‘핀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인이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겁을 먹고 스코틀랜드로 허겁지겁 도망하면서 핀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둑길을 부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는 스타파 섬에도 자이언트 코즈웨이 같은 주상절리인 핀갈스 동굴이 있어서 그런 전설이 나온 것 같습니다.
4) 로프 브릿지
– 어부들이 연어잡이 그물을 확인하기 위해 설치한 출렁다리로 깊이 30m, 너비 20m 섬 사이를 로프로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2004년부터 관광용 다리가 되면서 입장료를 받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5) 던루스 성
– 현재는 전쟁으로 무너져 폐허가 되었지만 전에는 북 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바이킹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습니다. 스코틀랜드 맥도날드 가문이 두 차례나 정복할 정도로 영국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았던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영국의 아일랜드 정복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바닷가에 위치한 신비한 자태로 인해 드라큘라 성의 모델이 되었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