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3장 – 그일라 구원>
- 이제 우리는 선지자 갓이 왜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게 되었다(22:5). 사울이 나라의 안전에 대해서는 등한시 하였기 때문에 다윗은 비록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을지언정 나라의 안전을 돌봐야만 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갚았으며, 원수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분의 유형이 되어야만 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로 내려와서 그 성읍을 약탈 하였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달되었다(1절). 다윗을 그 나라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이런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아마 하나님과 다윗이 사울을 떠났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침략을 감행할 것으로 보인다. 왕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의 종들을 핍박하면 사방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사울이 다윗과 싸우는 한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나라와 싸울 것이다. 다윗은 그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 오고 싶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 보았다. 다윗의 경건함과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을 볼 수 있다. 다윗은 선지자 갓을 통해서 여호와께 물었다. 왜냐하면 (6절에 의해서 볼 때) 다윗이 그일라로 내려가기 전에는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라고 다윗은 물었다. 다윗은 자기의 임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서, 두 가지를 다 아울러 물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할 일을 그가 대신해도 좋으며 더우기 그의 허락 없이 해도 좋은 가를 물었고, 또 한 줌의 무리밖에 안 되는 적은 군사로 그렇게 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며 더구나 자기 배후에는 사울이라는 위험한 적이 있는데 그 싸움에서 안전하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또 그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지시를 받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에게 크신 위로가 된다.
-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그에게 블레셋 사람들과 맞싸우라고 지 시하셨으며, 또 반드시 성공한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2절). 다윗은 자기의 군사들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그들을 간단히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사람들이 그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다(3절). 다윗의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 사람들 사이에도 그들을 죽이려는 원수들이 많은데, 블레셋 사람들까지 상대해서 싸우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해서 반대하였다. 그들은 사울의 쫓는 손에서 피하기조차 어려운데 또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겁을 먹었다. 다윗은 그러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여호와께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울의 명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는 허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4절)는 승리의 확신까지 얻게 되었다. 이 하나님의 응답은 능히 자기 휘하에 있는 비겁자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줄 수 있었다. 다윗은 이에 블레셋과 싸워, 그들을 도륙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출하였다(5절).
<사무엘상 24장 – 살려준 사울>
- 사울은 다시금 다윗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1,2절). 하나님의 섭리는 사울로 하여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는 바로 그 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3절).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재촉하였다(4절). 다윗의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말했으며,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시던 바로 그 때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제 고난의 때가 끝나고 높이 들려 올려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울의 목숨은 전적으로 다윗의 자비심 여하에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윗이 사울에게 자비를 베풀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당신 소견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시오” 라고 그의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릇 이해하기 쉽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를 사울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신다고 확신을 넣어 주셨다. 그런데 그의 사람들은 이것이 곧 사울을 없애라는 허락이라고 해석하였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릇 이해하기가 쉽다. 지금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힘이 있기에 그를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다윗의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다.
- 다윗은 사울의 겉 옷자락을 베었다. 그러나 즉시 다윗은 이런 일을 행한 것을 뉘우쳤다. 그것이 조금도 사울을 직접 해한 것은 아니며, 또 그에게 충분히 사울을 죽일 힘도 가지고 있었으나(11절),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손상시켜 준 것이기에 다윗은 이런 일을 원치 않았고, 그의 마음이 찔림을 받았다(5절). 적게 보이는 죄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이 찔림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양심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증거이며, 이로써 보다 더 큰 죄를 방비할 수 있다. 다윗은 그 자신과 그리고 그의 부하들에게 사울을 해하지 못 하도록 설득하였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생각했으며, 그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그의 주인으로 여전히 생각하였다. 사환들과 신하들은 아무리 어려운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책임과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윗에게서 배워야 한다(벧전 2:18). 다윗은 그의 사람들을 타일렀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다”(7절). 그는 자기 자신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악을 행치 않도록 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의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에게, 그 악을 선으로 갚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로 그에게서 자기를 핍박한 자를 구원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리고 모든 악을 선으로 정복하여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찾아 볼 수 있다
<사무엘상 25장 – 나발과 아비가일>
- 여기서부터 나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사람은 다윗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우리가 전혀 그 이름조차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나발이었다. 그 뜻은 ‘미련한 자’이다. 그의 부모가 어찌해서 그런 이름을 붙여 주어서, 그의 인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나쁜 징조를 삼게 하였는지 이상하다.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들은 모두 그런 이름으로 일컬어질 만한 운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며” (욥 11:12), 우리 마음이 ‘미련한 일’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이해력이 대단히 빠른 여자였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아버지의 기쁨’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여자를, 재물만을 좋아하고 지혜를 좋아하지 않는 그런 남편과 결혼시킴으로써 그 여자의 아버지는 그 여자에게서 어떤 기쁨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많은 자녀들을 세상의 재물이라는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고 그것과 결혼시키며, 그리고 그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지혜가 재산의 상속을 받을 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재산 상속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다윗이 보낸 심부름꾼들에게 나발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달 되었다(12절). 그들은 나발의 심술궂은 말에 대해 아무 말 않고 갑자기 되돌아 서서 감으로 그들의 불쾌감을 나타내었다. 또 그들은 욕설에 대해서 욕설로 대항하거나 힘으로 그를 꺾어 버리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윗에게 이야기하여 줌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일처리를 잘 하였다. 그리스도의 종들도 그들이 이처럼 욕설을 들었을 때에는, 저 혼자서 실컷 떠들다가 자기 본색을 드러 내도록 내버려 두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종은 그의 주인이 받은 욕설을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기는 했어도 그 사람들에게 말대꾸하지는 않았다(눅 14:21). 다윗은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다. 다윗은 칼을 차고, 4백 명이나 되는 자기의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13절). 여기서 우리는 아비가일이 그녀의 남편과 온 집안 식구들에게 밀어 닥쳐오던 재난을 막을 수 있었던 신중한 일 처리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의 지혜는 전쟁시의 무기보다 낫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 25:12).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지혜로운 책망자가 되었으며, 다윗도 그 자신의 평소의 생각대로 그 책망을 듣는 청종하는 귀가 되었다(시 141: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나는 이를 은혜로 여긴다.” 충고는 주는 자도 훌륭하고 듣는 자도 훌륭할 때 비로소 성과를 거둔다. 다윗은 그가 죄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그에게 훌륭한 제동자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32절).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 할지로다.”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영혼이나 몸을 위해 어떤 친절을 베푼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충고를 하며, 우리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하여 주고, 위로하며 또 알맞는 책망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죄짓는 길에서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고마우신 섭리를 늘 감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