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6장 – 야곱의 이동>
- 하나님의 명령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부가되는 약속은 “그가 너의 길을 지시하실 것이다.”이다. 야곱은 여기서 아주 큰 고민을 갖는데, 여행 뿐 아니라 이주와 그것도 다른 나라에 정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겐 아주 놀라운 한 변화라는 점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가나안에서 살고 죽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야곱은 하나님께 떠나는 일에 대하여 확인하지 않은 채로 가려 하지 않았다. “내가 애굽으로 내려가리이까, 아니면 해브론으로 돌아가리이까?” 불확실한 경우엔 이런 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하늘로부터의 직접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말씀과 섭리의 지시에 유의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야곱은 그의 뼈가 애굽에 묻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실망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었다. “두려워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라.” 그리고 이주에 있어서의 안락을 그에게 약속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리라.” 하나님의 임재가 그와 함께 하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는 곳으로 가는 자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을 충분히 안전하게 해 주며, 두려움을 없이해 준다.
- 늙은 야곱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가나안을 떠나리라고는 거의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물론 “그의 보금자리에서 죽을 것을” 기대했고, 그의 자손이 그 약속된 땅의 실제 소유인이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을 다르게 명령하신다. 잘 정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잠시 후엔 정주하지 못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 약속의 성취는 항상 틀림없지만, 그러나 종종 그 속도가 느리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노라고 약속한 지 215년이 됐다(7:2). 그러나 그 약속이 주어졌던 그 자손의 가지는 겨우 칠십에까지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자세히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이 칠십을 애굽에서까지도, 그렇게 거대한 수로 번창시킬 수 있었다는 데에서 보다 유명한 것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사 60:22).
- 요셉과 야곱의 상봉이 나온다. 요셉이 얼마나 야곱을 사랑했는가! 시간이 그의 의무감을 지워버리지 않았고, 그가 그 아버지를 보고 기뻐서 목을 안고 쏟은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진지하고 강한 사람의 진실된 표정이었다. 눈물이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다같이 표현하는 이 세상에서는 그 두 가지가 서로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천국에는 완전한 기쁨이 있고, 기쁨의 눈물은 없다. 모든 눈물 즉, 기쁨의 눈물까지도 없어지리니 이 세상에 없는 흠 없는 기쁨이 거기엔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47장 – 애굽에서의 삶>
- 요셉이 신하로서 그의 왕에게 보여 준 존경이 있다. 비록 요셉은 바로의 총애 받는 자였고 그 나라의 총리였으며 그로부터 그의 아버지를 애굽으로 모셔오도록 특별한 명령을 받았었지만, 바로에게 알릴 때까지는 정주를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1절). 우리의 요셉이신 그리스도는 “주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며(마 20:10-23) 그의 왕궁에서의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아버지를 위해 준비된 대로 배치한다.
- 바로는 그들을 위해 고센 땅에서의 입주 허가를 주었다(5, 6절). 이것은 바로의 요셉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왜냐하면 요셉은 자기와 자기 나라에 그만큼 축복이었기 때문이고, 그는 오직 그 때문에 그의 가족에게도 친절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능력자들이라는 전제아래 그들에게 그의 가축의 목자로 기용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업무에 근면한 자들은 왕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나그네길이라 부르고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보고 다른 세계를 향한 여행자로 본다. 이 지구는 그의 여인숙이지 그의 집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 사도는 말한다(히 11:13). “그들은 자기들이 외국인이며 나그네라고 증거 했다.” 그는 지금 그가 전에 결코 가본 일이 없는 낯선 나라 애굽에 있기 때문에 자기를 나그네라 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조국에서의 생활도 나그네 길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나그네일 뿐이며, 앞으로도 항상 그렇다.
- 야곱이 자신의 날들에 대해 말한 내용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들이 적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지금 130년을 살았어도 그것이 그에게는 영원한 날들과 영원한 하나님과, 그 속에선 천년이 하루같은 영원한 나라와 비교하면 겨우 몇 날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둘째, 그 해(年)들은 험악했다고 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실이다. “그는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 찼다.”(욥 14:1). 그리고 그의 날들이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한다. 그 수가 적은 것은 좋은 것이다. 야곱의 생애는 특별히 험악한 날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즐거운 날들이 아직 그의 앞에 있었다.
- 기근을 당한 애굽과 그 인근 지역의 커다란 곤경으로 양식이 없었고, 땅이 쇠약했으며(11절), 거의 죽게 됐다(15, 19절).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만큼 의지하고 있는가 깨닫자. 그 은혜가 잠시 동안이라도 지연되면 우리는 죽고 망한다. 우리 모두가 망한다. 하늘의 비가 2, 3년만 계속되어도 우리의 부(富)는 우리를 아사(餓死)로부터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보고 항상 그의 사랑 안에 있도록 하자.
- 야곱은 그가 애굽으로 온 후 그의 기대보다 훨씬 많은 십 칠년이나 더 살았다. 십칠년 동안 그는 요셉을 양육했고(그가 팔렸을 때 그 정도나이였다)(37:2), 지금은 보답으로 십 칠년간 요셉이 그를 부양했다. 잘 보라. 얼마나 친절하게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의 일을 준비했는가. 그가 늙어서 근심이나 노역을 거의 해볼 수 없었을 때 예상도 못한 그의 아들에 의해 잘 준비되어 그는 그것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됐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손상을 염려하신다.
<창세기 48장 – 야곱의 축복>
- 경건한 부모들은 자기 자신들 뿐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을 위해 축복받기를 원한다. “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소서!” 요셉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도 그의 아버지께 친절했고, 그러므로 그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기대할 만했다. 야곱은 그의 아들의 방문을 알고, 그 자신이 가능한 한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2절). 그는 그의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껏 축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육체의 힘을 최대한으로 내서 “침대 위에 앉았다.”
-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자신의 손자들일 뿐 아니라 아들들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애굽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아버지가 그 형제들과 갈라져 있어서 그들은 여호와의 상속으로부터 잘려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야곱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가시적 교회의 일원으로 삼는다. 그는 이것을 16절에서 설명한다. “내 이름과 내 조상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마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애굽에서의 권력과 영예를 누리는 그들의 아버지를 계승하지 말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상속받은 나를 계승하게 하라.”
- 야곱은 그들이 애굽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말고 애굽 사람들과 섞이지 말며 모세가 후에 그랬듯이 그들의 운명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도록 가르친다(히 11:24-26).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의 부 (富)와 출세의 유혹을 깨쳐 버리고 치욕과 곤경 속에서 신앙을 보호하는 자들은 두 배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야곱은 그들에게 교회 안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이 교회밖에 높은 위치에 있는 것보다 나으며, 가난한 야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부유한 요셉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믿게 하려 한다.
- 야곱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경험을 회상한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났던 사실에 관하여 말했다(3절).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특별한 방문과 우리가 가끔 그와 맺는 특별한 교제를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15, 16절) 그는 거룩한 섭리가 그의 평생 동안 그에게 베풀었던 끊임없는 관심을 언급한다. 야곱은 “하나님은 나의 출생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셨다”고 했다(15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생의 유지를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선에 대한 끊임없는 경험을 가졌다. 우리의 일생 동안 우리를 먹인 그는 결국 우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 야곱은 그들을 축복하면서 손을 어긋 맞겨 얹었다. 이것은 요셉의 맘에 들지 않았으니, 그는 그의 장자의 명예를 보존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의 아버지의 손들을 옮겨 놓았다(17, 18절). 그러나 야곱은 그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을 실수로 한 것도 아니며 기분으로도 아니고 어느 하나를 더 편애해서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했다. 므낫세는 크다. 그러나 실로 에브라임은 더 커야한다. 하나님은 종종 가장 적게 받을 것 같은 사람에게 가장 많이 준다. 그리고 세상에서 약한 것들을 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먼지로부터 일으켜 세운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은혜는 더욱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