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장 – 섭리>
- 바로의 술 만드는 자와 빵 굽는 자의 얘기가 요셉의 발탁에 기여한 바가 없다면,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고, 교회의 이익을 위해 통치된다. 이 바로의 두 신하들의 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그의 잔에 파리를 빠뜨렸거나 빵에 모래알을 넣은 정도로 작게 생각한다. 어떤 것이었든 간에,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을 요셉이 있는 감옥으로 데려왔다.
-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그것은 두 죄수들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며 그것이 신에게서 왔다는 확신을 그들에게 주는 보기 드문 꿈을 같은 날 밤에 그들의 머리 속에 가득 채웠다. 꿈들의 내용과 그 해석이 죄수들을 괴롭힌 것은 그들이 갇혀 있기 때문에 꿈을 해석한다고 자처하는 애굽의 술객들에게 의지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여기 감옥에는 “해석자가 없도다” (8절).
- 요셉은 여기서 그들에게 옳은 방법을 지적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그는 자기가 경배하는 하나님에게로 그들을 인도하려고 한다. 올 일을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사 46:10). 그러므로 그는 평범하든 비범하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선견의 은사에 대해 찬양을 받아야 한다. 요셉은 자기의 찬사에 대한 경고를 전제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데에 유의한다. 다니엘도 그러하였다(단 2:30). 요셉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만약 해석이 하나님께 속한다면,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이며, 그가 원하는 자에게 그 힘을 전달할지도 모르니, 당신들의 꿈을 나에게 말하소서.”
- 술 만드는 관원장의 꿈은 삼일 이내에 그의 석방과 재진출을 알리는 다행한 전조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그것을 그에게 설명했다(12, 13절). 빵 굽는 관원장의 꿈은 그의 수치스런 죽음을 예고했다(18, 19절). 그에게 보다 좋은 소식을 전해 주지 못한 것은 요셉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역자들은 오직 해석자일 뿐, 그들이 일을 사실과 다르게 만들 수는 없다. 요셉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궁정에서 한 친구를 얻었다(14, 15절). 그는 술 만드는 관원장에게 점잖게 호의를 구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소서.”
-하지만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렸다(23절). 자기 자신이 평안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보라. 그러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배우자. 요셉은 아마도 술 만드는 관원장에 대한 관심에 너무 많이 의지했던 것 같고, 그로부터 너무 많이 약속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자기의 낙망으로 인하여 오직 하나님만 신뢰할 것을 배웠다. 우리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적게 기대해도 너무 적게 기대할 수 없고,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많이 기대해도 너무 많이 기대한다고 할 수는 없다.
- 요셉이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던 그 사람은 요셉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당신의 나리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던 사람은 잊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술 만드는 관원장의 요셉에 대한 배은망덕을 잘도 비난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주 예수께 훨씬 더 불성실하게 행동한다. 요셉은 다만 술 만드는 관원장의 석방을 예언했을 뿐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었고 왕에게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그를 기억하고 자주 그를 잊고 있다.
<창세기 41장 – 총리가 된 요셉>
- 요셉의 석방의 지연, 그것은 ‘만 2년’이 마칠 때까지였다(1절). 우리는 인내할 필요가 있다. 참을 뿐 아니라 기다리고 인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그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감옥 속에 있었다(시 105:19).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정해진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비록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긴 할지라도, 꼭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면 그것은 가장 좋은 시기이었음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다려야 하며(합 2:3), 만 2년 걸리는 것을 기다리기에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 해석가로서 바로에게 요셉이 추천되었다. 술 만드는 관원장은 바로에게 봉사하는 것을 보다 형식적으로 하고 요셉에게는 감사함으로 했으며, 또는 그의 사정에 대해 동정심을 갖고 했다. 그는 훌륭한 고백을 한다(9절). “내가 오늘날 요셉을 잊어버린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우리의 의무를 기억하고 그것을 적기에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나 우리가 일단 후회하면,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고 회개하며 결국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늦은 것이 아주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 자기 백성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이 정한 시기는 결국 가장 적당한 시기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술 만드는 관원장이 처음에 요셉의 석방에 대해 관심을 썼더라면, 그래서 그것을 달성했더라면, 아마도 석방과 동시에 그는 자기가 그렇게 절실하게 바라던 히브리 땅으로 다시 돌아갔을지도 모르며(40:15), 그러면 후에 그가 증명하는 바 그러한 축복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기 가족에게 축복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년 더 머무름으로서, 이제 길이 열렸다. 인내심 있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그들의 기다림에 대한 원금 뿐 아니라 이자까지 보상될 것이다(애 3:25).
- 요셉이 바로에게 소개됐다. 왕의 일은 신속을 요한다. 거기에 대해 요셉은 아주 점잖고 신중한 대답을 한다(16절). 그 대답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그것은 내 속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주셔야 하옵니다.” 위대한 천부의 재질은 그것을 가진 자들이 겸손하게 사용하고 그 찬사를 자기들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릴 때 가장 은혜스럽고 찬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
- 바로는 그의 꿈을 얘기한다. 그 두 꿈들은 우리 대부분이 풍요한 기근, 즉 곡식과 잡초를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두 가지 일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참고 자료를 가졌다. 짐승을 위한 목초의 풍요와 기근은 살진 암소와 야윈 암소로써 암시되었다. 사람이 먹는 채소의 풍요와 기근은 가득찬 이삭과 마른 이삭으로 예시되었다. 이 세상 삶의 안락이 얼마나 변화무쌍한가를 보라. 큰 풍요 뒤에는 큰 기근이 올 것이다. 우리는 풍요한 데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 바로가 요셉에게 베푼 커다란 존경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 이다. 그리고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크게 존칭을 붙이는 것이 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38절). 그는 명철함에 있어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다.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39절). 이제 그는 자기에게 행해진 치욕을 풍족하게 재 보상받는다. 그리고 그의 의는 아침의 빛 같다(시 37:6).
<창세기 42장 – 이루어진 꿈>
- 야곱은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 오라고 아들들에게 명령한다(1, 2절). 가나안에는 계속 기근인데도, 애굽에는 곡식이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하신 것이다. 즉 한 곳은 다른 한 곳의 원조자가되고 식량 공급자가 되게 하셨다. 그들은 곡식을 사기 위해 짐을 꾸리고 다른 사람들 중에 섞이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들은 요셉 앞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요셉은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정중한 예법을 갖추어 “요셉에게 절을 했다”(6절). 이제 그들의 빈털털이 곡식 단들이 알곡의 한 단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이다.
- 요셉의 형제들이 왔을 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그런 곳에 요셉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8절). 요셉은 꿈을 기억하고 있었지만(9절), 형들은 그 꿈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중에 담고 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처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셉은 자기의 꿈을 유념하고 있었고, 그 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제들에 대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이전에 지은 죄를 회개하게 되고, 그 꿈은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 왜 요셉은 이렇게 형들에게 가혹히 굴었는가? 형들이 전에 자기를 괴롭혔으니, 이제 자기가 그들을 괴롭히려는 복수의 정신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였으며, 자기가 고대했던 바, 자기 집안 소식을 끄집어내고 싶어서였다. 요셉이 친구처럼 보이면 정체가 탄로날까 봐, 마치 재판관처럼 물은 것이다. 베냐민이 보이지 않자 그도 쫓겨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여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에 관하여 말할 기회를 준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가혹한 듯이 보이기도 하며, 또 복을 주시려고 예비하신 자들에게 엄히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었다(24절). 그들이 아직 충분히 겸손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성이 그에게 아직 그들에 대해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도록 지시했지만, 그는 온화한 마음의 소유자이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애정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동정심을 나타내 준다(렘 31:20 참조)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그를 깊이 생각하노라”(삿 10:1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