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장 – 야곱과 에서>
- 아브라함의 나이와 죽음의 기록이 있다(7, 8절). 그는 175년간을 살았다. 그것은 그가 가나안에 온지 꼭 100년 후였다. 그는 “수가 높아서 죽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였다. 그는 세상이 그를 싫증낼 만큼 오래 산 것은 아니라 그가 세상이 싫증날 만큼 살았던 것이다. 그는 충분히 살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영을 주신 바 있는 모든 영의 아버지의 손에 양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곧 이어서 모세는 이삭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11절). 그가 어디에서 살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 받은 축복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든 약속이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하여 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여기에서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범상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삭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동안과, 그 후에 그의 아들들이 이야기될 때에 언급이 되고 있으나, 그 자신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이 없다. 이삭은 활동적이거나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평온하고 조용하게 보낸 사람인 것같이 생각된다.
-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리브가는 지금 자기가 처한 입장에 관하여 무척 당황해 하였다.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그녀는 말했다(22절). 이전에는 아이가 없는 것이 그의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들의 싸움이 그의 괴로움이 된 것이다.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위로가, 때때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해 아래 있는 모든 사물 위에 깃든 허무를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신다.
- 태 안에서 서로 싸우는 야곱과 에서의 이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싸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자손과 뱀의 자손은 그들 사이에 적의가 심어진 이후(3:15)로 끊임없이 다투어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인간들 사이의 항구적인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우리들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룩한 전쟁은 악마의 궁전에 있는 평화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 리브가는 어떻게 그 불안에서 벗어났는가? 그녀는 “가서 여호와께 물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에게 하나님의 신탁을 물었거나, 또는 우림이나 드라빔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다고 한다. 이 우림과 드라빔은 나중에 판결의 흉패로 사용됐던 것이다. 우리가 매우 당황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 묻는 기도가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모든 사정을 주님 앞에 털어놓고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의견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마음의 위로가 된다. “성소로 들어가라”(시 73:17).
- 여호와께서 리브가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주셨다. 그 답변은 리브가의 궁금증을 해명해 주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도다”고 했다(23절). 리브가는 두 아기를 임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민족을 임신하고 있는 것이요, 그들은 태도와 성품 뿐 아니라 이해 관계도 크게 상반되므로 서로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에돔 사람들이 다윗의 족속에게 종속됨으로써 성취된 일이다.
-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늘 취하시는 방법이다(고전 1:26, 27). 에서는 이 세상 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사냥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그는 니므롯이나 이스마엘과 같이, 사냥만을 위해 살고, 사냥하러 나갈 때 외에는 즐겁지 않았다. 야곱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장막에 거하는 조용한 사람’으로 양을 지키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 이삭은 그 자신이 활발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활발한 아들을 사랑했다. 에서는 어떻게 해야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끔 사냥한 고기를 대접함으로써 경의를 표하여, 온갖 사랑을 그 인자한 노인으로부터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던 하나님의 예언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더 사랑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모가 자녀들을 다르게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한 리브가의 태도가 분명히 옳은 일이었다.
-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함부로 경멸했고, 그것을 어리석게 팔았다. 그는 이 때문에 ‘망령된 에서’라고 불리워졌다(히 12:16). 왜냐하면 한 그릇의 식물(食物)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장자의 권리를 경홀히 여긴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불경스런 것이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나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을 저버린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자.
<창세기 26장 – 이삭의 이사>
-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유하라”고 하셨다(5,3절). 야곱의 시절에도 기근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다(46:3, 4).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흉년이 왔을 때에는, 어떠한 길도 지시하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제각기 다른 것은 세 족장들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밀접한 친교를 맺고 있어 그에게는 모든 땅 모든 조건이 한결같이 동일한 것이었다. 이삭은 어려운 고생을 견디는 일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야곱은 어떤 고통도 견뎌낼 수 있는 강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각자의 분량대로 인도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계약을 새로이 하셨다. 그것은 누누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계약이다. 즉 가나안 땅과 수많은 자손과 메시야의 약속을 반복하여 인준하신 것이다(3, 4절).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역경에 빠지거나 자기 부정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 삶을 부지해 주었던 약속을 되새겨 보고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행한 순종의 훌륭한 모범을 일러주었다.
- 이삭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정착하였다(6절). 그러나 그 곳에서 그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언젠가 당했던 유혹, 즉 얼떨결에 자기 아내를 자기 아내라 하지 않고 자기 누이라고 하게 된 그러한 유혹과 꼭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을 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약점과 결점까지도 모방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도 때때로 그들의 탈선한 발자취마저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잘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 이삭은 그의 아버지가 판 우물들을 다시 물이 솟아나게 하고(18절) 그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대로 그 우물들을 불렀다.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즉 생명수가 솟는 우물을 찾기 위해서는 비록 후세의 여러 타락된 현실들로 흐려져 있다 할지라도 이전 세대가 발견해 놓은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참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옛길 곧 우리 선조들이 파놓았으나 지금은 진리의 적들이 묻어버린 그 우물을 찾도록 하자. 옛 어른들께 묻고 구하라. 그러면 그들은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내쫓아,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도록 하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찾아오시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 주셨다. 비록 인간은 거짓되고 불친절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은혜가 충만하시다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 위로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절망에 빠졌을 때 스스로를 나타내신다.
<창세기 27장 – 축복의 대상>
- 이삭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맏아들 에서에게 축복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삭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했어야 했던 방식보다는, 본능적인 애정에 따라 처리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말미암은 척도에 의해서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부터 솟아나는 척도에 의하여 행동하기가 쉽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가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 리브가는 에서에게 주기로 된 축복을 야곱에게 주려고 궁리한다. 왜냐하면 리브가는 하나님이 예언하신 말씀대로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녀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이삭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기에 리브가는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기의 남편이 하나님의 예언 말씀을 훼방하려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리브가는 에서의 옷을 야곱에게 입혔다. 그것은 에서가 복을 받을 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즐거움의 표로 입으려고 한 제일 좋은 옷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삭은 이것이 에서의 것이라는 것을 옷감이나 옷의 모습이나 냄새로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으려거든 우리의 많은 믿음의 형제들 중에서도 첫째 형인 그리스도께서 입고 있던 정의의 의복을 입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이삭도 그를 축복하게 된 것이다. 이삭이 잘 모르고, 실수로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 것은 섭리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보면, 야곱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것이지 이삭에게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삭은 처음 자기가 기만당한 것을 알았을 때, “심히 크게 떨었다”고 했다(33절). 하나님의 뜻이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당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되찾고, 그가 야곱에게 내려 준 축복을 인준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신 바를 깨달은 것이다.
- 이삭은 자기 자신의 기대와 애정에 어긋나는 것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복종하였다. 그는 에서에게 복을 주기로 작정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 뜻에 복종했던 것이다. 그는 전에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을 위해 간청했을 때처럼 ‘믿음으로’(히 11:20) 이 일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것을 가지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행할 수 없겠는가? 이로써 에서는 자기가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후에도 여전히 자기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온, 그 특별한 축복에 대한 기대를 이제는 완전히 상실했다.
- 여기서 우리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롬 9:16). 에서는 축복을 향하여 좇아갔다. 그러나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을 야곱에게 주시기로 한 것이다. 즉 택하심에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서게 하려 하신 것이다(롬 9:11). 유대인들은 에서와 같이 의의 법을 추구하여 사냥을 갔으나(롬 9:31) 의의 축복을 놓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되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롬 9:32). 그러나 이방인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그 축복을 획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