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3장 – 아비야와 전쟁>
- 아비야의 어머니는 마아가라고 하는 압살롬의 딸이었다(대하 11:20).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엘의 딸, 미가야라고 한다. 그 여자는 아마 압살롬의 딸 다말에게서 난 그의 손녀이며, 그녀의 직계 아버지는 여기서 말하는 대로 우리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삼하 14:27). 그러나 이런 문제보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의 전투장으로 나가는 아비야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자. 하나님은 르호보암에게 허락치 않으셨으나(대하 11:4) 아비야에게는 여로보암과 개전하도록 승낙하셨다. 이때는 아마 여로보암은 침략자였을 것이고, 아비야가 행한 것은 부득이한 자기 방어였을 것이다. 르호보암보다 오래 살았던 여로보암은 유다의 왕관은 잔존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권리 주장을 하면서 이제 막 위에 오른 이 어린 왕에게서 적어도 왕권이나마 빼앗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 뻔뻔스런 주장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아비야의 용맹이었고, 또 하나님도 그의 편이 되어주셨다. 르호보암이 자기의 열 지파를 회복하고자 시도하였을 때에는 여로보암의 행동이 정당했고, 따라서 르호보암에게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여로보암의 인간된 모습, 곧 그가 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제사장들을 축출한 것을 본 이상, 아비야에게 여로보암을 징벌할 수 있도록 허락이 내린 것이다. 또 아비야의 행동에는 그 이상의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반하여 르호보암은 열 지파의 완전한 환원과 다름없는 일을 겨냥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로보암의 군대는 아비야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두 배였다(3절). 여로보암은 군대를 징벌할 지파가 열이었던 반면, 아비야에게는 두 지파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쌍방의 군대에 대해서는 이르기를, 저희는 “강대한 자요, 택함받는 자들이며 용맹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군대가 80만명에 이른 반면 유다 군대는 단지 40만 명이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쪽이 승리자로 판명되었다. 전투란 꼭 강한 자에게 승리가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다수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야는 저들과 싸우기 전에, 비록 그들이 다윗 가문으로 귀속하지는 않더라도(이 문제는 하나님의 결정으로 해결된 것이었기에 그는 묵인하였다) 다윗 집안을 대적하여 전쟁하는 것만은 단념하라고 조리있게 따지며 설득하였다. 그는 저희가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지 말고 최소한 저희가 그 가진 것에 만족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아비야는 군대를 이끌고 그들 나라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는 이 연설을 에브라임 산중의 한 언덕 위에서 행했기 때문이다. 그 언덕 위에서 말을 하면 여로보암과 그 주요 장교들에도 아비야의 말이 들릴 수 있었고, 그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면 조약을 맺기를 바랐을 것이다. 위대한 장수들은 그 부하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는 게 상례인데, 아비야의 이 연설은 그런 의도도 다소 띄고 있었지만, 주로 여로보암과 모든 이스라엘을 생각하여 한 말이었다.
- 자기 전술에 의지하였던 여로보암은 참패하였다. 그는 사리를 온당하게 따질 줄은 도무지 몰랐으므로 결국 온당한 전투에 대처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여로보암이 아비야의 열변에 대해 혹독한 경멸감을 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협상이 타결되고 있었으나(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여로보암은 야비하여 그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는 협상하는 일면 모든 전쟁 관례에 어긋나게도 유다의 배후에 복병을 매복시켰던 것이다. 종이 통치를 한다고 해서 무슨 영예를 기대할 수 있겠으랴? 아비야는 말로 화평을 원했으나, 그들은 싸움을 원했다(시 120:7). 아비야와 그 백성들은 저희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저희의 힘과 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정복자가 되었다. 저들은 지독한 궁지에 몰리게 되어 큰 놀람을 당하였으니, 전투가 전면과 후면에 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저희가 놀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승리하도록 지정된 자라도 잠깐 동안은 당혹과 고통에 휩쓸릴 수가 있다.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다. “저희가 나를 벌떼처럼 에워쌌나이다”(시 118:10-12). 위험이 사면에 깔린 곤고한 때에 저희가 윗쪽이 아니면 어느 쪽을 향해 구원을 바라겠는가? 어떠한 원수라도(가장 강력한 자나 모사꾼도) 또 어떤 전략이나 매복도 우리에게서 하늘과 교통하는 것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하늘로 향한 우리의 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14절). 우리는 저들이 이 전쟁에 임하기 전에도 그렇게 부르짖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들이 당한 환란은 기도를 새로이 불러 일으켰고 하나님께 갈급히 구하도록 재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궁지로 몰기도 하신다. 그것은 저들로 하여금 주께 부르짖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심이다. 간절한 기도는 부르짖음이다. 그들은 저희 열조의 하나님께 의지하였고, 자기들을 도와주실 그의 권능에 의존하여서 스스로를 하나님께 의탁하였다(18절). 믿음의 기도는 응답되는 기도이며,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다(요일 5:4). 그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고함을 질렀다. “이 날은 우리의 승리의 날이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기도의 부르짖음에다 저희는 믿음의 고함을 보태어 질렀으므로 정복자 이상 가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역대하 14장 – 유다왕 아사>
- 아사는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것과 의로운 것” 을 행하였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목적 삼고,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하고자 애썼다. 자신들의 눈이나 세상의 눈에 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것을 행하고자 하여, 규칙대로 걸어가는 자는 복이 있다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눈이 항상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알았고, 게다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선과 정의를 지키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가 하는 일을 통해서 그를 은혜스럽게 열납하셨고, 그의 행위를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승인하셨다. 그가 등극하자마자 곧 착수한 축복된 개혁 사업이 있었다. 그는 우상 숭배를 제거하며 철폐하였다. 솔로몬의 치세 말기에 우상 숭배를 용인한 이래로, 사신 숭배를 억압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는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지반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방신들이 경배되며 그 제단과 그 우상과 산당이 갖춰졌으되, 성전 예배는 비록 제사장들에 의해 명맥을 보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13:10)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소홀히 취급받고 있었다. 아사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그 모든 우상의 제단과 형상들을 훼파시키는 일을 본격적으로 행하였으니(3, 5절) 이것은 그것들이 투기하시는 하나님께 큰 격노가 되었고, 또 그것들이 경솔하고 무분별한 백성에게 큰 유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상들을 파괴함으로써 우상 숭배자들이 개심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가 목적하였던 점은 우상 파괴보다 오히려 이 우상 숭배자들의 개심이었다. 그는 하나님 예배의 순수성을 되살려 내어 확립시켰다. 그리고 그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시중드는 일에 그 본분을 다 하였으므로 백성들도 제 본분을 다 하게끔 했다(4절). “그는 유다에게 명령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되” 이방의 잡신들은 찾지 못하게 하였고, 또 “율법과 계명을 행하게 하였다”. 즉 많은 무리가 완전히 태만히 하였던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다시금 준수하게 하였다. 이 일을 행하매, “그 국토가 그 앞에서 평온하였다고 했다”(5절). 비록 저희가 그 우상에 심히 애착하여 우상 버리기를 아주 싫어했었지만, 저희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저희는 아사의 명령에 동조하게 되었고, 부끄러워서라도 거기에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권세를 잡고 그 권력으로 불경건 근절과 관습의 개혁을 단행하려는 자들은 아마 자기들의 처음에 예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큰 곤란에 직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 아사는 태평성세를 지혜롭게 이용했다. “그 땅이 평안을 누렸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평안을 주셨음이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신다면 그 누가 분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는 말씀을 기억하자(욥 34:29).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는 자는 참으로 평안을 누리며,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주시는 자는 진실로 화평을 누릴 것이다.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다(요 14:27). 아사는 저희가 갖는 평안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가 우리에게 사면팔방 어느 곳이나 다 평안을 주셨다”고 했다. 곧 우리의 몸과 마음, 가족과 국가의 평안을 축복으로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또 그 평안은 지금 착수된 계획의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였으므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고 했다. 섭리자 하나님의 진노와 견책은 사악한 길에 들지 못하게 하는 방책으로 알아야 하듯이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 미소는 선한 사업에 대한 격려의 표시로 알아야 한다. ‘여호와를 찾는 것’이 선한 일임을 체험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 우리가 세상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성가신 것밖에는 당하는 것이 없다.
<역대하 15장 – 하나님의 전갈>
-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복이었다. 저희가 이런 복을 누리는 중에도 우상 숭배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반하여 제2성전 시대에 예언의 영이 끊어지고 구약의 경전이 완성되었을 때는(저희 회당에서 이 경전은 늘 봉독되었다) 저희가 우상 숭배의 물이 들지 않고 순진하였다. 그 이유는 성서가 모든 예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예언의 말씀’ 인 까닭이며, 가장 유력한 예언의 말씀인 연고이다. 교회는 거짓 예언자와 아울러 거짓 성서(위경)에 의해 쉽사리 기만당하지 않는다. 저희가 에티오피아인들과 전쟁에서 개선했을 때 아사와 그의 군대에서 한 선지자가 파송된다. 이는 그로 저희의 성공에 대해 찬사를 돌리며 축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로 그 의무에 충실하게끔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짊어진 본래의 사업인 것이니, 심지어 왕들이나 가장 큰 자들에게까지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에 임하였으니(1절) 이는 그가 마땅히 말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고, 또 그가 분명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저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처해 있는지를 명백히 말하였다. 한 번 승리를 하였다고 모든 전쟁에서 영원히 승리하리라고는 생각지 말자. 그는 저희의 행위들이 선했기 때문임을 인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로 잘 행하게 하라. 그리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반대로 될 것이다.
-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그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것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리라는 위안의 말씀인 동시에 다음과 같이 주의 말씀도 된다. 즉 “만일 네가 그를 찾으면 그는 네게 찾아지리라. 진지하게 그의 은총을 사모하며 목적하라. 그러면 너는 그것을 얻으리라.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이기리라. 그는 너희가 나를 찾아라. 그래도 헛되리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으며, 결코 그렇게는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다”(합 11:6 참조). 그러나 “만약 너희가 하나님과 그의 법도를 버리면 그는 너희에게 매이지 않으시며 정녕코 너희를 버리실 터이니, 그렇게 되면 너희는 파멸이고 너희가 방금 얻은 승리가 너희 안전의 보장이 되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떠나 가실 때는 너희에게 화로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과 그 법도를 저버린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저희 앞에 제시해 주고 또 회개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방법 이외에는 불평의 호소가 해소될 길이 없음을 지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저희 의무를 외면했을 때 저희에게는 무신론과 불경건과 무종교와 모든 불법 행위가 범람하였고(3절) 성가신 일들과 멸망시키는 국내외 전쟁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곤경에 빠졌었다(5, 6절). 그러나 저희가 환난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 왔을 때, 저희들은 하나님을 구한 일이 헛되지 아니 하였음을 발견하였던 것이다(4절).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사사 시대에까지 소급해 말한 것같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전에 이스라엘에는 참 하나님이 없었으니, 이는 저희가 거짓 신들을 섬겼던 때문이다. 또한 그 때는 무지의 시대였다. 비록 제사장은 있었으나 가르치는 제사장은 없었고 장로들이 있었지만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3절). 이 때는 슬픈 시대였고, 저들이 이 원수 저 대적에게 빈번히 압제를 당하였던 때여서, 모압인들과 미디안 족속들, 암몬 족속들 외에 다른 열방들에게 지독하게 고통을 당하였던 시대이다. 그들은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되었다”(6절)고 했다. 그러나 그 곤경의 때에 저희는 회개와 기도의 개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그는 저희를 위해 구원자들을 세우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격언이 실증되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무엇이든 간에 기왕에 쓰여진 것은 우리에 대한 훈계를 위해 기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