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5장 – 법궤의 재이동>
- 이제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올 준비가 되었다. 전에 행한 시도는 매우 선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하였지만, 그들이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고백하고 있다(13절).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 선행을 잘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기 위해 합당한 의식을 행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우리는 마땅한 규례대로 찾아야 한다. 우리가 불규칙한 행실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서 더 질서 정연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징벌을 끝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제 이 문제가 어떻게 시정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다윗은 궤를 옮겨 오기 전에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해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규례대로 구하였다. 그는 집을 지을 시간이 없었으나,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쳤는데(1절), 이것은 아마도 모세가 산에서 보여준 본보기를 따른 것이었거나, 아니면 휘장과 판자로 그 모형에 가깝게 만든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다윗성에 자기 자신을 위한 집을 세울 때에, 법궤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 두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가 어디에 우리의 집을 짓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궤를 위한 곧 교회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 이제 다윗은 레위인이나 제사장들만이 이 궤를 그들의 어깨에 메어 올리도록 명했다. 전에는 그가 전혀 몰랐던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2절). 고핫 자손들에게는 수레를 맡기지 않고 궤를 메고 걸어다니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직임이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민 7:9). 그러나 그들이 요단을 지나 여리고를 돌아갈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궤를 메었다. 이 규칙은 아주 분명했으나, 다윗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궤를 수레에 실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항상 그것을 명심하여 필요한 때에 잘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도 실수하여 죄를 범하나, 그들이 일단 그 사실을 안 후에는 즉시 그것을 고칠 것이다. 다윗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정당화하거나 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만 돌리지 않고 규칙대로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이 죄를 범했음을 고백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3절)-전에는 그러했다 13장 2절-레위인들을 이 의식에 불러 모으는 데 주의를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두 모였는지(4절) 특히 아론 자손이 모였는지 잘 살폈다(11절). 그는 그들에게 엄숙한 임무를 부과했다(12절). “너희는 레위 사람의 족장이니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다른 사람들보다 권세가 높은 자들에게는 그 임무를 행하는 데 있어서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몸을 성결케 하고(14절) 율법에 따라 궤를 그들의 어깨에 멜(15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의무를 태만히 하던 자들도 성실한 충고를 받을 때는 자기들의 잘못을 고치고 더 나아지게 되는 자들이 많다. 웃사에게 내려진 돌변 사건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몸을 성결케 하는 데 유의하도록 하였다. 즉 그들로 하여금 의식적인 타락을 씻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에 마음을 기울여 백성들을 존중하도록 했다. 모범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그것을 보고 예의와 범절을 지키는 자들이 있게 된다.
<역대상 16장 – 다윗의 찬양>
- 하나님의 궤가 다윗이 예비해 놓은 장막으로 무사히 옮겨질 수 있었던 그날은 영광스런 날이었다. 이 선한 사람 다윗은 그것에 크게 마음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 일이 다 이루어기 전까지는 만족하게 잠들 수 없었다(시 132:4, 5). 이제 궤가 놓여진 곳의 환경을 살펴보자. 그곳은 그 전에 있었던 곳보다 더 나았다. 법궤가 전에는 숲으로 둘러싸인 시골에 묻혀 있었지만 이제는 공적인 장소인 왕실이 있는 성읍으로 옮겨져, 모든 사람들이 그곳으로 나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여지껏 보잘 것 없고 깨어진 그릇처럼 무시되어져 왔으나, 이제는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것으로써 하나님께 의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전에 개인의 집에 있는 한 방에서 후대를 받았었지만, 이제는 오직 그 궤만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구석에 몰리지 않고 중앙에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는 잠시 가리워지거나 어둡게 된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그 어둠 속에서 드러나 빛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다음 통치자가 세운 성소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곳이었다. 그것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처소인 장막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에서 때때로 이것에 대한 깊은 애착을 말하고 있다. 다윗은 그 궤를 위한 장막을 끝까지 지켰으므로, 성전을 짓고도 나중에는 법궤에서 등을 돌린 솔로몬보다 훨씬 훌륭하다 할 것이다. 가장 초라했던 시절의 교회가 오히려 가장 순수했던 것이다.
- 다윗은 이제 법궤를 위한 장소가 그의 곁에 고정되었으므로 그의 마음을 편히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관심을 기울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 하였다. 즉 그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였다. 첫째 제물을 드렸다(1절).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사모하여 번제를 드렸고, 그의 은총을 감사하며 화목제를 올렸다. 둘째 노래를 드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또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칭송하며 감사함으로써(4절) 그들이 스스로 축하하기 위해서 레위인들에게 이야기를 노래로 기록하도록 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기뻐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 날의 엄숙한 의식으로 인해서 이 일을 더 잘 기억하게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과 같이, 이 날의 영광을 인하여(3절) 그의 백성들을 관대하게 대할 뿐 아니라(거룩한 기쁨으로 충만한 자는 관대함으로 그것을 나타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아비로서, 예언자로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2절). 그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의 이름으로” 곧 귀중한 영생의 말씀이신 여호와를 통하여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로 온다.
<역대상 17장 – 축복 받은 다윗>
-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온갖 선한 목적들을 격려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단은 다윗의 선한 뜻을 알고는 곧 다윗에게 “가서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도록” 고했다(2절).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 일에서 다윗과 함께 계실 것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은 그를 자신에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은사와 은혜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는 일이 외형적으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되는 것에는 거의 관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궤가 성막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셨으니(5절) 결코 궤를 위한 집을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훌륭한 성읍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었을 때에도(신 6:10) 그러한 명은 하지 않으셨다. 그는 사사에게 백성들을 먹이라고 명한 일은 있어도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하라는” 명은 한 적이 없었다(6절). 우리는 잠시 잠깐 보잘 것 없는 집에서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법궤도 그렇게 했다.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행하려는 일을 막기는 하셨지만, 그 백성들의 선한 뜻을 너그럽게 받아주셨다. 다윗은 이 집을 건축해서는 안 되었다(4절). 그는 그것을 위한 성막을 마련해야 했지만 집을 지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을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왔으되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도록 하는 일은 여호수아에게 남겨진 것과 같았다. 그리스도가 그의 사업의 창시자요 또 동시에 마지막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성전을 세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지위가 헛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너는 성전을 세우는 자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내가 너를 목장에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 너에게는 이 영광으로 족하니 다른 것은 네 뒤에 오는 자에게 남겨두라”고 했기 때문이다(7절). 왜 사람은 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하며, 모든 선한 사업들을 혼자서 완성시키려 하는가? 어떠한 일들은 다음에 계승하는 자들을 위해 남겨 두여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승리를 주시고 명성을 주셨다(8절). 그리고 더 나아가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견고히 세워 그들의 적들로부터 안전하게 해주도록(9절) 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용사로서 그 일에 적합하였으므로 그것이 그의 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아직 한 사람의 군사도 죽여 보지 못한 자에게 남겨 두어야 했다. 또한 그는 그의 선한 계획이 헛된 것이므로 그에 대한 보답을 얻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 일을 훼방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행위였기 때문에, 다윗은 그 일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보답받을 것이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 거기에 이스라엘의 면류관을 더 씌워 줄 것이다”(10절).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받아들여 질 뿐만 아니라, 이처럼 보답을 받게 된다.
- 사무엘서에서는 만군의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라고(24절) 적혀져 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의 이름이 ‘그들의 하나님’ 이며, 그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의 이름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들과의 관계를 충만하게 이루시며, 그들이 기대하는 모든 일들을 행해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나라 저 나라마다 신들이라고 불리워지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앗수르와 애굽의 신들, 또는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 따위, 열방의 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들이 이스라엘에게 대한 신들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런 신들은 이스라엘과 아무 관계도 없는 명목뿐이요 하나의 암호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되신다. 그의 온갖 속성과 능력이 이스라엘의 유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하리니,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인 백성에게는 갑절의 복이 있기 때문이니라.”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사무엘에서는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로 끝맺고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소망을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끝맺는 말이 가장 거룩한 믿음을 표하는 언어로 되어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2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