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의 수많은 보석 중에서도 가장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빛을 발하는 ‘룻기’의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보석으로 연마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숫돌임을 잊지 마십시오.
룻기는 바로 그 숫돌 위에서 갈리고 닦여진 영혼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광채를 발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서사시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고대 근동의 가정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패배한 인간의 절망 위에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복음의 등대’입니다.
룻기는 마치 조율되지 않은 악기들의 불협화음처럼 혼란스럽고 어두운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보십시오! 이 짧은 구절 뒤에 숨겨진 영적 파산을 보십시오.
사사 시대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영적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너지고 거룩한 제단에 먼지가 쌓일 때,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하늘의 징계인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그 흉년이 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점입니다. 베들레헴이 무엇입니까?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오, 슬프도다! 만군의 여호와를 모신 성소의 동네, 그 풍요로운 떡집에 떡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영혼,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의 현주소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떠난 인간은 금으로 치장한 궁전에 살지라도 영혼의 기근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엘리멜렉’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모압으로 떠납니다. 모압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우상의 땅이며 하나님의 언약 밖의 땅이며 이스라엘의 원수의 땅입니다. 엘리멜렉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잠시만 떠나자. 형편이 나아지면 돌아오자.”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잠시는 종종 인생의 비극이 됩니다. 마귀는 항상 이렇게 속삭입니다. “조금만 타협하라.” “잠깐만 돌아서라.” “이 정도는 괜찮다.” 그러나 영혼은 그렇게 조금씩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모압은 하나님 없는 세상,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는 저주받은 가치관을 상징합니다. 엘리멜렉은 흉년을 피하려다 생명의 근원을 잃었고, 육신의 떡을 구하려다 영원한 생명을 탕진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위험을 보여줍니다.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십 년쯤 지나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집안에 남은 것은 세 여인의 곡소리와 세 개의 무덤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이 길로 오면 더 편안할 것이다. 이 직장을 택하면 더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번영은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아서, 하나님의 진노의 파도가 한 번만 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잠시 떠난 것은 내 인생을 더 잘 꾸려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들이 십 년 뒤에 들고 온 것이 무엇입니까? 빈 주머니, 병든 육신, 깨어진 가슴, 그리고 씻을 수 없는 회한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십 년을 번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하루를 사는 것이 백배 천배 더 유익함을 명심하십시오! 나오미의 품에 남은 것은 텅 빈 곳간과 이방인 며느리 둘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파산한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의 잿더미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기적 같은 소식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할렐루야! 베들레헴에 다시 떡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회복의 뉴스가 아닙니다. 이것은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자비의 얼굴을 돌리셨다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나오미는 이 소식을 듣고 비로소 영적인 잠에서 깨어납니다. “내가 여기서 죽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고통의 가시밭길로 밀어 넣으십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형통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고약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채찍이 등을 때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그 환난은 사실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거룩한 ‘몰이꾼’입니다. 고난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등 떠밀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은총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발길을 돌릴 때, 두 며느리도 동행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들을 시험합니다. “나를 따라오지 마라. 내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너희는 너희 신들에게로 돌아가라.”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첫째, 오르바의 신앙입니다. 그녀는 울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꼈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의 목을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입맞추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르바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룻 1:15).
그녀의 눈물은 감상적이었으나 의지적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강단 아래에도 이런 ‘오르바’들이 넘쳐납니다. 설교를 들으며 “아멘”을 외치고, 찬양의 선율에 가슴을 떨며, 기도를 하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러나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의 발걸음은 다시 세상의 우상에게로 향합니다. 감정의 파도는 높았으나 인생의 닻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감정만 있는 신앙은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둘째, 룻의 신앙입니다. 룻은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오미를 ‘붙쫓았습니다’. 이 ‘붙쫓다’는 단어는 창세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한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뗄 수 없는 결합입니다. 룻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나님께 해드리는 위대한 헌신입니다. 룻의 선택이 얼마나 무모해 보이는지 아십니까?
그녀는 자신의 젊음을 버렸습니다. 고향의 안락함을 포기했습니다. 미래의 재혼 가능성도 내던졌습니다. 유대 땅에 가면 이방 여자로서 평생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룻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이익이 올 때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낭떠러지가 보여도, 그분이 계시기에 기꺼이 발을 내딛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마라(쓴 것)라 부르라”는 나오미의 절규 속에서도, 룻은 그 쓴잔을 함께 마시기로 결정했습니다. 편리함을 좇는 신앙은 마귀의 먹잇감이 되지만, 전적인 헌신으로 무장한 신앙은 하나님의 심장을 움직입니다.
룻은 하나님을 선택했고, 하나님은 그 여인을 통해 다윗의 가문을 세우고 메시아의 족보를 잇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패를 선언합니다. “나는 비어 돌아왔다. 전능자가 나를 치셨다.”
그녀는 스스로를 ‘버림받은 자’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영광스러운 반전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이미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통해 ‘보아스’라는 유력한 구속자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나오미가 흘린 그 쓴 눈물은 장차 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그 ‘쓰라린 고통’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마라’는 장차 올 ‘나오미’의 기쁨을 더 찬란하게 만들기 위한 배경색일 뿐입니다.
룻기가 시작된 곳이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입니다. 그리고 수백 년 후 같은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베들레헴의 떡집에서 세상의 참된 떡이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붙잡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온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결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룻기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흉년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획하십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속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의 삶이 나오미의 ‘마라’처럼 쓰게 느껴질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