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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행복신앙연구소</title>
		<link>http://www.bog.or.kr</link>
		<description></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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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119. 하나님의 주권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순종 (대하 21~2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62]]></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다 역사의 가장 칠흑 같은 밤을 조명하며, 그 어둠조차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과 그분의 계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찬양하고자 합니다. 인간의 반역과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 이면에는, 단 한 순간도 통치권을 놓지 않으시는 여호와의 강한 손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먼저 우리는 유다 왕들의 타락과 아달랴의 광기를 보며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 악행을 내버려 두시는가?”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심판의 과정이며, 동시에 더 큰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거룩한 기다림입니다.

여호람이 아합의 길을 따르고 자기 형제들을 도륙했을 때, 그는 자신이 왕좌를 공고히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셨다고 기록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악을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의 결과조차 당신의 공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아달랴가 왕의 씨를 진멸하려 했을 때, 그것은 가문의 비극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사탄은 아달랴의 손을 빌려 메시야의 계보를 끊으려 했으나, 하나님은 비웃으셨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치밀하게 음모를 꾸밀지라도, 여호와의 작정은 결코 변개치 않습니다.
<strong>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strong>

왕궁의 피바람 속에서 요아스라는 한 불씨를 남겨두신 것은 하나님의 ‘우연한 자비’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획된 ‘필연적 주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 뒤에 계신 분이 아니라, 무대 위 모든 배우의 발걸음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지휘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이 역사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실체,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립시다. 하나님의 주권이 하늘에서 선포된 엄위함이라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 땅에서 완성된 하나님의주권에 대한 거룩한 응답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의 손에 의해 수동적으로 보호받았으나,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능동적인 순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에 기꺼이 동참하신 자발적 복종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세상 영광을 보여주며 주권을 찬탈하라고 유혹할 때에도,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공포가 엄습할 때, 주님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자신의 뜻을 완전히 굴복시키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순종은 아달랴의 반역보다 강했습니다. 아달랴는 죽여서 빼앗으려 했으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요아스의 생존은 다윗 왕조의 연장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순종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설계도 위에,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벽돌이 쌓여 우리가 거할 영원한 처소가 마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나태함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만이 가장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6년 동안 숨죽여 기다리던 제사장 여호야다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았을 때 목숨을 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레위 사람들과 방백들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켰습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다스려야 할지니라!” 이것은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실현하려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왕에게 기름을 붓고 면류관을 씌울 때, 그것은 하늘 보좌의 통치가 유다 땅에 가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달랴가 “반역이로다”라고 외치며 옷을 찢었으나, 그것은 이미 패배한 자의 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자에게 세상의 위협은 한낱 아침 안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기로 작정하신 자를 누가 무너뜨리겠으며, 하나님이 닫기로 하신 문을 누가 열겠습니까? 참된 회복은 단순히 왕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호야다는 백성을 이끌고 바알의 신전을 헐었습니다. 제단을 부수고 우상의 제사장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적용되어야 할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린 ‘바알’을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실 때, 비로소 성읍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지도자는 죽음과 수치와 재앙을 불러왔으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종하는 자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권을 쥐고 있을 때는 늘 불안과 두려움뿐이지만, 만군의 여호와께 주권을 이양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폭풍우 속에서도 잔잔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듯 보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진리가 짓밟히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보좌에서 내려오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아달랴의 칼날 끝에서도 요아스를 지키셨고, 헤롯의 학살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보존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부활의 승리를 끌어내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권 앞에 기꺼이 무릎 꿇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으십시오. 누구와 연합하시겠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권력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입니까?

당신 마음의 아달랴를 오늘 처단하십시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당신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질서가 당신의 가정과 일터와 영혼에 회복되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평강이 강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당신의 피난처요, 그리스도의 순종은 당신의 승리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Wed, 29 Apr 2026 06:15:4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8. 영혼의 갑옷의 작은 틈과 승리의 비결 (대하 18~20)]]></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61]]></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침투하는 가장 교활하고도 치명적인 적, 즉 ‘타협’이라는 이름의 독버섯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합니다. 우리 영혼을 향해 사자처럼 포효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타협은 거룩한 포도원을 허는 가장 달콤한 유혹입니다. 여호사밧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였고, 그의 손은 유다 전역의 우상을 타파하는 데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빛나던 영혼의 갑옷에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북이스라엘의 가증한 왕, 아합과 손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사탄은 결코 처음부터 우리를 타락의 불길로 밀어 넣지 않습니다.

사탄은 ‘정치적 지혜’와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가면을 쓰고 찾아옵니다. 여호사밧의 눈에는 아합과의 연합이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묶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신의 한 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법정에서 그것은 명백한 배교이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세상의 소리에 속지 마십시오. 거룩함이 거세된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영적인 수치입니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단 말입니까!

신앙인이 세상과 멍에를 같이 메는 순간, 그의 영적인 권능은 증발하고 맙니다. 타협은 천천히 흐르는 독약과 같아서, 우리가 깨닫기도 전에 영혼의 맥박을 멈추게 합니다. 특히 이미 결정된 마음으로 묻는 기도는 형식적 신앙의 기만입니다.

아합의 부추김에 여호사밧은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하러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찔렸던 그는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위선입니까!

보십시오. 그의 발은 이미 아합의 전차 곁에 서 있고, 그의 군대는 이미 출정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나님께 묻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수많은 교인이 빠져 있는 ‘형식적 신앙’의 덫입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이익을 계산했고, 이미 자신의 정욕대로 결정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주여, 주님의 뜻을 보여주소서!”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결정에 추인이나 해주는 서기 정도로 취급하는 오만입니다!

입술은 시온의 대로를 노래하지만 발은 바벨론의 진흙탕을 밟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위선된 기도입니다. 아합의 궁정에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올라가소서, 승리하리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다수가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의 합창 뒤에는 언제나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거짓의 영’이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단 한 사람, 미가야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총애도, 백성의 박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뺨을 맞는 수모와 감옥의 고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쳤습니다. “내가 보는 것,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을 말하리라!”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의 표식입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진리를 희석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복음의 날을 무디게 만들지 않습니다. 미가야는 여호사밧에게 직언했습니다. “당신이 아합과 함께 가면 죽음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기 전에 먼저 찌릅니다.

진리는 우리의 자아를 박살 내고 우리의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 자존감을 높여주는 말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께 선포합니다.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 복음은 당신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사밧은 미가야의 경고를 들었지만, 결국 세상의 체면과 아합과의 의리 때문에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진리를 알고도 따르지 않는 것, 이것보다 더 비참한 영적 파산은 없습니다. 결국 아합은 전사했고, 여호사밧은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모압과 암몬의 대군이 유다를 삼키려 밀려옵니다. 이제 여호사밧은 과거의 실패를 통해 처절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방 나라에 사절단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즉시 성전으로 달려가 온 백성과 함께 엎드립니다.

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는 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오나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항복입니까! 믿음은 나의 ‘자신감’을 키우는 심리 훈련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의 철저한 무능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전능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해지려고 발버둥 칠 때 하나님은 뒷짐을 지고 계시지만, 우리가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바닥에 엎드릴 때 만군의 여호와께서 당신의 칼을 빼 드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카드를 모두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계산기를 부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빌려 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항복’을 통해 당신의 삶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찬양의 군대는 논리를 초월하는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명확했습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말씀을 믿은 여호사밧의 행동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군대 앞에 칼과 방패를 든 용사가 아니라, 거룩한 예복을 입은 찬양대를 앞세웠습니다.

세상의 군사 전략가들이 보기에 이것은 자살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눈에 보이는 적군보다 그들 위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양을 터뜨리는 순간, 하늘의 복병이 일어났습니다!

원수들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여 자멸했습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전쟁의 가장 강력한 대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눈물로 시작된 골짜기가 ‘브라가(송축)의 골짜기’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한숨을 노래로 바꾸시고, 당신의 패배를 전리품의 축제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여호사밧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말년에 또다시 세상과 연합하려다 하나님께 책망을 듣고 공들여 만든 배가 파선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리 주님은 당신의 마음 일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음의 보좌 전체를 원하시고 당신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나누고 있는 ‘아합’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하나님 몰래 손잡고 있는 세상의 ‘조약’은 무엇입니까? 그 손을 놓으십시오. 타협의 배를 부수십시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향해 돛을 올리십시오. 두려움을 내려놓고 찬양으로 전진하십시오.

<strong>“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대하 20:30)</strong>

평강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얼굴에 평강이 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등진 얼굴에 평강이 떠나는 것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ue, 28 Apr 2026 05:23: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7.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대하 15~17)]]></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60]]></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단순히 유다 왕들의 역사를 읽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지금도 찾고 계시는 사람, 곧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선지자 아사랴는 왕 아사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도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이 말씀은 단순한 격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철칙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나, 인간은 방향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명심하십시오! 항상 문제는 하나님이 멀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멀어지는 것입니다. 

아사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찾았으나, 우리 주님은 말씀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사는 하나님을 찾아 나아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우리를 찾아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아사가 제단을 회복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아사의 평안은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이 멈춘 일시적 평안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죄와 사망의 법을 깨뜨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영원한 평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음성이 오늘 여러분의 불안한 심령을 잠재우길 축원합니다! 아사가 우상을 찍어내고 태후 마아가를 폐한 결단은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외치셨습니다. 아사가 외적인 우상을 제거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탐욕과 자기 의라는 우상의 뿌리를 도끼로 찍어내십니다.

아사는 자신의 혈연인 할머니를 폐위시켰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선언하시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정립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배우자,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내 자존심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그것들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적당한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전부’를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전심을 요구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아사의 비참한 퇴장을 봅니다. 그는 35년의 성공 끝에 사람을 의지했고, 책망하는 선지자를 가두었으며, 병들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우리 안에는 ‘나를 의지하려는’ 독버섯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공생애의 시작부터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끔찍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전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구하셨습니다. 아사는 위기 앞에서 성전의 보물을 아람 왕에게 주어 목숨을 구걸했지만, 우리 주님은 하늘의 모든 보화를 가진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아사는 책망을 듣고 노하였으나, 주님은 침 뱉음과 채찍질 속에서도 묵묵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아사는 병들었을 때 하나님보다 의원을 더 찾았으나, 예수님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외치며 완전한 의탁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때, 아사의 실패를 보며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여호사밧은 율법책을 들고 백성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나라를 강성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참된 교사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여호사밧은 율법책을 보냈으나,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여호사밧의 사자들이 유다 성읍을 순행하며 가르쳤듯이, 주님은 갈릴리와 온 유대를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여러분, 여호사밧 시대에 말씀이 바로 설 때 대적들이 두려워 떨었듯,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사탄의 권세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강함은 군사력이나 재물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말씀의 능력, 곧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아사와 여호사밧의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 한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고 계십니다. 누구를 찾고 계실까요? 아사처럼 시작만 좋은 자가 아닙니다. 여호사밧처럼 외적인 평안에 안주하는 자도 아닙니다. 자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견고할 것입니다. 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서투릅니까? 그러면 당신에게 먼저 찾아오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먼저 당신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당신 안에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삶을 복되게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의 길이요, 참된 축복의 삶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Mon, 27 Apr 2026 05:59: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6. 강할 때 무너지고 약할 때 세워지는 존재 (대하 11~14)]]></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9]]></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매우 불편하지만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진리를 다루려 합니다. 사람은 약할 때 하나님을 찾고, 강해질 때 하나님을 버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깊은 비밀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그 사실을 칼날처럼 드러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다” 여러분, 이 한 문장은 하나의 비극입니다. 그는 약할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위기 속에서 그는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세우셨습니다. 나라가 견고해졌습니다. 성벽이 높아졌습니다. 적들이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고난 속에서는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형통 속에서는 기도를 잊습니다. 궁핍할 때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풍족해지면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조심하십시오. 당신의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실패의 때가 아니라, 성공의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힘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잘될 때 하나님을 떠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진리를 봅니다. 사탄은 고난으로 우리를 죽이지 못하면, 번영으로 죽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무릎 꿇게 만듭니다. 그러나 번영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등지게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지만 번영은 우리의 눈을 자신에게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번영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이 있습니다.

번영은 영혼을 잠들게 하는 마취제입니다. 이제 정직해집시다. 르호보암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보십시오. 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은혜로 시작합니다. 눈물로 시작합니다. 헌신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끝냅니다. 습관으로 신앙을 대체합니다. 형식으로 예배를 대체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여러분,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십시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도 잘 살고 있는가?”

더 깊이 들어갑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떠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너는 실패했다!” 양심은 말합니다. “너는 변했다!” 삶은 증명합니다. “너는 끝까지 가지 못한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패를 본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르호보암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시삭이 올라옵니다. 적이 성문 앞에 서 있습니다. 위기가 다시 찾아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뜨리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갑작스러운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은 심판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비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회개의 시작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내가 틀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회개조차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마음을 굳게 하여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회개했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죄를 짓고 후회하고 다시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회개조차 끝까지 유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복음이 폭발합니다. 이제 르호보암을 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르호보암은 강해지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해지셨을 때도 순종하셨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단순한 죽음의 외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승리의 선언입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죄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가 덮여졌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셨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셨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와 사망을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강해져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약해져라,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당신은 별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위험한 때에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약합니까? 소망을 가지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찾기에 좋은 때에 있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경험입니까? 자신의 능력입니까? 자신의 신앙입니까? 그것은 모두 무너집니다.

오직 하나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이 말씀은 지금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해오셨습니다. 당신의 강함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붙드십시오.

강함은 하나님보다 당신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강함은 실제는 영적 약함이고 약함은 실제는 영적 강함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기의 약함을 귀하게 여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strong>“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후 12:10)</strong>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un, 26 Apr 2026 05:21: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5. 은혜의 절정과 비극의 심연 (대하 7~10)]]></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8]]></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단순히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해묵은 역사 기록을 들춰보러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지식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오셨다면, 차라리 도서관으로 가십시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불길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정결케 하길 원하신다면, 오늘 이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경고의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극명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여 인간의 모든 활동이 멈춰 선 ‘은혜의 절정’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교만이 하늘을 찔러 나라가 조각조각 찢어지는 ‘비극의 심연’입니다. 

이 여정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그리고 이 교회의 운명을 비추는 거룩한 거울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의 양심에 무엇이라 속삭이시는지, 그 엄중한 음성에 영혼의 귀를 여십시오!

보십시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갑자기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제물들을 송두리째 삼켜버렸습니다! 오,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광경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자연법칙을 어긴 초자연적 마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창조주께서 “내가 네 예배를 기쁘게 받았다!”라고 도장을 찍으신 확증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냉혹하게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매주일 화려한 옷을 입고, 장식된 성경책을 들고, 잘 훈련된 찬양대의 노래를 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에 ‘불’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아무리 금으로 치장하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했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저 차디찬 죽은 예배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제단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불이 타고 있습니까? 

죄를 미워하는 회개의 불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정욕이라는 찬물이 끼얹어져 식어버린 재만 날리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세련된 형식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 타오르는 제물을 찾으시는 분입니다! 불붙지 않은 제물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불이 내린 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참된 부흥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활동이 멈추고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드러나시는 순간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의 늪에 빠집니다. 사람이 수천 명 모이면 그것이 부흥인 줄 압니다. 재정이 넘쳐나고 프로그램이 시계태엽처럼 매끄럽게 돌아가면 그것이 성공인 줄 압니다. 천만에요!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할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설교자의 웅변도, 찬양대의 기교도 멈추고, 오직 여호와 앞에 모든 인간이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여러분, 이 고백이 감정적인 흥분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폭풍우 속에서도 배를 지탱하는 닻과 같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자는 인생의 어두운 밤에도 절망의 독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아는 자는 천 번을 넘어져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 만 번을 다시 일어납니다!

그 깊은 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약속 중 하나를 선포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이 말씀은 까다로운 조건부 계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탕자에게 가르쳐주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즉 ‘회복의 지도’입니다. 스스로 낮추는 것은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예의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존심과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련한 자기 의를 십자가 앞에 배설물처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과의 선을 끊어버리는 절연체이지만,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손’만 구합니다. “하나님, 돈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 내 자식을 성공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선물’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구하길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의 지갑이 아니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듯,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영혼의 호흡입니다. 숨 쉬지 않는 자가 시체이듯,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영적 생명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역사는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던집니다. 솔로몬의 영광이 극에 달했을 때, 즉 시바 여왕이 찾아와 “내가 들은 것은 절반도 안 된다”며 혀를 내두를 때, 비극은 이미 그 문틈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성공은 축복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험입니다. 여러분의 재산이 늘어날 때,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때, 사람들의 칭송이 들려올 때, 그때가 바로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웠으나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는 금이 쌓였고 마구간에는 병거가 가득했습니다. 겉으로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으나, 속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의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쌓아 올린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시대가 바뀌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노인들은 조언했습니다. “왕이 먼저 백성의 종이 되십시오. 그들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영원히 왕을 따를 것입니다” 참된 권위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왕이 되신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러나 르호보암은 교만의 독기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자들의 어리석은 조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한 본성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더 강한 힘으로 누르고 싶어 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내가 가장이다, 내가 어른이다”라는 권위주의로 가족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직분을 따라 자기주장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만은 분열의 씨앗이요, 겸손은 연합의 토양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대하의 파노라마를 통해 우리 자신의 영적 주소를 확인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살아있는 제단 위냐, 아니면 이미 꺼져버린 차가운 잿더미 곁이냐?”

“너는 섬김의 종으로 살고 있느냐, 아니면 전갈 채찍을 휘두르는 르호보암의 길을 가고 있느냐?”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다시 불을 구하십시오! 

형식에 치우친 죽은 예배를 던져버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성령의 불길이 여러분의 심령을 태우시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 낮아질 수 없다면, 이미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at, 25 Apr 2026 05:18: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4.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성전 (대하 4~6)]]></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7]]></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대하 4장에서 6장까지를 바라보되, 단순히 옛 건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거룩한 긴장을 목격하려 합니다. 이것은 건축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누가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그 안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기구들을 만듭니다. 놋 바다, 금 등잔대, 진설병 상, 향단... 모든 것이 정교하고, 모든 것이 값비쌉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금으로 덮었다고 해서 죄인이 거룩해집니까? 

정교한 기구들이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화려함은 오히려 한 가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너는 그렇지 않다” 특히 놋 바다를 보십시오. 제사장은 그 앞에서 끊임없이 씻어야 했습니다. 왜입니까? 

단순히 깨끗해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씻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의 현실입니다. 죄는 가벼운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요구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아무리 씻어도 다시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손을 씻고, 발을 씻고, 다시 씻고 ... 그러나 마음은 어떻습니까? 양심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중심은 어떻습니까? 더럽혀진 채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놋 바다 앞에서 반복적으로 씻고 있습니까!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선행을 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깨끗하지 않다” 이 절망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늘이 열립니다.

갈보리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아래로 흐르는 또 하나의 바다가 있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놋 바다는 반복되어야 했지만, 이 보혈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놋 바다는 외형을 씻었지만, 이 보혈은 양심을 씻습니다.

놋 바다는 더러워졌지만, 이 보혈은 결코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묻겠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놋 바다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 아래 서 있습니까? 이것이 영생과 멸망을 가르는 질문입니다.

이제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금 등잔대가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이 없으면 성소는 완전한 어둠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왜 성전 안은 그렇게 어둡습니까? 창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스스로 빛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등잔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빛이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이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나 없이 너는 완전한 어둠이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혼란스럽습니까? 방향을 잃었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인생은, 아무리 성공해도 여전히 어둡습니다. 이제 진설병 상을 보십시오. 항상 떡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떡은 썩습니다. 먹어도 다시 배고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세상의 모든 만족은 결국 다시 배고픔으로 끝납니다. 돈도, 명예도, 관계도... 잠시 채우는 듯하다가 다시 공허해집니다. 왜입니까? 영혼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5장으로 가면, 놀라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언약궤가 성전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성전에 가득합니다.제사장들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느낌’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진짜 예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인간은 사라진다. 여러분의 예배에는 이 하나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음악과 분위기만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없이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성전 없는 제사입니다. 이제 6장으로 가면, 솔로몬이 기도합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혹시 그들이 죄를 범하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봅니다. 인간은 반드시 죄를 범한다.

솔로몬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벽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회개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을 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솔로몬은 죄를 예상했지만,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솔로몬은 용서를 구했지만, 그리스도는 용서를 이루셨습니다. 솔로몬은 기도했지만,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들으십시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 영광의 구름, 그 성전을 가득 채웠던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건물 안이 아닙니다. 성지에도 아닙니다. 여러분 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바깥에서 서성이는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성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전히 겉모양만 꾸미고 있습니까? 아직도 놋 바다만 붙잡고 있습니까?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그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빛으로 살으십시오.

솔로몬은 성전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멀리서 응답을 기다렸으나,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서 함께 기도하십니다.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지십시오. 그리하면 솔로몬의 성전에 임했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 당신의 심령 위에 머물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당신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아직도 종교의 놋 바다 앞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 아래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없이 서 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서 있습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24 Apr 2026 05:29: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3. 은혜를 끝까지 누리게 하는 십자가 은혜 (대하 1~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6]]></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장 찬란했던 새벽, 솔로몬의 통치 초기라는 거룩한 지평선 앞에 서 있습니다. 보십시오!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어디입니까? 병기창입니까? 세무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기브온의 산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솔로몬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적을 제거하거나 군대를 소집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오, 이 얼마나 장엄한 광경입니까! 제단의 불꽃이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를 때, 그의 마음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타올랐습니다.

그는 왕권을 얻었으나 권력의 안정을 먼저 구하지 않았고, 백성의 지지를 먼저 확보하려 하지 않았으며,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 장면은 모든 신앙인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첫 행동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을 드러내는 시험이며 동시에 은혜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실 것을 아시지만, 인간이 무엇을 구하는지를 통해 그 마음의 방향을 드러내십니다. 솔로몬은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중심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는 장수도 구하지 않았고, 부도 구하지 않았으며, 원수의 생명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재판하고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신앙은 자기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뜻의 수행을 위한 준비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위치를 특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책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이 누리려 하지 않고, 더 바르게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중심을 보시고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더하여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것들을 넘치도록 더하십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동시에 경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와 축복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끝이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몬의 시작을 보며 은혜를 배우는 동시에, 그 은혜를 끝까지 지키는 참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후 병거와 마병을 모으고 은금을 풍부하게 하며 왕국을 견고하게 세워갑니다. 

그의 부와 권세는 주변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번영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스스로 축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을 자랑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축복의 근원을 잊은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축복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2장에 이르면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준비합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자 합니다. 그는 두로 왕 히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레바논의 백향목과 숙련된 장인을 요청합니다. 이 과정에서 솔로몬은 매우 중요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고 선포하며, 동시에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어찌 능히 주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신앙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인간은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만드는데 솔로몬은 이를 철저히 경계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낼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태도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공동체적 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성전은 한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협력과 헌신이 모여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헌신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는 분이지만,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 3장에서는 드디어 성전 건축이 시작됩니다. 그 장소는 예루살렘 모리아 산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던 자리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심판이 멈추는 것을 경험하고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곳이나 선택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구속의 역사가 담긴 자리를 사용하십니다.

솔로몬은 그곳에서 성전을 건축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공간을 세워갑니다. 성전의 구조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지성소와 성소가 구별되고, 금으로 입히고, 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거룩함 사이의 간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거룩함은 결코 타협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정결함과 속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장면이 더 큰 실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였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해결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제한적이며, 반복적인 제사는 완전한 속죄를 이루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전은 장차 이루어질 더 완전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 한 가지 엄숙한 사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시작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했고,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은혜의 자리에서 끝까지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의 지혜도, 그의 축복도, 그의 경험도 그를 끝까지 붙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은혜를 스스로 지켜낼 능력은 없습니다. 그 지혜의 왕이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 영광의 왕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처음 은혜를 주시는 것도 십자가요, 그 은혜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결심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솔로몬이 아닌, 그보다 더 큰 왕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공허가 마음에 밀려와 왔습니까? 은혜의 공백이 느껴지신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 받았던 그 날을 기억하십시오! 

죄로 인한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절망하던 그날, 십자가를 붉게 적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당신을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환희 가운데 이끌지 않았습니까? 그날 세상 무엇이 부러웠고, 그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 십자가로 돌아가십시오! 그때 받은 첫 사랑과 은혜를 다시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시작된 은혜가 지금도 당신 마음을 흐르게 하십시오! 그 은혜는 당신에게 영원한 나라와 끝없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잊을 때 모든 것이 은혜로부터 멀어지지만, 그 은혜를 기억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은혜를 붙드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은혜가 당신을 끝까지 붙들 것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hu, 23 Apr 2026 05:13: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2. 창세 전에 설계된 영원한 나라의 성도 (대상 27~29)]]></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5]]></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는 각 달마다, 각 지파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자기 백성을 안개 속에서 방황하게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쩌다 보니 흘러온 우연의 산물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 서 있는 그 고통의 자리, 혹은 그 눈물의 골짜기, 혹은 무명의 들판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손가락이 지목하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실수로 사람을 배치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왜 나는 저 화려한 예루살렘 성벽 위가 아니라, 먼지 날리는 변방의 초소에 서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위대한 건축가는 가장 낮은 곳의 주춧돌을 놓을 때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당신이 이름 없는 병사로 불침번을 서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대장 되신 예수께서 당신을 믿고 그 요충지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주권자의 결정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보다 더 안전한 요새는 우주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거기 두셨다면, 그곳이 바로 은혜의 보좌로 통하는 문입니다. 28장에 이르면 우리는 인간의 거룩한 열망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멈춰 서는 장엄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어 불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귀한 열정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너는 아니다” 오, 이 말씀이 우리의 교만한 자아를 얼마나 아프게 찌릅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려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인간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워집니다. 왜 다윗은 거절당했습니까? 그는 피를 많이 흘린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엄위함을 봅니다. 죄악된 손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완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은 거절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네 아들 솔로몬이 내 집을 건축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참된 평화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성전을 짓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독생자를 통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성전’을 예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공들인 계획이 무너졌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온전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선택하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그 선택은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명령은 당신의 근육을 의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을 대신해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승리 위에 뿌리를 내리라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이제 29장에서 백성들이 드리는 저 찬란한 예물들을 보십시오. 

금과 은과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주목을 끈 것은 금의 순도가 아니라 그들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즐거이’ 드렸습니다. 여러분, 율법은 “드려야 한다”고 명령하며 우리를 채찍질하지만, 복음은 “드리고 싶어 견딜 수 없게” 우리의 심장을 녹입니다. 

채찍이 무서워 바치는 것은 노예의 공납이지, 자녀의 예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즐거이’ 내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대속의 사랑을 맛본 영혼은 이제 다윗과 함께 고백합니다. “주여, 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을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 누군가 주머니에서 나가는 헌금 동전 한 닢에 인색함이 묻어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행하는 봉사에 불평의 기름기가 섞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드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만왕의 왕께서 당신을 위해 물과 피를 쏟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분께 부스러기를 드리며 생색을 내겠습니까? 참된 사랑은 손해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눈먼 영혼이 자신의 전부를 보배로운 구주께 쏟아붓는 거룩한 헌신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은 흔들리는 바다와 같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오늘의 건강이 내일의 질병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변치 않는 하나님의 예정된 말씀 앞에 선 성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당신의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설계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리를 창세 전에 이미 정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당신의 자리가 당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귀한 자리로 빛내줍니다.  

당신의 인생이 비틀거리는 이유는 환경이 척박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의 눈이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리는 하나님의 뜻이요, 당신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당신의 제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 이제 고개를 드십시오! 비좁은 세상과 현실이라는 담장에 갇히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펼쳐질 미래의 풍요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백성들을 통해 눈물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설계하신 영원한 성전의 일부입니다. 당신 스스로와 세상이 보는 당신의 현재 모습이 어떠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빛내는 살아있는 보석들 중 하나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Wed, 22 Apr 2026 05:15: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1. 십자가의 사랑을 흘러보내는 통로 (대상 24~26)]]></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4]]></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대기의 연대기를 지나 갈보리의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역대상 24장부터 26장까지 기록된 그 정교한 직무의 체계는 마치 성막 주위를 에워싼 이스라엘의 진영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질서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황금으로 치장된 법궤입니까? 

아닙니다! 이 모든 구약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실체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이 세운 이 거룩한 질서는 결국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예표하는 거울이며, 그분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영광스러운 직분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입니다.

다윗이 제사장들을 나눌 때 제비를 뽑아 결정한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인간의 야망과 지혜가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한 치의 발붙일 곳도 없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제비라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제비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진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제비 결과에 따라 직무의 자리로 걸어갔듯, 주님도 묵묵히 그 십자가의 잔을 받드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외침은 자기 뜻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 참된 제사장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닥친 고난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리가 초라해 보입니까? 십자가의 제비를 기꺼이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거룩한 순종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되었듯,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인도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우리의 행복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세운 찬양대원들이 ‘예언하는 자들’로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그들이 비파와 수금을 켤 때, 그것은 단순한 선율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의 발자국 소리를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이 노래할 때, 성령께서는 그들의 가락 속에 십자가의 신음과 부활의 함성을 숨겨 두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찬양은 어디서 울려 퍼졌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화려한 성전 낙성식장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골고다 언덕, 비바람 치는 십자가 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라는 거친 나무틀 위에 당신의 온몸을 현(絃)으로 드리셨습니다. 죄악의 채찍이 그분의 등을 연주할 때, 그분은 원망의 소리가 아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용서의 화음을 내셨습니다. 

참된 찬양은 언제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올려지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양이 직접적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중심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과 예술은,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마음에서 흘러나올 때 가장 깊은 영적 울림을 갖게 됩니다. 성전의 문지기들은 거룩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칼날은 서슬 퍼랬습니다. 

“부정한 자는 들어오지 마라! 죄인은 물러가라!” 이것이 구약 성전 문지기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죄인은 감히 거룩한 지성소 근처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문지기들의 파수는 엄격했고, 그 문은 절망만큼이나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스스로 찢겨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과거의 문지기들이 거룩을 보호하기 위해 문을 닫았다면, 십자가의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을 열어 문을 만드셨습니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 10:9).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이제 가장 비천한 죄인이라도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기만 하면 지성소의 영광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거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품으시는 최고의 문지기이십니다.

또한 재정과 창고를 맡은 자들이 하나님의 곳간을 지켰듯, 우리 주님은 하늘의 모든 보화를 관리하시는 청지기 중의 청지기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보물을 홀로 누리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라는 보물 창고가 터져 나오는 현장입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주님은, 당신의 생명이라는 가장 귀한 보물을 십자가 위에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우리를 하늘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보다 더 신실한 충성을 누가 보였겠습니까? 

그분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주인 되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분께, 하나님은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역대기의 이 긴 명단은 결국 갈보리 언덕 아래에서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제사장의 순종도, 찬양자의 노래도, 문지기의 충성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닌 자기 의에 근거한 사역은 결국 참된 의로 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역은 결국 참된 영적 가치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 위에 세워진 작은 섬김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산 제사가 됩니다. 당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당신은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난 없는 직분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충성할 수 있는 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칠흑 같은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주님께서 홀로 당신을 위해 모든 조롱과 고통을 견디셨다는 사실을 믿음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의 질서 아래로 들어오십시오. 당신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늘의 찬양대로, 거룩한 파수꾼으로 부르신 그분의 은혜에 응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04:45: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10. 심판의 자리를 거룩한 터로 바꾼 은혜 (대상 21~2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3]]></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은 다윗이 사탄의 올무에 걸려 비틀거리는 장면을 봅니다. 본문은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충동은 바로 ‘인구 조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행정적인 지혜’라 부르겠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이것을 ‘가증한 우상숭배’라 부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보이지 않는 반석보다, ‘군사의 숫자’라는 보이는 모래성 위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고질적인 질병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의로움의 개수를 세고 있습니다. “나는 매주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과 십일조를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니 내 구원의 숫자는 충분하다!” 

오, 가련한 이들이여! 그 공로의 숫자가 심판의 형벌에서 건져줄 것 같습니까? 다윗이 전쟁에 나갈 군사의 숫자를 세었을 때 죽음의 전염병이 임했듯이, 인간의 의를 계수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가 임합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숫자를 모두 지워버리고, 0이 된 나의 인생 위에 하나님의 ‘유일하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를 덧입히는 것입니다. 내 장부에는 죄의 빚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장부에는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기록이 가득합니다. 

여러분의 장부를 덮고, 하나님의 아들이 기록하신 은혜의 통계를 믿으십시오! 다행히 징벌의 선택지 앞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구합니다.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복음의 도피처입니까! 다윗은 알았습니다. 사람의 손은 무자비하며, 사람의 용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매를 들 때조차 그 안쪽에는 우리를 향한 긍휼의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혹시 죄로 인해 절망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 도망치고 계십니까? 어리석게 세상으로 도망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 ‘에게로’ 도망치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는 것이 세상의 품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보다 복된 일입니다.

보십시오! 심판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해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이스라엘이 벌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보고 계셨습니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바로 그곳을 주목하셨습니다. 

그곳은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진노의 칼날을 홀로 받아내실 그 언덕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갈보리 언덕에서 단 한 분,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실 그 보배로운 피가 모든 죄를 씻기에 ‘족할 것’임을 미리 보셨습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멈춘 그 칼은 사실 은퇴한 것이 아니라, 갈보리 언덕을 향해 그 방향을 잠시 틀었을 뿐입니다. 우리를 겨냥했던 심판의 칼은 주님의 가슴에 꽂혔고,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생명의 품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서 타작마당과 소들을 사려 합니다. 아라우나는 왕에게 이 모든 것을 거저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가격으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참된 복음은 ‘값없는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경험한 자의 예배는 ‘모든 것을 드리는 희생’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공짜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위해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 죄의 정당한 대가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남는 시간’, ‘남는 돈’, ‘남는 정성’으로 예배하려 합니까? 진실된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형식적 예배, 자기 부인이 없는 찬양과 기도, 세속적 욕망을 품고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다윗이 지불한 그 값은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를 버리셨고, 옷을 벗기우셨고, 마지막 물과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쏟아내셨습니다. 

그 ‘엄청난 대가’를 아는 자라면, 어찌 주님 앞에 인색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귀한 것, 가장 아끼는 것을 제단 위에 올려두십시오. 그때 비로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여러분의 예배를 열납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성전 건축의 설계도를 손에 쥐고, 재료를 산더미처럼 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직접 짓는 영광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전쟁을 많이 하여 피를 흘렸음이라” 이 말씀 앞에서 다윗은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리라”며 자신의 노년을 온통 준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겸손한 열정’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내 이름이 새겨진 건물을 짓고 싶어 합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는 사역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집이 세워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름 없는 벽돌공이 되고 재료 운반공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라는 ‘살아있는 성전’을 짓기 위해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준비했듯이,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늘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 거룩한 성전을 지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수고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뿌린 기도의 눈물과 헌신의 씨앗은 다음 세대에 거룩한 성전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레위인들의 직무를 정비합니다. 3만 8천 명의 레위인을 계수하여 찬양하는 자, 문지기, 기물을 관리하는 자들로 질서 있게 세웁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닙니다. 이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예배의 예행연습’입니다.

광야에서는 성막을 어깨에 메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고정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이전의 우리는 평안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는 방랑자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시온 성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역대상 21장에서 23장까지의 말씀은 인간의 부끄러운 실패로 시작하여 거룩한 예배의 준비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요약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심판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심판의 자리를 성전의 터로 바꾸어 놓습니다!

다윗의 죄가 폭로되었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솔로몬 성전의 기초가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가장 뼈아픈 실패와 눈물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은혜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십시오.

심판의 불은 이미 십자가에서 타버렸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감사와 찬송, 그리고 그분이 걸어가신 삶의 자취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윗처럼 당신의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늘의 성전을 바라보며 담대히 걸어가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Mon, 20 Apr 2026 05:36: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9. 은혜의 십자가에 소망을 둔 영혼의 닻 (대상 17~20)]]></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2]]></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언제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묻습니다. 우리는 마치 구걸하는 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대단하게 기부하는 자처럼 하나님 앞에 서려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신앙의 혼동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백향목 궁궐에 거하며 하나님의 궤를 위해 화려한 집을 짓겠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의 동기는 선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늘 보좌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아니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우리라!” 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반전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정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에, 그분은 이미 우리를 찾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분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목장에서 양을 치던 비천한 소년이었을 때, 누가 그를 주목했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가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누가 그의 모든 원수로부터 그를 보호하셨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신앙은 결코 인간의 초라한 영웅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의 정점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아니오’는 ‘예’가 되었고, 우리의 모든 부채는 탕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를 맛본 자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저 거룩한 보좌 앞에 엎드려 “주여, 먼지 같은 내가 누구이기에 이토록 과분한 은혜를 부어주시나이까”라고 은혜에 감격하여 울며 고백할 뿐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의 삶에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승리의 고백이 뒤따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한 구석에 박힌 죽은 글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환난의 폭풍 속을 항해하는 성도들의 키이며,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우리는 종종 일이 잘 되어질 때 착각합니다. “내 기도가 뜨거워서”, “내 믿음이 좋아서”, “내 헌신이 지극해서” 그렇게 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며, 겸손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싸움의 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우리일지 모르나, 그 칼날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적의 심장을 꿰뚫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의 오른팔입니다.

세상은 병거를 자랑하고 기병을 신뢰하며 자신들의 근육을 뽐내지만, 우리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승리한 뒤에 전리품을 자기 창고에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승리의 지분은 1%도 내게 없으며,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라는 거룩한 선언이었습니다. 승리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거둔 모든 성공의 왕관을 우리 주 예수의 발 앞에 내던지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하고 왜곡되기 쉬운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다윗은 선한 의도로 조문객을 보냈습니다.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암몬의 귀족들은 그 호의를 의심과 모욕으로 응수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사랑을 음모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이 가진 본성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설교를 통해, 환경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끊임없이 속삭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완악한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이것은 우연이 아닐까?”라며 그분의 선하심을 모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개하지 않는 죄는 독사와 같아서 반드시 더 치명적인 죄를 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다릅니다. 사방이 가로막히고, 호의가 거절당하며, 원수들이 비웃는 상황 속에서도 참된 성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계획이 틀어지고 내 체면이 깎여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분이 허락하신 고난조차 내게는 가장 좋은 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신뢰하지 말고, 상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전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한 번의 큰 은혜를 경험하면 모든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나타납니다. 어제 쓰러뜨린 골리앗 대신, 오늘은 또 다른 거인들이 여러분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신앙 생활은 잠시 쉬어가는 공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광야에 내던져 놓고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쩌다 한 번’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앞에 선 거인들이 아무리 거대하고 험악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다윗의 용사들이 거인들을 쓰러뜨린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특별한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면, 여러분의 작고 초라한 물맷돌 하나가 거인의 이마를 박살 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지혜와 능력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집과 재산에 두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세상 어디에도 여러분이 소망을 둘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모든 은혜와 축복과 소망의 마침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찍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당신이 돌아오기 전에 당신의 죄를 도말하셨고, 당신이 믿기 전에 영생의 길을 마련해두셨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의 십자가 안에서 당신의 영생과 영원한 축복이 확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에도 둘 수 없는 당신의 소망을 오직 십자가에 두십시오! 십자가에 둔 소망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당신의 영혼을 어떤 세상의 풍파에서도 흔들리지 못하게 튼튼히 지켜줄 것입니다.

<strong>“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 6:19)</strong>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05:15: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8.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범사의 감사 (대상 13~16)]]></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1]]></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의 영혼을 흔드는 가장 위험한 우상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어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찬송을 부르고, 지갑을 열어 헌금을 하며, 교회의 온갖 사역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나 오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천둥소리처럼 묻고 계십니다. “나의 방법으로 나를 섬기는가, 아니면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가?” 

기억하십시오. 지옥의 문턱까지 가면서도 자신은 천국으로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열심히’ 달렸지만, ‘말씀의 궤도’를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속도의 경주가 아니라 믿음의 행진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겪은 뼈아픈 실패를 통해, 우리 영혼의 수레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더불어 장엄한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거룩한 목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거룩한 목적 뒤에 치명적인 독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펼치는 대신, 세상의 유행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법궤를 ‘레위인의 어깨’에 메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느리고, 고되며, 인간의 눈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번쩍이는 ‘새 수레’였습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을 옮길 때 쓰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 세상의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을까? 어떻게 하면 예배를 더 세련되게 포장할까? 어떻게 하면 십자가의 고난을 생략하고 편리한 신앙을 제공할까?”이것이 바로 ‘새 수레’입니다. 우리는 어깨에 메어야 할 거룩한 짐을, 효율성이라는 이름의 수레에 던져버렸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소들이 뛰놀고 수레가 흔들리자, 그것을 붙들려던 웃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편리'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인간의 손가락 끝에서 좌지우지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웃사의 죽음 앞에 다윗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화를 냈고, 곧이어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 거룩한 공포를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의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짜로 만난 사람은 결코 그분을 만만히 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서 멈췄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지 않으셨다면, 다윗은 평생 블레셋의 수레를 끌며 그것이 신앙인 줄 착각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갑작스러운 실패가 찾아왔습니까? 그 순간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저를 무엇으로 이끄시려 하십니까?” 그것은 반드시 심판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새 수레’를 내려놓게 하시려는 자비로운 손길일지도 모릅니다.

멈추십시오! 그리고 물으십시오. “주여, 내가 나의 방법으로 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나이까?” 다윗은 3개월 동안 침묵하며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역대상 15장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는 이제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 선언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에게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느니라” 다윗은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수레를 제작하는 기술자를 부르지 않고, 말씀을 지키는 레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성경의 갈피를 넘기며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찾았습니다. “궤는 레위인이 어깨에 메어야 한다!” 여러분, 부흥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먼지 쌓인 성경을 펼치고, 그 말씀의 엄중한 명령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시작됩니다. 

“내 생각에는 이렇다”는 교만을 버리고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확신 위에 서십시오. 신앙의 회복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제 보십시오. 법궤가 레위인의 어깨에 메여 올라올 때, 예루살렘에는 전무후무한 기쁨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윗은 왕의 체면도 잊은 채 춤을 췄습니다. 누군가는 비웃었을 것입니다. “왕이 어찌 저리 경박하게 구는가?”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기쁨은 막연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쁨은 철저한 순종 위에 부어진 하늘의 상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진리 없는 감정은 위험한 광기입니다. 그것은 웃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들의 뜀뛰기와 같습니다. 감정 없는 진리는 차가운 시체입니다. 그것은 다윗을 비웃었던 미갈의 메마른 심장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말씀’이라는 차가운 강물 위에 ‘성령’이라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진리의 터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춤추는 예배, 그것이 바로 하늘 보좌를 흔드는 예배입니다.

역대상 16장에 이르면 다윗의 찬양이 절정에 달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다윗이 감사하는 이유는 상황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죽어 나갔고, 왕의 자존심은 짓밟혔으며, 온 나라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무엇을 노래합니까?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는 신앙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입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는 것은 본능이지만, 찢겼을 때 감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감사는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순종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일수록, 범사 속에서 감사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저의 새 수레를 부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멈추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다시 말씀의 어깨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때, 우리의 삶을 짓누르던 두려움과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감사는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라 믿음의 결단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원망의 수레 소리를 지우고, 감사의 찬양 소리를 높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인간의 수레에 하나님을 올려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까지 세상의 방식과 타협하며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는 핑계 뒤에 숨으시겠습니까?

이제 하나님 없이 움직이던 그 수레에서 내려오십시오. 당신의 어깨를 주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우리의 어깨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거룩한 율법의 짐을 대신 지시고, 인간의 수레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어깨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란 없습니다. 당신이 마시는 공기 한 모금, 매일 아침 뜨는 태양조차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와 인자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발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불평에 머물면 우리의 시선은 결핍에 묶이지만, 감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혜를 보게 됩니다. 감사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불행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at, 18 Apr 2026 05:53: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7. 십자가에서 시작된 승리와 오늘의 영적 싸움 (대상 10~12)]]></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50]]></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단순한 역사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떻게 처참하게 끝나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이 어떻게 영광스럽게 세워지는지를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기록은 수천 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 매일 벌어지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살아 있는 그림입니다. 먼저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하며 외적인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보고 환호하며 외쳤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왕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다!” 그러나 길보아 산 위에서 적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깊은 상처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기 칼 위에 몸을 던진 그 비참한 최후를 보셨습니까?

성경은 그의 인생을 단 한 문장으로 끝냅니다.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오, 이 한 구절이 여러분의 심장을 찌르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조급함을 따랐습니다.

결국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어둠의 길로 들어갔고, 그 끝은 완전한 파멸이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성공한 인생은 성공이 아닙니다! 기도 없이 이룬 승리는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육신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화려한 보좌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된 사울의 머리처럼, 영원한 수치와 허무로 끝날 뿐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길이요, 하나님을 떠난 자의 필연적인 종말입니다. 이제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왕궁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좌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굴 속에 숨어 있었고, 쫓기는 도망자요,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는 결코 왕이 될 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외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그의 힘은 검에 있지 않았고, 그의 지혜에 있지 않았으며, 그의 군대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눈물로 고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배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이깁니다!

세상이 버린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붙드시면 왕이 됩니다. 광야의 고독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고, 동굴의 눈물이 그를 준비시켰습니다. 당신의 삶이 지금 광야처럼 황량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바로 성령의 용광로요, 하나님의 주권을 배우는 가장 귀한 학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마십시오! 이제 더 깊이 들으십시오, 우리는 너무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은 육신이요, 다윗은 영이다.” 물론 어느 정도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도 사울이 살고 있고, 여러분 안에도 다윗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옛 육신이 여전히 남아 있고, 새로운 영의 생명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이 두 원리가 우리 안에서 매일 충돌하며 싸웁니다. 이제 진짜 복음을 보십시오! 성경은 크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할렐루야!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이미 처리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정욕과 탐심, 곧 육신도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는 이미 승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죄의 권세는 이미 꺾였고, 사망의 몸은 이미 정복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하듯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미 승리했는데 왜 이렇게 싸웁니까?

이미 자유한데 왜 여전히 유혹이 있습니까? 이미 구원받았는데 왜 매일 육신의 끌어당김을 느끼십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거듭난 성도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하였으나 아직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여전히 육신의 잔재와 매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이후의 삶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영광스러운 투쟁입니다! 이제 더 깊이 보십시오. 다윗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쓰러졌습니다. 그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간음과 살인이라는 어두운 죄 속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때 깨어지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은 점점 하나님을 떠났지만, 다윗은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다시 엎드렸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문제는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넘어진 채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붙들려 주님을 향해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아름다움이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지금 사울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자신의 판단과 조급함으로 결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편법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사울의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졌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죄에 빠져 무너졌습니까? 그렇다면 들으십시오! 아직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실패 속에서도 역사를 멈추지 않으셨고, 다윗의 눈물과 연약함 속에서도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부흥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역대상 12장을 보십시오! 다윗에게 모인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빚진 자들, 환난 당한 자들, 인생이 철저히 무너진 자들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실패자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에게 전심으로 연합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사자 같고 독수리 같은 강한 군대로 바꾸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잘 몰라서 당신이 몰랐던 연약한 모습이 나타날 때 절망할지 모르나, 주님은 그 연약함 때문에 당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그 연약함에 마음껏 은혜의 단비를 내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본심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17 Apr 2026 04:55: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6. 그리스도의 지체에 대한 최고의 극찬 (대상 7~9)]]></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9]]></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대상 9장에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거룩한 명부 앞에 서 있습니다. 바벨론의 잿더미를 딛고 돌아온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이 본문은, 언뜻 보기엔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처럼 적막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들어 보십시오! 이 명단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유기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독특한 은사를 부여하셨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중 누구도 ‘불필요한 존재’가 없으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얼마나 요긴한 지체인지를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본문의 여러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찬양하는 자, 전병 굽는 자, 심지어 성전 기명을 관리하는 자들까지 나옵니다. 여러분, 하늘의 지혜를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번거로울 정도로 상세한 명단을 남기셨겠습니까?

그것은 교회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기가 트럼펫의 날카로운 소리만 낸다면 그것이 어찌 음악이 되겠습니까? 낮은 음을 내는 첼로가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박자를 맞추는 북소리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에게는 태양처럼 빛나는 웅변의 은사를 주셨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이슬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기도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참나무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그늘 아래 이름 없이 피어난 작은 들꽃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옆 사람의 화려한 은사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은사를 초라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은사가 무엇이든, 그것은 동일한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에게 맞춤으로 주신 보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설파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원리를 이 역대상 9장에 투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12,22)

본문에 등장하는 문지기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전 안에서 화려한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문가에 서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사람들을 감시하고 안내하는 일을 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찮은 종’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문지기가 없다면 제사장이 어찌 평안히 제사를 지내겠습니까? 찬양하는 자들이 없다면 성전의 기쁨이 어디에 있겠으며, 떡을 굽는 자들이 없다면 거룩한 진설병은 누가 준비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봉사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 몸의 장기 중 심장이나 폐는 밖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멈추면 생명도 끝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아침 남몰래 화장실을 청소하는 손길, 이름 없이 구제금을 보내는 마음, 병든 지체를 위해 골방에서 눈물짓는 그 기도가 바로 교회를 살리는 ‘보이지 않는 요긴한 지체’입니다. 역대상 9장의 명단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들이 ‘함께’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33절은 말합니다. “이들은 찬양하는 자이니... 밤낮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 찬양하는 자들은 노래에 전념하고, 문지기들은 문을 지키는 데 전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분업’이자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지체는 아무도 없습니다. 눈의 역할인 자가 발의 역할인 자에게 “나는 너 없이도 볼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어디를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각자 다른 지체로 부름받았습니다. 각 지체가 자신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며 타인의 은사를 존중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몸’으로 든든히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31절에 나오는 맛디디야를 주목하십시오. 그는 고라 자손의 맏아들이었으나, 맡은 일은 ‘전병을 굽는 일’이었습니다. 한 지파의 장자로서 더 화려한 일을 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화덕 앞에서 빵 굽는 일을 ‘하나님이 맡기신 거룩한 직무’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한 일이 얼마나 ‘위대하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성되냐’를 보십니다. 만약 천사 둘이 한 명은 왕이 되고, 한 명은 청소부가 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그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려 하지 않고 기쁨으로 순종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을 맡기신 그 자체가 영광이고 그 일에 충성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들이 극히 꺼려하고 혐오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그 길을 가지 말아 달라고 항변했지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베드로를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서고자 하나님을 대적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셨다면, 우리의 죄와 사망을 끝내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지 않았습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아내와 자식은 물론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시다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장 비참하고 가장 불쌍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충성된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 그분의 생의 의미를 아는 여러분들과 그분의 죽으심으로 동일하게 거룩함을 얻은 성도들 역시 그 삶이 얼마나 값지고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잘 알기에 날마다 찬양하지 않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거룩한 지체의 명단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명단에 넣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따라 살으셨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삶은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주어진 은사는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묵묵히 순종하는 것입니까? 무엇이든 좋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 당신은 충성된 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과 직분과 은사는 다른 지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과 직분과 은사는 모두 소중하고 요긴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모두 선하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사십시오! 당신의 직분과 은사를 귀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장차 그 날에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듬뿍 담긴 음성으로 아래와 같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strong>“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3)</strong>

이 말씀은 세상에서 잠시 살다간 당신에 대한 최고의 극찬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06:08: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5. 죄 사함을 넘어 거룩의 주재와의 사귐 (대상 4~6)]]></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8]]></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강단 앞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을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죄 사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물론 그것은 영혼의 기쁨이자 찬란한 구원의 보석입니다! 

지옥의 형벌이라는 시커먼 그림자가 걷히고, 하나님의 자비라는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죄 사함은 영적 생명의 첫 호흡이며, 멸망의 늪에서 건짐 받은 자가 부르는 첫 번째 찬송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유일한 소망의 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이 그 문 앞에만 서성이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천둥소리처럼 선포하고자 하는 더 깊고, 더 높고, 더 영광스러운 진리를 들어보십시오. 죄 사함이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게 한다면, 거룩함은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영광된 사귐의 품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죄 사함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죄인이 무죄 석방의 판결문을 손에 쥐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그를 궁전으로 데려가 씻기고, 가장 좋은 비단옷을 입히며, 왕의 식탁에 앉혀 그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게 만드는 하늘의 신비입니다. 

용서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노예의 사슬을 벗어난 것에만 안도하는 자와 같으나, 거룩을 갈망하는 자는 아버지의 신성한 성품과 연합하고자 하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를 넘어 거룩한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수많은 이름들 중 ‘야베스’라는 이름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의 이름을 이토록 구별하여 기록하셨을까요? 그가 단순히 세상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기를 구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기도를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십시오. 그는 자기 지역을 넓혀달라고 구하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땅을 넓혀달라는 세속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 기도의 본래 의미를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삶의 고통과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이 기도를 다시 바라보면, 우리의 영혼을 가장 깊이 근심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끊는 죄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야베스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여, 나를 단순히 환경의 환난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버리는 죄의 세력에서 건져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을 넘어 거룩을 갈망하는 성도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 기도는 삶의 환난을 넘어, 심령에 근심을 주는 영적 환난에서도 벗어나기를 구하는 간구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심령의 평안함을 구하는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은 바로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함께 야베스를 구별하셔서 우리 역시 무엇을 추구해야 되는지를 가르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지옥 가기 아까운 존재로 여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당신의 아들로 삼기 위해 한 알의 밀과 같은 아들을 십자가의 저주 아래 내던지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의 과거를 덮는 휘장이 아니라, 우리 영혼 속에 뿌리박힌 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하늘의 쟁기입니다!

이제 고개를 돌려 역대상 5장의 르우벤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의 장자였습니다. 모든 형제 위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지위와 갑절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찬란한 특권이 그의 머리 위에 부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은혜의 최전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는 그 영광스러운 관을 스스로 진흙탕 속에 짓밟아 버렸습니다. 왜입니까? 그의 은밀한 죄, 그의 거룩하지 못한 정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끊어지면서 그 특권에서도 끊어졌습니다. 

여러분, 이 서늘한 경고를 뼛속 깊이 새기십시오. 피로 씻음 받은 영혼이라 할지라도 거룩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가장 고귀한 하늘의 보석을 도둑맞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시작이지만, 거룩은 그 이어진 관계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영원히 용서받았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문제 없다”는 값싼 복음을 외칩니다. 

그러나 거룩을 추구하지 않는 죄 사함은 껍데기만 남은 빈 보석 상자와 같습니다. 지옥의 불길은 무서워하면서 정작 그 불길을 일으키는 죄와는 여전히 연애를 즐기고 싶어 한다면, 당신은 아직 십자가의 진정한 능력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역대상 6장의 레위 지파의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웅변해 줍니다. 다른 지파들이 기름진 땅과 가축을 기업으로 받을 때, 레위인들에게는 땅 한 평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가장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만이 누리는 감추인 보화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거룩함이란 단순히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는 금욕의 나열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세상의 썩어질 설탕물보다 하나님의 생명수를 더 갈망하는 ‘거룩한 갈증’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세상의 금은보화보다 하나님의 미소 짓는 얼굴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는 세상의 박수갈채보다 하늘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성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 같으나 실상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울리는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주지만, 거룩함은 아버지의 부유함을 누리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까지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계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나는 죄 사함 받았다, 나는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영적 게으름의 침대에 누워 코를 골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 이상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께서 내리시는 지엄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 스스로는 거룩해질 수 없다는 사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해지기 위해 거룩의 주재를 등지는 우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영원까지 거룩은 유일한 거룩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 역시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죄 사함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열매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 사함을 받은 후 이 사실을 잊어버리기에 다시 타락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간구가 귀한 것입니다. 거룩의 주재를 향해 거룩을 간청하는 기도는 특별히 기록되어야 하는 흔치 않는 기도인 것입니다.

죄 사함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거룩의 주재이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사귐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것이 당신을 위해 아낌없이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우리 주님께서 당신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당신은 단지 용서받은 자로 머물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겠습니까?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Wed, 15 Apr 2026 05:20: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4. 전능자의 기억에 새겨진 영광스런 이름들 (대상 1~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7]]></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라는 광활한 대륙을 여행하다가 종종 거칠고 황량한 광야를 만납니다. 바로 역대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 방대한 족보의 산맥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장들에 들어서면 지루해하면서 눈을 감고 다음 장으로 건너뛰어 버리곤 합니다.

“아담, 셋, 에노스...” 여러 이름들의 나열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생명력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군의 여호와께서 기록하신 성경에 ‘버릴 문장’이란 단 한 줄도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이 이름들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억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에 보관된 ‘영광의 목록’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구멍 난 바구니와 같아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의 기억은 철필로 바위에 새긴 글귀와 같아서 만세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른 뼈와 같은 이름들 사이로 생기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굳이 이 수백 명의 이름을 우리 손에 들려주셨는지, 그 속에 숨겨진 신비로운 은혜를 깊이 파헤쳐 봅시다.

하늘의 명부에는 결코 ‘무명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대상 1장은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열방의 족보를 훑어 내려갑니다. 여기에는 노아처럼 위대한 방주의 주인공도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언급되고 사라지는 이름들이 수천 개나 됩니다.

세상은 거창한 업적을 남긴 정복자나 금관을 쓴 제왕을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기록해주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러분, 이 족보를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 광야의 먼지처럼 살다 간 사람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호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앞에는 이름 없이 모르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온 우주의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골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흘린 눈물, 교회 구석에서 묵묵히 닦았던 의자, 이름 없이 드렸던 그 작은 헌신들을 세상은 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세상에 거의 없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만왕의 왕이신 그분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그분의 손바닥에 문신처럼 새기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여러분의 머리카락 한 털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2장에서 유다 지파의 계보를 만납니다.

이곳은 거룩한 왕들이 나와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족보 안에는 감추고 싶은 추문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다말, 이방 여인이자 기생이었던 라합의 흔적이 이 거룩한 줄기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족보라면 가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이들의 이름을 도려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고결한 대리석 위에서만 춤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더러운 오물 속에서도 보석을 건져 올립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칠흑같이 어둡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어둠을 뚫고 빛나는 영원한 등대입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을 정죄하고 있습니까? “나 같이 추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어?”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은 흠 있는 자들을 불러 메시아의 계보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당신의 ‘완벽함’에 기초하지 않고, 그분의 ‘신실하신 은혜’에 기초합니다. 당신의 상처는 하나님의 은혜가 통과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3장에 이르면 다윗의 직계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이 명단은 화려하게 시작되지만, 역사의 끝자락에 이르면 비극적인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이 족보를 읽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갓 돌아온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왕위는 찬탈당했으며, 성전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끝난 것인가? 다윗의 등불은 영원히 꺼졌는가?” 하지만 이 족보의 존재 자체가 그 대답입니다. “보아라, 왕조는 끊겼을지언정 나의 언약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세상의 제국들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위대한 영웅들의 무덤 위엔 잡초만 무성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바벨론의 포로 사슬도 하나님의 계보를 끊어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불신앙과 역사의 소용돌이도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거대한 배를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포로기처럼 황폐합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잉크로 당신의 인생 뒤편에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이 계보의 끝이 예수 그리스도께 닿았듯이, 당신의 고난의 끝도 결국 승리의 주님께 닿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대기의 딱딱한 이름들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뜨거운 맥박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지금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잠시 머물다 사라질 세상의 명부입니까? 아니면 어린양의 보혈로 적셔진 ‘하늘의 생명책’입니까?

혹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기억하실까? 아마 나를 잊으셨을거야”라는 불신의 생각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잊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억에 새겨진 당신에 대한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strong>“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4~16)</strong>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ue, 14 Apr 2026 06:02: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3.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 성령의 임재 (왕하 23~25)]]></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6]]></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한 나라가 무너지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들은 통곡하며, 다윗의 후예들은 쇠사슬에 묶여 짐승처럼 끌려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참혹한 광경을 보며 조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패배했는가? 그분의 팔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가?”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잿더미 위에서도 우리 하나님의 주권은 여전히 보좌 위에 높이 들려 있습니다. 

이 파괴는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서슬 퍼런 공의와 거룩함의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극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실패를 뚫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손을 발견해야 합니다. 

구약의 ‘완성되지 못한 개혁’이 어떻게 신약의 ‘완성된 개혁’으로 이어지는지, 우리의 차가운 종교적 심장을 녹이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대면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무너진 자리 위에 오순절의 기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먼저 우리는 유다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요시야 왕에 주목합니다. 그는 참으로 경건한 왕이었고 위대한 개혁가였습니다. 그는 우상을 타파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잊혔던 유월절을 다시 세웠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유다 전역에 찬란한 부흥의 아침이 밝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통해 그 이면을 보십시오. 왕의 옷은 찢겼으나 백성의 마음은 찢기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이 무서워 겉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척했으나, 그들의 지하실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가증한 우상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 비극은 훗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한솥밥을 먹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주님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높은 자리를 탐하는 세상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외형의 종교적 형식은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오직 성령의 불길로만 녹일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중 삶 속에서 죄를 몇 가지 제거했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십시오. 술잔을 던져버리고 도박장을 떠났다고 해서 영혼이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매주 교회 의자에 앉아 거룩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십일조를 드립니까?

그러나 묻겠습니다. 당신의 ‘심장’은 누구를 향해 뛰고 있습니까? 마음이 빠진 종교는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무덤과 같습니다. 겉은 금방이라도 천국에 갈 것처럼 빛나지만, 그 속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처럼 주님을 부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껍데기로 하나님을 섬기던 유다는 결국 무너졌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거룩한 기구들은 약탈당했으며,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없이 세운 모든 성벽은 결국 붕괴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노력, 당신의 열심, 당신의 선행... 이 모든 것들이 은혜의 기초 위에 서 있지 않다면 무너질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무너짐’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의 왕국은 십자가라는 처참한 패배 앞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베드로는 한낱 계집종의 질문 앞에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더 위대한 것을 세우기 위해 먼저 무너뜨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야의 외적 개혁을 무너뜨리신 것은 마음에 새길 ‘새 언약’을 주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의 육체적 자만심을 꺾으신 것은 ‘성령의 시대’를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지금 무너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을 버리시는 징조가 아니라, 당신의 가짜 성벽을 허물고 하늘의 도성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입니다. 열왕기하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태운 불은 죄에 대한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을 잃어버린 형식을 태워버리는 공의의 불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내린 불은 전혀 다른 종류의 불이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리고 재창조하는 ‘은혜의 불’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몸만 따라다니던 비겁하고 나약했던 제자들은 담대한 복음의 사자로 변했습니다. 요시야 시대의 백성들은 율법 책을 읽어주어도 냉담했으나, 성령이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는 “우리가 어찌할꼬!”라며 심장을 찢었습니다.

이것이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수술 집도의와 같습니다. 그분은 요시야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던 그 딱딱한 ‘돌 심장’을 꺼내시고, 피가 흐르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넣어주십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도덕을 수선하는 강습소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차가운 종교인에게 하늘의 불을 붙여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게 만드는 폭발적인 생명의 현장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잿더미 속에서, 감옥에 갇혔던 유다 왕 여호야긴이 서른일곱 해 만에 풀려납니다. 그는 죄수의 옷을 벗고 왕의 식탁에서 평생 음식을 먹게 됩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꺾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은혜는 오순절 이후 우리에게 완전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몸만 따라다니던 구경꾼이었던 제자들이, 이제는 성령 안에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매일 식탁을 함께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역시 죄의 사슬에 묶여 영원한 감옥에 갇혀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라는 가장 처참한 ‘무너짐’을 당하셨습니다. 

독생자가 버림받음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랐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직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마음이 더 이상 세상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추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영원한 나라보다 세상 처소가 더 크게 눈에 들어옵니까? 오순절의 기적을 회복하십시오! 성령께서 당신 마음을 채우시면 그때 비로소 만왕의 왕이시면서 세상에서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이해될 것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Mon, 13 Apr 2026 05:26: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2. 기도와 말씀에 전무한 믿음의 주 (왕하 19~22)]]></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5]]></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다 왕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울삼아 초대교회가 지녔던 그 영광스러운 승리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행정적인 분주함과 갈등 속에서 단호하게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고 선포했습니다. 

이 짧은 선언 속에 교회의 생명력과 영적 무장이 들어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늘의 무한한 능력을 끌어오는 통로요, 말씀은 그 권능이 탈선하지 않고 흘러갈 길을 내는 거룩한 궤도이니,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사탄의 견고한 진은 무너지는 법입니다. 

먼저 히스기야 왕이 처한 그 절박한 상황을 보십시오. 앗수르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겹겹이 에워싸고 산헤립의 독설이 왕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그는 군사력을 재점검하거나 주변 강대국에 뇌물을 들고 원군을 요청하러 달려가는 어리석은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욕적인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그것을 그대로 펴놓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이 조각을 펼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전적인 무력함과 비참함을 하나님의 전능하심 아래 던져버린 거룩한 항복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또한 이 히스기야의 무릎을 소유했던 공동체로서, 헤롯의 칼날에 야고보가 쓰러지고 베드로마저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성도들은 세상의 법정을 찾아가 탄원하는 대신 오로지 하나님께 간절히 빌어 옥문을 흔들고 천사를 불러내었습니다. 

성도의 무릎은 지옥의 군대를 공포에 떨게 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사람에게 하소연하며 덧없는 동정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늘의 우체국에 여러분의 사정을 상달하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기도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는 기적적인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 이후 찾아온 바벨론 사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 자신의 보물고와 무기고를 자랑하는 치명적인 영적 교만을 범했습니다. 

은혜를 자신의 경건이나 공로로 착각하는 순간 그 축복은 영혼을 부패시키는 독약이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킨 후 무리들에게 “왜 우리 개인의 권능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응답의 정점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철저히 지우고 오직 예수의 이름만을 높인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이 고난의 골짜기에 있을 때보다 기도의 응답을 받고 성공의 산꼭대기에 서 있을 때 더 크고 정교한 유혹의 그물을 던집니다.

기도로 승리한 자가 가장 패배하기 쉬운 장소도 그 기도가 응답된 자리일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은혜가 깊어질수록 성도의 고개는 땅에 더 가까워져야만 합니다. 교만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사라진다면 그곳에는 무엇으로 채워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그 영혼의 빈자리는 반드시 므낫세처럼 추악한 저주의 우상들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성전 중심에 돈이나 명예 혹은 자아라는 금송아지를 세우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교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므낫세조차 고난 중에 겸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회복시키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다시 기도의 자리로 겸손히 돌아온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요시야 왕이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다가 구석에 버려져 있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옷을 찢으며 통곡했던 것처럼, 참된 영적 부흥은 일시적인 감정의 파도가 아니라 잊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단순히 기적의 체험 때문이 아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날마다 말씀 위에 삶의 집을 지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통제되지 않는 광신으로 흐르고 기도 없는 말씀은 생명력 없는 차가운 지식의 화석이 될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무력해진 이유는 성경을 지식으로 공부할 뿐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요시야의 심령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회복되고 무너진 가정이 재건되길 원한다면 성경을 펴서 그 성령의 검이 당신의 위선과 교만을 찔러 쪼개게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걷기에 앞서 반드시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이 땅에 계실 때에 기도의 호흡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서 무릎을 꿇으셨고, 공생애의 중대한 결정 앞에서는 밤이 맞도록 산에서 기도하셨으며,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의 진액을 짜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사탄의 감미로운 유혹을 물리치실 때에도 화려한 수사학이 아니라 오직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의 검을 휘두르셨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시편의 말씀을 읊조리며 구약의 예언을 온몸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토록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결코 우리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앗수르의 포위망 같은 현실 앞에서 히스기야처럼 기도의 편지를 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수단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까? 또한 요시야처럼 말씀 앞에서 옷을 찢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의 거울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는 영혼의 생명선입니다. 말씀은 영적 양식입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몸으로는 살아가기 힘들 듯, 말씀이 결핍된 심령으로는 영적 삶을 힘있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늘과 이어진 기도의 골방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일용할 영의 양식을 섭취하는데 게으르지 마십시오! 제자들을 부르신 주님께서 당신도 부르셨다면, 당신 역시 초대교회의 역사를 이어가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주님을 잊지 마십시오! 

제자들처럼 피곤하여 잠이 들 때에도 주님은 당신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un, 12 Apr 2026 05:32: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1. 느후스단을 박살 내는 이 시대의 히스기야 (왕하 16~18)]]></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4]]></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유다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영적으로 파산한 시대를 마주합니다. 아하스라는 악한 왕 아래서 성전의 문은 굳게 닫혔고, 등불은 꺼졌으며, 거룩한 제단 위에는 이방의 가증한 오물들이 가득 찼습니다. 백성들은 길 잃은 양 떼처럼 우상의 골짜기를 헤매며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절망이 끝나는 지점에서 자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폐허가 된 왕궁 한복판에서 히스기야라는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장차 죄악으로 타락하여 소망 없는 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무너진 예배를 회복했듯,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영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끝났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나의 왕을 세웠다"라고 선포하십니다. 히스기야가 어둠을 뚫고 나온 것처럼,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으로 찾아오신 분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행한 가장 충격적인 개혁이 무엇입니까? 그는 산당을 헐고 주상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의 보물이었던 ‘모세의 놋뱀’을 가져와 박살 냈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유산입니다! 그것은 기적의 상징입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종 모세가 만든 것을 부순단 말입니까?”

하지만 히스기야는 그 거룩해 보이는 껍데기를 향해 외쳤습니다. “느후스단! 이것은 그저 놋조각일 뿐이다!” 여러분, 놋뱀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그것을 바라볼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살린 것은 놋조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놋뱀은 장차 갈보리 언덕에서 나무에 달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는 보지 않고, 녹슬어가는 손가락만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사라지고, ‘교회를 다닌 세월’이라는 놋뱀, ‘과거의 화려한 직분’이라는 놋뱀, ‘형식적인 종교 의식’이라는 놋뱀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림자를 부수십시오! 그래야 실체가 보입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순 것처럼,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종교적 위선과 자아라는 우상을 십자가의 망치로 박살 내러 오셨습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셨는데 왜 여전히 유물에 불과한 놋조각을 붙들고 계십니까? 

십자가라는 상징물만 붙들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본인을 붙드십시오!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해 위대한 평가를 내립니다.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왕하 18:6) 여기서 ‘연합’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바크’이며, 이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는 강력한 결합을 의미합니다. 

히스기야는 환란 중에도 하나님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비웃고 앗수르는 그를 위협했지만, 그는 마치 바위에 붙은 굴처럼 하나님께 딱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냉정하게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완벽했습니까? 아닙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몰려오자 그는 한때 두려움에 떨며 성전 기둥의 금을 떼어 적에게 바쳤습니다. 

믿음의 거인도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나은 히스기야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히스기야는 적의 위협 앞에 성전의 금을 내어주어 일시적인 평화를 구걸했지만, 우리 주님은 사탄의 공격 앞에 자신의 생명 자체를 내어주어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쟁취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두려움 속에 비틀거렸으나,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의 피땀 흘리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히스기야의 결단력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위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의 연약함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붙드는 힘은 약할지라도,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의 손은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히스기야 같은 의로운 왕에게 앗수르 군대라는 거대한 시련을 허락하셨을까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보석을 연마하기 위해 거친 사포를 사용하십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이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에게 포위당했을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앗수르의 랍사게는 독설을 내뱉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겠느냐? 너희는 속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고 속삭입니다. 

“네가 기도한다고 상황이 바뀌겠느냐?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때 히스기야는 무엇을 합니까? 그는 랍사게의 편지를 들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그것을 펴 놓았습니다! 그는 말로 싸우지 않고 기도로 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을 이기신 방법이며, 십자가에서 묵묵히 고난을 견디신 방법입니다.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앗수르’를 하나님 앞에 펴 놓으십시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 한밤중에 적군을 전멸시키신 하나님께서, 오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던 이유는 그가 탁월한 전략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 문장으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매!” 성도 여러분, 세상이 말하는 형통에 속지 마십시오. 세상의 형통은 통장 잔고가 늘어나고 육체가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그 자체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방이 막힌 포위망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형통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셨기에 온 인류를 구원하는 형통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까? 앗수르 군대처럼 압도적인 문제가 여러분의 성벽을 에워싸고 있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승리의 현장이요 축복의 요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면, 감옥도 궁전이 되고 광야도 낙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변화가 더딜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 삶은 이미 실패가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결국 죽어 장사되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살피십시오. 아직도 '느후스단' 같은 죽은 전통과 자신의 의를 하나님처럼 모시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면서 정작 십자가의 고난은 거부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안의 살아있는 말씀에는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느후스단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 “남들도 다 이렇게 믿어” 하는 타협을 단호히 끊어내십시오. 모든 우상을 내려놓고 히스기야가 바라보았던 그 믿음의 본질, 곧 나무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사용하셨듯이 당신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날의 느후스단을 박살내는 이 시대의 히스기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은 당신이 붙드는 힘이 아니라, 당신을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손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05:34: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00. 완전한 은혜를 거부하는 불완전한 믿음 (왕하 13~15)]]></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243]]></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엄중한 질문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산보다 크시나, 우리의 믿음은 왜 이토록 겨자씨보다 작은가?” 우리는 주일마다 성전에 모여 장엄한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전 문을 나서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의 행동은 마치 하나님이 팔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분이거나, 능력이 고갈되어 우리를 도울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인 양 변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의 보고(寶庫)에 보화가 떨어졌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능자의 심장이 식었기 때문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작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담아낼 우리의 믿음의 그릇이 종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3장을 보십시오. 믿음의 선지자 엘리사가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이 그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릴 때,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마지막 비결을 유언처럼 명령합니다. “화살들을 취하여 땅을 치소서!”

왕은 화살을 집어 들고 땅을 칩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그는 손을 멈추었습니다. 아마 그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 번 정도면 충분하겠지. 선지자 앞에서 체면도 세웠으니 이만하면 됐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노를 발하며 불같이 소리칩니다. 

“왕이 대여섯 번을 쳤어야 하였나이다! 그랬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오,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요아스는 화살을 아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를 발로 걷어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를 도말할 준비가 되셨으나, 요아스의 불완전한 믿음은 고작 세 번의 승리만을 담을 만큼 좁고 얕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처럼 무한하고 완전하지만, 인간의 불완전한 믿음이 그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더 깊고 더 중요하고 더 무서운 영적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요아스가 화살을 세 번만 치고 멈춘 것처럼, 많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다면서도 ‘부분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주님이 내 과거의 죄는 씻어주셨지만, 앞으로 지을 죄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혹은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지만, 내가 끝까지 버티지 못하면 그 구원이 취소될지도 몰라”라며 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아스가 땅을 세 번만 치고 멈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주님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선포합니다. 그 속죄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까지 미치는 완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그 영원한 속죄를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불완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속죄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를 믿지 못하는 부분적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등 뒤로 던지셨고 다시는 기억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도 잊으신 죄를 다시 꺼내어 절망의 화살을 세 번만 치고 멈춥니까? 십자가는 세 번의 승리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입니다! 

또한 승리를 맛본 후에는 사탄의 올무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샤는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믿음의 길을 걷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심령은 사탄이 불어넣은 교만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도우셔서 얻은 승리를 마치 자신의 지략과 용맹으로 얻은 훈장인 양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뿌리 깊은 사악함입니다. 하나님께 빌려온 빛으로 겨우 어둠을 밝히면서, 마치 자신이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인 양 행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뼈아픈 경고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성공을 자기 영광으로 바꾸는 순간, 그 성공은 여러분의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무서운 심판의 몽둥이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나의 권리로 여기는 순간, 하늘의 이슬은 그치고 축복의 통로는 막혀버립니다. 

15장에서는 왕들의 이름은 바뀌고 시대는 흘러가지만, 성경의 펜 끝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극적인 문장을 반복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가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은 소름 끼치는 반복입니다. 아버지가 지은 죄를 아들이 답습하고, 그 아들이 또 그 어두운 길을 걸어갑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결국 그 영혼의 고칠 수 없는 운명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핑계를 댑니다. “환경이 바뀌면 나아지겠지.” 

아니요! 문제는 보좌에 앉은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심령 중심에 도사린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도 ‘여로보암의 죄’가 남아있습니까? 오늘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그 죄가 내일 목을 죌 것이며 그 후에는 자녀들의 영혼까지 사냥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창고의 모든 열쇠를 쥐고 여러분을 인자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받을 믿음의 준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은혜를 십자가에서 증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까지 단번에 도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참으로 믿는 자는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제 요아스처럼 세 번 치고 멈추는 불완전한 믿음을 집어던지십시오. 그리고 부분적인 믿음의 감옥에서 나오십시오. 완전한 믿음은 완전한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방종이 아니라 거룩으로 이끕니다.
 
영원한 속죄를 믿었습니까? 그럼 영원한 축복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나라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세상에서의 당신 모습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가진 자인 당신의 참 모습을 깨우쳐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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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10 Apr 2026 06:05:1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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