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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행복신앙연구소</title>
		<link>http://www.bog.or.kr</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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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63. 지나가는 왕국과 영원한 왕권 (단 4~7)]]></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30]]></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니엘 4장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한 사람을 만납니다. 느부갓네살은 거대한 바벨론을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고 자랑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손이 쌓아 올린 돌과 자기 이름이 새겨진 성벽만이 보였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아직 그 자랑의 말이 입술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랑하던 왕위를 빼앗으셨고, 사람들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꺾으심으로 누가 참된 왕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정한 기간이 지나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자신과 바벨론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마침내 하늘을 향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과 믿음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만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내가 이루었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영원한 왕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왕은 오늘 왕좌에 앉았다가 내일 내려올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제국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높아져도 하나님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5장에는 이 교훈을 알고도 배우지 못한 또 한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벨사살은 천 명의 귀족을 불러 큰 잔치를 벌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그릇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신의 향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금과 은과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술잔을 들고 웃던 왕의 얼굴빛이 변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혔습니다. 세상의 왕에게는 수많은 군사와 신하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손가락 하나 앞에서 그는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왕 앞에 불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주겠다는 선물과 상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도 마음을 낮추지 않았던 벨사살의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은 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판결을 해석합니다. “데겔,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사람들이 볼 때 벨사살은 부족한 것이 없는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그는 부족한 사람으로 드러났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의 평가는 우리를 높일 수도 있고 세상의 성공은 우리를 위대하게 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 판단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시느냐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바벨론의 왕국도 무너졌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자랑했던 그 거대한 바벨론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지나가는 한 시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왕국이 바뀌어도 다니엘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이 지나가고 메대와 바사가 등장했으며 왕의 이름도 바뀌었습니다. 느부갓네살도 사라지고 벨사살도 사라지고 이제 다리오가 왕좌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6장에 이르자 새로운 왕국에서도 다니엘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의 삶에서 아무런 허물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30일 동안 왕 외에는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도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다니엘은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경은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는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이 생긴 뒤에 기도를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위기가 없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같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시험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소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펄전이 다니엘에게서 보았던 담대함도 여기에 있습니다. 왕이 바뀌었다고 그의 기도가 바뀌지 않았고, 법이 바뀌었다고 그의 하나님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명령은 다니엘의 몸을 사자굴에 던질 수 있었지만 그의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을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나라에 드러내셨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여러 왕들을 보았습니다. 느부갓네살도 왕이었고 벨사살도 왕이었으며 다리오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더 큰 질문을 던집니다. 이 모든 왕들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왕은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7장입니다. 다니엘은 밤의 환상 가운데 큰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을 보았습니다. 하나의 제국이 일어나고 또 다른 제국이 뒤따라 일어납니다. 인간의 눈에는 화려한 문명과 강력한 제국으로 보이는 세상의 나라들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탐욕과 폭력을 드러내는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시선은 짐승들에게 머물지 않습니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고 보좌가 놓이며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십니다. 세상의 왕들이 아무리 요란하게 일어나도 하늘의 보좌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더욱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에 인도됩니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깁니다. 그의 권세는 느부갓네살의 권세와 다릅니다. 그의 나라는 벨사살의 나라와 다르고 다리오의 나라와도 다릅니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라고 한 뒤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합니다. 바벨론을 보았으면 바벨론 너머를 보십시오. 사자굴을 보았으면 사자굴 너머를 보십시오. 세상의 왕들을 보았으면 그 모든 왕 위에 계시는 영원한 왕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왕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왕국들은 일어났다가 무너지고 인간의 영광은 피었다가 시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지나가지 않으며 인자의 권세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바라본 그 인자가 바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영원한 왕이십니다.

복음서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듭 “인자”라고 부르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리실 그분이 바로 다니엘이 보았던 인자이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 뒤에 부활과 승천과 영원한 왕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굴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보고, 불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보며, 무너지는 세상의 왕국을 보면서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현실을 부정하는 눈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계신 하나님까지 보는 눈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바라보다가 낮아졌지만 마침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눈을 더욱 열어 마침내 모든 나라 위에 영원히 다스리시는 인자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너질 바벨론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의 왕에게 있지 않고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왕들은 지나갑니다. 나라들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영원한 왕을 바라보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un, 20 Sep 2026 07:04: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62. 하나님을 향해 뜻을 정한 그 마음 (단 1~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9]]></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묵상할 다니엘 세 장은 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용사들을 보여줍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스스로 바벨론의 문을 열고 들어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의 성벽이 무너지고, 거룩한 성전이 짓밟히며, 어린 날의 꿈이 산산이 부서진 채 그들은 이방의 사슬에 묶여 끌려왔습니다.
  
이름도 빼앗기고, 언어도 빼앗기고, 그들이 숨 쉬던 하늘조차 낯선 하늘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결코 훔쳐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다니엘 1장은 조용히, 그러나 천둥처럼 선포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는 풀무불의 불꽃 앞에서 처음으로 믿음을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식탁 위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작은 유혹 앞에서, 이미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 큰 시험이 몰려올 때 갑자기 거룩한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날, 조용한 식탁 위에서 하나님을 선택한 영혼만이 특별한 날에도, 불꽃 속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작은 유혹 앞에 무릎 꿇는 자는 큰 시험 앞에서 갑자기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먼저 마음의 결정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무엇을 속삭이든지, 손해가 파도처럼 밀려오든지 “나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 단호한 결단이 바벨론의 한가운데에서도 다니엘의 마음을 바벨론의 것이 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2장에 이르러 죽음의 그림자가 덮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분노의 칼을 빼어 들고 “꿈과 해석을 말하지 못하면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를 죽이리라!” 고 외칩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용기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불러 함께 하늘을 향해 긍휼을 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그 은밀한 비밀을 다니엘의 영혼에 부어 주셨습니다. 위기가 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제단으로 밀어 올렸습니다. 여기에 믿음의 두 번째 얼굴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모든 답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답을 가지신 그분을 아는 자입니다. 다니엘은 몰랐으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비밀을 알게 된 뒤의 다니엘을 보십시오. 왕 앞에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물으신 그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보일 수 없나이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참된 믿음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성공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풀리면 자신을 높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높임을 받는 왕좌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장, 그들의 믿음이 불꽃 앞에 선 날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우고 온 땅에 절하라 명하였습니다.  

절하지 않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겠다고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타협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한 번만 절하면 된다. 몇 초의 고개 숙임으로 목숨을 구하고, 그 뒤에 다시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는가? 살아남아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천상의 노래처럼 울립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믿음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 주시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구해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성공시켜 주시면 믿겠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충성하겠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일 뿐입니다.  

세 친구의 믿음은 달랐습니다.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절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그들은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풀무불을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불길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놀라 일어나 외칩니다. “우리가 결박하여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더냐?” 그의 눈에는 네 사람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불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불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자녀를 그 불 속에 홀로 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다니엘 1장에서 시작된 그 작은 결단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식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죽음의 위기였고, 마침내 풀무불이었습니다. 시험은 점점 커졌으나,  
그들의 하나님은 점점 더 크게 드러나셨습니다.   

1장에서는 “뜻을 정하였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3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뜻을 정한 사람은 위기가 오면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마침내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건져내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리와 이름과 재산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을 불 속에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정한 그 마음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at, 19 Sep 2026 06:37: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8]]></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9080"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6/09/2026_7.jpg" alt="" width="800" height="387"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7462" target="_blank" rel="noreferrer">[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7) 바로 가기]</a></p>

<h1><img class="aligncenter"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2/05/line.jpg" alt="line.jpg" /></h1>
<h1 class="h1 mg0" style="text-align:center;">행복의 순례 (7)</h1>
<h2 class="h3-sub c7" style="text-align:center;">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h2>
<h3 class="h3-sub c7" style="text-align:center;">-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h3>
<p style="text-align:center;">“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p>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strong>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strong>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538"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2/05/line.jpg" alt="" width="800" height="33" />

<b>7. 마르틴 루터 </b><b>— </b><b>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b>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는 제자로 부름받아 예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지만, 은 삼십에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을 넘겼습니다.

그 후 유다는 후회하며 번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배반하고 스스로 불행의 길로 간 유다를 ‘멸망의 자식’(요 17:12)으로 칭하셨습니다.

<b>배은망덕</b>

유다처럼 은혜를 입고도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지만,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망과 불행 가운데 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고 사탄의 유혹도 허락하셨느냐며 배은망덕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의 불행이 아님을 성경은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보여 주는 실제적인 순종의 경계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버리려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까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고 근심하셨습니다(창 6:6).

<b>은혜를 배반한 두 모습</b>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으면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아담처럼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독립이라면 두 번째는 거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건을 얻으려면 값을 지불하고, 일하면 보수를 받으며,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이러한 거래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래의 원리를 하나님 앞까지 들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했으니 복을 주셔야 합니다. 제가 선하게 살았으니 받아 주셔야 합니다. 제가 종교적으로 열심히 살았으니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은혜의 원리를 모르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거래가 됩니다. 그리고 16세기 독일에서 이 거래의 종교를 누구보다 처절하게 경험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습니다.

<b>하나님을 미워했던 수도사</b>

1505년, 거센 뇌우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젊은 루터는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누구보다 철저하게 수도원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철저히 살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훗날 루터는 당시를 회고하며 죄인을 심판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몸부림쳤는데 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었을까요? 루터는 은혜로 받아야 할 것을 자신의 공로로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거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더 해야 저를 받아 주실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답변이 없으셨고, 그럴수록 루터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커져 갔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저서 『노예의지론』에서 인간의 의지 자체가 이미 죄의 노예가 되었기에 본성적으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b>불가능한 하나님과의 거래</b>

기본적으로 거래가 성립하려면 양쪽이 각자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 돈을 내놓고 상대방은 자기 물건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자기 것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엄청난 재물을 드리고도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사도 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기 것을 먼저 드려서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종교적 행위조차 이미 하나님께 받은 것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래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주실 이유가 없고, 우리 역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래가 아닌 ‘오직 은혜’입니다.

<b>오직 은혜</b>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은혜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오직 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하신 말씀도 이 은혜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은혜로 받고 은혜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은혜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창조에서부터 구원과 제자의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이 은혜에서 시작하여 은혜로 이어지고 은혜로 끝납니다.

그런데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좀처럼 자신의 손을 비우지 않습니다.

“그래도 내게 하나님께 보여 드릴 만한 선한 것이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노력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b>인간의 손을 비우는 율법</b>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은 죄인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한 거래의 사다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율법의 기준을 외적인 행위의 수준으로 낮추어 자신을 의롭다고 판단하는 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처럼 ‘나는 불의하지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다’며 자신의 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행동을 넘어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추기 시작하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루터가 자신의 삶에서 처절하게 경험한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라”고 요구했고 루터는 온 힘을 다해 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행하면 또 다른 부족함이 보였고, 외적인 행동을 살피면 마음속의 죄가 보였습니다.

루터가 도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율법이 루터에게 새로운 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손에 의가 있다는 착각을 깨뜨렸습니다. 마침내 루터의 손이 비었습니다.

<b>하나님의 손을 주목시키는 은혜 </b>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어느 날 가게에 놓인 체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 주인인 할아버지가 “한 움큼 집어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가만히 있자 주인은 자신의 큰 손으로 체리를 집어 주었답니다.

그 후 어머니가 왜 직접 집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이는 “할아버지 손이 내 손보다 훨씬 크잖아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은혜는 내 작은 손에 무엇을 채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크신 손에서 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내 손에 하나님께 드릴 만한 의가 없음을 보여 주고, 복음은 죄인에게 주실 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루터는 오랫동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손에 하나님께 드릴 만한 의가 있는가?” 그러나 복음은 그의 시선을 자기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돌렸습니다.

<b>마침내 발견한 하나님의 의</b>

루터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처음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받아들여 두려워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그 거룩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비롯한 성경 말씀과 오랫동안 씨름하면서 마침내 마음에 빛이 비치듯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심판하는 무서운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훗날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치 새로 태어나 열린 문을 지나 낙원에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율법은 그의 손을 비웠고, 은혜는 그 빈손에 하나님의 의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의를 어떻게 받을까요? 그 답은 믿음입니다.

<b>은혜 안의 믿음</b>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결국 믿음이 인간이 하나님께 내놓아야 하는 새로운 조건이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순서가 중요합니다. “은혜에 의하여”,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원 역시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값을 지불하는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의를 받는 빈손과 같습니다. 믿음의 가치는 손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 손이 누구를 붙들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을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공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즉, 믿음조차도 은혜 안에서 주어지며 은혜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b>받은 자와 은혜 입은 자</b>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은혜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두 번 받았습니다. 집을 떠날 때도 받았고,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받음’은 전혀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받았지만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받았지만 감사하지 않았고, 받은 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는 달랐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19)

이제 자신에게는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달라졌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은혜 입은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행복의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받는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받은 것을 은혜로 알 때 행복이 시작됩니다.

<b>종교개혁의 도화선 </b>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곳에 거래를 위한 상(床)이 즐비했기 때문입니다.

1517년, 루터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거래를 보았습니다. 면죄부가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해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을 그대로 루터의 종교개혁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래로 바꾸려 할 때 종교가 얼마나 쉽게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지는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의 ‘거래의 상’을 뒤엎으셨다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으로 당시 교회 안에 세워진 ‘거래의 상’을 뒤엎기 시작한 셈입니다. 종교개혁은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다시 선명하게 드러낸 운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끝까지 저버리는 인간의 마지막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롬 1:28)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지막에는 영원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를 두고 하신 첫 말씀이 그토록 두려운 것입니다.

<b>마지막으로 남긴 메모</b>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마지막 메모에는 그의 긴 영적 여정을 압축하는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지다. 이것이 진실이다.”

젊은 수도사 루터는 자기 손에 의를 가득 채우려고 했습니다. 기도를 채우고, 금식을 채우고, 종교적 행위를 채우며 하나님께 보여 드릴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에 이른 루터는 자신의 손이 비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빈손이 은혜를 받는 손이었습니다. 거지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손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 빈손을 누구에게 내미느냐입니다. 루터는 마침내 자기 손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미시는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손에는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b>행복의 일곱 번째 여정</b>

이제 이번 행복의 여정을 다시 돌아봅시다.

아담도 받은 사람이었고, 가룟 유다도 받은 사람이었으며, 탕자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수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모든 것을 받고도 자신이 주인이 되려 했고, 유다는 그리스도 곁에서 사랑을 받고도 주를 저버렸으며, 탕자는 아버지가 준 재산으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루터 역시 자기 손에 의를 채워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달랐지만 불행해진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바로 “내가 주인이 되겠다, 내 힘으로 이루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시선을 ‘내가’에서 하나님께로, 내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돌립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은혜 입은 자가 행복합니다.

그래서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은혜를 아는 행복은 공로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된 안식이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은혜를 입었는가” 하는 감격이며, 받은 은혜를 거저 나누고 싶어 하는 자유입니다.

또한 구원 역시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을 받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내놓을 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의를 받습니다. 첫 번째가 ‘창조의 은혜’라면 두 번째가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의를 값없이 주신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은혜의 가장 깊고 아픈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은혜는 아무 값도 치러지지 않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 값을 우리가 치르지 않은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그 값은 어떻게 치러졌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다음 행복의 여정에서는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과 함께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겠습니다.

<b>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br /></b>]]></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18 Sep 2026 19:15: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4"><![CDATA[행복의 순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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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61. 마지막에 남는 이름, 여호와 삼마 (겔 46~48)]]></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7]]></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펼쳐든 에스겔의 마지막 세 장은 폐허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복된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서고, 그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오며, 죽었던 땅이 푸른 생명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이 긴 환상의 끝자락에 하나의 이름을 새깁니다. 여호와 삼마, 곧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뜻입니다.

46장에는 예배의 질서가 자세히 펼쳐집니다. 안식일과 초하루에 드리는 제사, 왕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 백성이 성전에 들어오고 나가는 규례들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낯설고 복잡하게 보일지라도, 그 모든 규례가 가리키는 중심은 분명합니다. 회복된 백성의 삶의 중심에는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있습니다.

구원은 단지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었던 영혼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참된 회복은 형편이 좋아지는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46장의 예배에는 계속해서 제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희생이 있었습니다. 죄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룩하신 보좌 앞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물들은 반복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희생은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마침내 한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단번에 자신을 드려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깨끗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문은 인간의 공로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피로 열립니다. 그리고 47장에 들어서면 에스겔은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발목에도 차지 않을 만큼 작은 물줄기였습니다.

그러나 천 척을 측량하자 발목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가자 무릎에 오르며, 다시 천 척을 가자 허리에 찹니다. 그리고 다시 측량하자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이 됩니다. 작게 시작된 물이 마침내 헤엄쳐야 할 강이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강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은 동쪽으로 흘러 황폐한 아라바를 지나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물이 들어가는 곳마다 죽었던 것이 살아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곳으로 생명이 흘러갑니다. 죽은 바다가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한 뒤 성전의 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나온 물이 들어갔기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생명 있는 자에게 상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먼저 달라진 다음 하나님께 가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오라. 그분이 너를 살리실 것이다.” 죽은 바다가 스스로 생명의 바다가 될 수 없듯이, 죄인도 자기 힘으로 자기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강물이 흐르자 강 좌우에는 나무가 자랍니다.

그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 열매는 먹을 것이 되고, 그 잎사귀는 약재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생명의 비밀은 나무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본래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이 흘러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을 생각하게 됩니다. 에덴에는 동산을 적시는 강이 있었고,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을 보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흐릅니다. 

성경은 잃어버린 낙원에서 시작하여 회복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죄로 생명의 길이 막혔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다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복음의 마지막은 겨우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47장 후반에는 회복된 땅의 경계가 나타납니다.

놀랍게도 이방인도 그 땅 가운데 기업을 얻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거주하며 자녀를 낳은 이방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회복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넘어섭니다.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모든 민족을 향해 확장될 은혜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48장입니다. 땅이 지파들에게 분배되고, 성소와 성읍의 자리가 정해집니다. 에스겔은 긴 환상의 마지막에 새로운 성읍의 규모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성벽의 높이도 아니고, 성전의 아름다움도 아니며, 백성의 숫자도 아니고, 그들이 얼마나 부유해졌는가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의 이름입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이 한마디가 에스겔서 전체를 뒤집어 놓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났습니다. 백성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이 구원의 최종 목적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황금길 때문도 아니고, 고통이 없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낙원은 낙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성도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놀랍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에스겔의 마지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소망은,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46장부터 48장의 흐름은 아름답습니다.

46장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47장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48장은 말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십니다.

에스겔서는 심판으로 시작하여 소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슬픔을 지나,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기쁨으로 끝납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고, 죽은 바다가 살아나며, 황폐했던 땅에 다시 백성이 거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회복보다 더 큰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손에서 떠날 때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눈을 뜨는 그날에도 그분이 거기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마지막 소망과 에스겔의 마지막 소망은 서로 만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에스겔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강도 아니었습니다. 땅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마지막에는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 주께서 무엇을 주실 것입니까?”가 아니라, “주님,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대답은 영원히 이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내가 거기 있으리라.”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18 Sep 2026 06:29: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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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60.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영광 (겔 43~45)]]></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6]]></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에스겔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광경을 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동쪽으로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동쪽으로부터 다시 돌아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보았던 회복의 절정입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에 성전을 떠났습니까? 성전이 작아서도 아니고 제사가 부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비극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부터 에스겔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질문이 성경을 관통합니다. 죄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떻게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가? 에스겔 43장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소망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은 성전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합니다. 폐허가 된 이스라엘에게 이보다 더 큰 회복의 약속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거할 곳이라”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중심은 땅도 성전도 번영도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마침내 신약의 놀라운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면,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간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 많은 백성과 함께 거하실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직후, 에스겔의 시선은 제단으로 향합니다.

에스겔 43장 후반부에는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속죄 제물을 드리는 규례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죄의 문제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함께 거하려면 죄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스겔의 제단은 성경 전체의 제사와 연결됩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반복해서 흘렀던 희생 제물의 피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은 그 모든 제사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던 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에서 제단을 지나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갔다면,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래서 에스겔 43장 마지막 말씀이 더욱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에서 제사가 드려진 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기쁘게 받으리라” 이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옵니다. 제단에서 속죄의 희생이 드려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받으십니다.

이 흐름은 복음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근거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에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5:9)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만큼 했으니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빈손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나를 받아주십시오”라고 고백합니다.

44장에 들어가면 에스겔은 특별한 문 하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온 동쪽 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리로 들어오셨음이라”

이 닫힌 문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 가운데 들어오셨다는 사실의 특별함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에스겔의 동쪽 문이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것을 증언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화목하게 하셨음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누구였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어떤 값으로 나를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셨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오셨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4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된 백성은 이전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의 회복과 복음의 삶이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신약에서도 구원은 죄 사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은 그 열매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인은 선행으로 생명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44장에는 에스겔 성전 환상의 의미를 더욱 깊게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시면서 “나는 그들의 기업이 됨이니라”(겔 44:28)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이 보여 주는 회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이나 성전보다 더 큰 복은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기업입니다.

이 진리는 복음 안에서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단순히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장 큰 선물은 건강도 성공도 천국의 황금길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잃으면 가난하지만, 많은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을 얻었다면 영원한 기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45장에서는 땅의 한 부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지도자와 백성의 삶 가운데 정의와 공평이 요구되고, 예배와 제사의 질서가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자 백성의 실제 삶도 새롭게 정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만들어 내는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복음은 단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위한 소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고 권한 것도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말한 뒤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은 은혜의 값을 지불하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드리는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에스겔 43–45장을 한눈에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고, 제단에서 속죄가 이루어지며, 백성은 다시 거룩하게 구별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내가 다시 너희 가운데 거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에스겔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거하는 것을 보았고, 성령께서는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성경의 마지막에는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 21:3)라는 선언이 울려 퍼집니다.

에덴에서 인간은 죄로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습니다. 에스겔은 떠났던 영광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됩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hu, 17 Sep 2026 07:55: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9. 폐허 뒤에 은혜로 세워진 새로운 성전 (겔 40~42)]]></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5]]></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에스겔과 함께 무너지는 장면들을 보아 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리던 그 어두운 장면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에스겔 40장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다시 높은 산으로 데려가십니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한 사람이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들고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의 문과 벽과 뜰과 방을 하나하나 측량하기 시작합니다. 폐허를 바라보던 선지자의 눈앞에 이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새로운 성전이 펼쳐집니다.

여기에 복음의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죄로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다시 세우십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심판 뒤에도 은혜가 있으며, 폐허 뒤에도 회복이 있고, 죽음의 골짜기 너머에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집이 있습니다.

에스겔 40장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측량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재고, 벽을 재고, 방을 재고, 뜰을 잽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밀하게 측량하신다는 것은 그 집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질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나는 이렇게 믿겠습니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치수를 에스겔이 정하지 않았듯이, 구원의 길도 인간이 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예수님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행도, 종교적 열심도, 도덕적 자랑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문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에는 여러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에는 분명한 구조와 경계가 있습니다. 성전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드나드는 시장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은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함을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이 동시에 얼마나 완전한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었던 것처럼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가 너무도 심각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셔야 했으며, 동시에 죄인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선언입니다.

40장을 지나 41장으로 들어가면 에스겔은 성전 내부를 봅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성전 환상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는 제단과 희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희생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단에서 수많은 희생 제물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말하듯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장차 오실 한 분을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갈보리에서 마침내 참된 제물이 드려졌습니다.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를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남보다 착했습니다”입니까? “나는 평생 교회를 다녔습니다”입니까? “나는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입니까? 아닙니다. 빈손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에스겔 41장에는 성소 깊숙한 곳, 지성소가 등장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목적입니다. 아름다운 건축도 아니고 정교한 제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것, 그것이 성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잃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비극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가장 큰 것은 낙원의 아름다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멀어졌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다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42장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겔 42:20) 오늘날 사람들은 이 경계를 지우고 싶어 합니다. 거룩함과 세속됨, 진리와 거짓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성전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거룩함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은혜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동전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뿌리는 은혜이고 열매는 거룩함입니다. 뿌리 없이 열매를 만들려 하면 율법주의가 되고, 열매 없는 뿌리를 주장하면 값싼 은혜가 됩니다.

이 환상이 주어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성전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폐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성전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폐허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폐허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다고 믿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인생에도 무너진 자리가 있습니까? 죄로 무너지고, 실패로 무너지고, 세월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며 소망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다시 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다시 세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0–42장을 읽으면 거대한 성전이 준비됩니다. 문이 있고, 뜰이 있고, 제단이 있고, 성소가 있고, 제사장의 방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직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건물이 있다고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있다고 성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 의식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가장 아름다운 성전도 빈 건물일 뿐입니다.

이것이 다음 장, 에스겔 43장을 기다리게 합니다. 마침내 선지자는 동쪽에서 돌아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때 죄 때문에 성전을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방향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무셨으며,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한계시록의 약속처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거대한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임재가, 성막과 성전에서 그림자로 나타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전의 크기에 감탄하는 데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 성전이 가리키는 분을 바라보십시오. 문을 보았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제단을 보았다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지성소를 보았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내 삶의 중심에도 계시는가?” 폐허뿐이던 곳에 새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을 당신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도 모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Wed, 16 Sep 2026 06:29: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8. 말씀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겔 37~39)]]></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4]]></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에스겔의 손이 우리를 잡고 이끄는 곳은 꽃 피고 새 우는 동산이 아닙니다. 해골이 널려 있는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햇볕에 바싹 말라 하얗게 빛나며 흩어진 뼈들, 살점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힘줄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처참한 광경 속을 선지자는 두루 거닐라 명하심을 받습니다.

그때 하늘의 음성이 울립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성의 소리는 너무나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살 수 없습니다. 조금 병든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죽은 지 오래되어 살은 썩어 없어지고 뼈마저 말랐습니다.” 즉 그곳은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난 자리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지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가 아닙니다. 교육도 아닙니다. 격려도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뼈에게 설교하라니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귀가 없는 뼈에게 말씀을 들으라니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 설교입니다. 우리는 죽은 심령을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설교자의 웅변이 영혼을 살리지 못하며, 눈물과 열심도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불가능한 일이 시작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하자 갑자기 소리가 나고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뼈가 뼈에 들어맞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입니다. 조금 전까지 흩어져 있던 죽음의 잔해가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말씀에는 죽음의 질서를 뒤집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지만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고 기록합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뼈도 있고 힘줄도 있고 살도 있고 피부도 있습니다. 외형은 완벽한데 생명이 없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있고 예배가 있고 찬송이 있고 직분이 있는데 생명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입술은 기도하지만 심장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영혼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형식은 생명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생명 자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명하십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그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그들이 살아나 일어서는데, 성경은 그들을 “극히 큰 군대”라고 부릅니다. 조금 전까지 마른 뼈였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 복음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나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죄의 무덤에서 사람을 끌어내어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중생이며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37장의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두 막대기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하나에는 유다를, 다른 하나에는 요셉 곧 에브라임을 기록하게 하시고, 두 막대기를 손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죄가 갈라놓았던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죄는 언제나 분열시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고,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으며, 심지어 인간 자신의 마음까지 찢어놓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로 만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를 화목하게 하고 서로 원수 되었던 자들을 한 몸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에스겔 시대의 다윗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은 누구입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참된 왕,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야기의 최종 목적은 단지 우리의 회복이 아닙니다. 살아난 백성이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만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을 주십니다. 이전에는 내가 내 삶의 왕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십니다.

그러나 38장에 들어가면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곡과 마곡이 등장하고 거대한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을 둘러쌉니다. 살아났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난 백성에게 전쟁이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 거듭났다고 해서 사탄이 여러분을 포기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어 있을 때에는 공격할 필요조차 없었지만 살아난 자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었기 때문에 원수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전쟁의 마지막 장면은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곡은 자신이 계획하여 올라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수많은 군대를 모으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교만한 계획조차 하나님의 주권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끌어 내리라.” 사탄은 자신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악은 결코 하나님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왕좌 맞은편에 앉아 대등하게 싸우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닙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칼이 임하며 폭우와 우박과 불과 유황이 쏟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자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거대한 군대는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산처럼 커 보입니까? 세상의 권세가 두렵습니까? 사탄의 유혹이 여러분을 에워싸고 있습니까? 적의 숫자를 세지 말고 여러분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39장에 이르면 전쟁이 끝난 뒤의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들이 버리고 간 무기를 모아 일곱 해 동안 불태웁니다.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무기가 오히려 그들의 연료가 됩니다. 원수가 파멸을 위해 가져온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백성을 위한 도구로 바뀝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섭리입니까! 

사탄이 여러분을 무너뜨리기 위해 던진 것조차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숙하게 하는 연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눈물이 기도가 되고, 실패가 겸손이 되며, 상처가 다른 사람을 품는 긍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면 원수의 무기조차 성도의 유익을 위한 장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39장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목적을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거룩한 이름을 알게 하리라.” 에스겔 37–39장의 중심에는 결국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왜 마른 뼈를 살리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왜 흩어진 백성을 하나로 모으십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왜 곡을 무너뜨리십니까? 온 열방으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면류관을 쓰게 되는 날에도 우리는 그 면류관을 자신의 머리에 자랑스럽게 붙들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앞에 던지며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오직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심령이 오늘 마른 뼈처럼 느껴집니까? 기도해도 아무 감동이 없고, 말씀을 읽어도 마음이 메마르며,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생명력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죽은 뼈 속에는 생명의 씨앗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바람을 구하십시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말씀과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가장 메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너무 오래 죽어 있어서 살리지 못할 영혼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앞에 곡과 마곡 같은 문제가 서 있습니까? 

여러분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38장의 마지막은 곡의 승리가 아니며, 39장의 마지막도 원수의 승리가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죽음의 골짜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성령의 부으심으로 끝납니다. 처음에도 성령이 생명을 주셨고 마지막에도 성령께서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마른 뼈보다 강한 생명, 분열보다 강한 화목, 곡과 마곡보다 강한 왕, 죄와 사망보다 강한 구주가 우리에게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른 뼈여, 말씀을 들으십시오! 죽은 심령이여, 성령의 바람을 구하십시오! 두려워하는 성도여, 왕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무덤이 아무리 깊어도 그리스도의 음성보다 깊지 않습니다. 원수가 아무리 강해도 만군의 여호와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절망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마른 뼈가 군대가 되고, 하나님께서 싸우시면 원수의 무기가 장작이 되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으시면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가 됩니다. 형편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성의 음성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생명의 말씀이 당신도 회복시킬 것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ue, 15 Sep 2026 06:52:4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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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3]]></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9069"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6/09/2026_6.jpg" alt="" width="800" height="387"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7342" target="_blank" rel="noreferrer">[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6) 바로 가기]</a></p>

<h1><img class="aligncenter"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2/05/line.jpg" alt="line.jpg" /></h1>
<h1 class="h1 mg0" style="text-align:center;">행복의 순례 (6)</h1>
<h2 class="h3-sub c7" style="text-align:center;">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h2>
<h3 class="h3-sub c7" style="text-align:center;">-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h3>
<p style="text-align:center;">“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p>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
<strong>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strong>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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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6. 존 칼빈 </b><b>— </b><b>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b>

“이 작은 모형 하나도 저절로 존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저 거대한 우주는 어떻겠는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뉴턴이 무신론자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방 안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천천히 돌도록 정교하게 만든 태양계 모형이 놓여 있었습니다.

친구가 감탄하며 “누가 이걸 만들었나?”라고 묻자, 뉴턴은 담담히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부속품들이 우연히 결합해서 생긴 거라네.”라고 답했습니다. 친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어이없어하자, 뉴턴은 위와 같이 되물었다고 합니다.

뉴턴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작은 물건 하나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고 하면서, 왜 훨씬 놀라운 질서를 가진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는 창조주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요?

<b>최초의 진리</b>

성경은 온 인류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진리를 엄중히 선포함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한 문장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유일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명과 능력, 선과 복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창조만 하시고 손을 떼신 분도 아닙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을 아시며 역사의 모든 순간을 다스리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섬세한 주권에 대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예수님도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은하계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 세미하게 살피시고 돌보시는 분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본질적인 관계를 보게 됩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을 존재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해 존재하며, 그분으로부터 공급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피조물이 이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이 온 우주의 평화를 위한 영적 질서이고, 이 진리 안에 머물 때 피조물은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b>진리의 대적자 </b>

그러나 이 영원한 진리와 질서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 14:13-14)

이사야 14장은 역사적으로 바벨론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 나타난 극단적인 교만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탄의 반역을 예시하는 본문으로 읽혀 왔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탐한 것, 그것이 반역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인간에게도 이어졌습니다.

<b>하나님과 같이 되어라</b>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에덴에서 뱀을 통해 사탄이 인간에게 건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사탄은 그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이 말에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서려는 욕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믿었고, 결국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불행 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불행해지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행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행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순간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든 종교개혁자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입니다.

<b>꼭 알아야 할 두 가지 지식 </b>

종교개혁의 교과서로 불리는 칼빈의 대표작 『기독교강요』는 매우 중요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가진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거의 전적으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칼빈은 이 두 지식이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자신을 바르게 알아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일까요?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창조주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존재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생명을 받았고 몸을 받았으며, 공기와 먹을 것과 살아갈 시간을 받았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과 동산과 아내를 받았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창조주로 안다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피조물로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그분께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 사실을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받은 자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b>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b>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지식을 자랑하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

이 질문 앞에서는 인간의 자랑이 작아집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조차 먼저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던 다윗은 성전을 위해 엄청난 재물을 준비하고도 드린 자가 아닌 받은 자로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가진 자나 드린 자이기 전에 우리는 먼저 받은 자입니다. 칼빈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받은 것을 받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받았으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재능을 받았으면서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자랑하며, 기회와 능력을 받았으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여깁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행복의 근원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b>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b>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첫 번째 복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빈곤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자기 의가 없고, 자신 안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영적 부요함이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창조의 복된 질서였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야 하는 인간 곁에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짜 불행은 모든 것을 받아야 하는 피조물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데 있습니다.

<b>생수의 근원을 떠나 웅덩이를 판 악</b>

그렇다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행복도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여전히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며,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바람 자체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을 피조물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고, 성공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사람에게서 궁극적인 만족을 얻으려 하고, 건강만 붙들면 죽음의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의 창조주가 되어 줄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에게 무한한 행복을 요구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조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우상 공장’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우상은 손에서 만들어지기 전에 마음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엇인가를 향해 “이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기대하며 그것에 궁극적인 만족을 요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피조물을 올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생수의 근원을 떠났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물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입니다.

<b>두 아들이 잃어버린 행복</b>

예수님의 탕자 비유는 이 문제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으로 받은 뒤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의 것으로 행복해지려고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깨닫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집을 떠날 때의 그는 자기 것을 가지고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에게 받아야 살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가난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풍성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또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맏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었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내가 섬겼습니다. 내가 명을 지켰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행복하려 했습니다. 맏아들은 자기의 것으로 아버지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했습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자기 것에 초점을 맞춘 중심은 같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잃고 잔치에 들어갔지만, 자기 의로 가득했던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 사람보다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영적 가난을 깨닫기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b>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비극 </b>

여기에서 칼빈의 인간 이해는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그는 죄가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마음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입니다.

전적 타락은 인간이 가능한 모든 악을 다 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인간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인간은 행복의 방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그 방향을 되돌릴 능력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의 사건 뒤에 하신 말씀도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놀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종교적 노력을 더 보태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칼빈도 이것을 교리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편 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회심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굴복시키시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드셨다는 취지로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그 고백의 주어입니다. 칼빈은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굴복시키셨다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방향을 바로잡아 하나님께 돌아오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야 합니다.

<b>하나님께 심장을 드린 칼빈</b>

훗날 칼빈을 상징하게 된 문양에는 펼친 손 위에 심장을 올려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습은 이번 행복의 여정과도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심장도 생명도 존재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조차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이로써 『기독교강요』 첫머리의 두 지식이 다시 만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그분께 있음을 아는 것이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아 살아가는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그분께 돌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b>행복의 여섯번째 여정</b>

이제 다시 에덴의 나무 앞으로 돌아가 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 거짓말에 매료되었습니다. 받는 자가 아니라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행복을 받는 대신 스스로 행복의 근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였고,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으며, 충만함이 아니라 결핍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은 피조물에서 행복을 얻으려 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달라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같은 착각이 있습니다. 받아 살아가야 할 피조물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는 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느냐입니다.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행복의 방향만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그 방향을 되돌릴 능력마저 잃었습니다.

인간이 다시 행복의 길로 돌아가려면 하나님께 받는 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죄인에게 어떻게 다시 행복의 길을 열어 주실까요?

다음 행복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자신의 종교적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몸부림쳤던 마르틴 루터를 만나려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b>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b>]]></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Mon, 14 Sep 2026 20:15: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4"><![CDATA[행복의 순례]]></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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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57. 잃어버린 양에게 새 마음을 주시는 목자 (겔 34~36)]]></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2]]></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펼쳐든 에스겔 본문을 통해 길 잃은 양과 목자에 대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길을 잃은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더 열심히 걸으라는 충고가 아닙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양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찾아오는 목자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34장에는 목자는 많았지만 양을 찾는 목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먹였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으며, 상한 자를 싸매지 않았고, 쫓기는 자와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산과 골짜기로 흩어졌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길을 잃은 양에 비유합니다.

문제는 단지 우리가 조금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잃었는데 돌아갈 길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양이 목자를 찾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이야기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내려오신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발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내가 좋은 꼴로 먹이고”,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고, 상한 자를 싸매며, 병든 자를 강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하십니까? “내가.” 에스겔 34장의 복음은 인간의 결심보다 먼저 하나님의 행동을 보여 줍니다. 

양이 너무 멀리 갔다고 목자가 포기하지 않으며, 가시에 찔렸다고 버리지 않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쓸모없다 하지 않습니다. 좋은 목자는 가장 건강한 양만 사랑하는 목자가 아니라 상한 양을 찾아오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런데 에스겔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다윗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다윗은 누구입니까? 이 말씀은 다윗의 집에서 오실 참된 왕,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목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한 분이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단지 길을 알려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그분이 찾아오셨고,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양이 죽지 않도록 목자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우리가 얻을 수 없었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사랑이며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34장이 누가 우리를 찾는가를 보여 준다면, 35장에서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35장에는 세일 산, 곧 에돔이 등장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래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무너졌을 때 그들은 기뻐했고 이스라엘의 땅을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게로 돌아와서 내 기업이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산에서 빠진 한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에돔은 땅만 보았지만 그 땅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해졌다고 하나님까지 약해진 것은 아니었고, 예루살렘이 무너졌다고 하나님의 언약까지 무너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를 보고 “이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끝났다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35장의 심판 뒤에 36장의 회복이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산들을 향하여 다시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으며 사람들이 돌아와 성읍을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땅만 회복한다고 인간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세워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같은 죄를 반복할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만으로 인간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집을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나라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지고 가는 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도 함께 따라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만 새롭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더욱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돌 같은 마음을 향하여 “조금 더 부드러워져라”고 명령만 하지 않으십니다. 돌을 꺼내시고 새 마음을 주십니다. 여기에 은혜의 깊이가 있습니다. 죄인은 단지 교육이나 정보가 부족한 사람이 아니며, 조금 더 강한 의지만 필요한 사람도 아닙니다.

새 마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돌 같은 마음은 설교를 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감사하지 않으며, 죄를 지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자신의 죄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돌을 꺼내시고 살아 있는 마음을 넣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마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순서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면 새 마음을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새 마음을 주시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먼저 은혜가 오고 그다음 순종이 따라옵니다.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은 인간에게 단지 새로운 규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36장에는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이 우리의 공로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매일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가장 깊은 기초는 인간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34장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고, 35장에서는 원수들이 우리를 삼키려 했으며, 36장에서는 우리의 마음마저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 대답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를 찾아갈 수 없었기에 목자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바꿀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거룩하게 살 수 없었기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새로운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길 잃은 양에게 지도를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직접 찾아오는 것입니다. 복음은 돌에게 부드러워지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아 있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길 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길 잃은 인간을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고백은 “내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셨습니다”입니다. 

“내가 나를 바꾸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바꾸셨습니다”입니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겠습니다”라는 결심보다 더 깊은 곳에는 “선한 목자께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혹시 자신이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자에게 너무 먼 양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너무 굳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바꾸지 못하실 만큼 단단한 마음도 없습니다.

양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양이 길을 잘 찾기 때문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씻겨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며, 거룩한 영을 우리 안에 두시는 선한 목자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양의 목자이시면서 한 양의 목자이십니다. 모든 양을 위해 죽으신 분이시고 당신을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Mon, 14 Sep 2026 07:41: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6. 죽음을 넘어 들려오는 생명의 음성 (겔 30~3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1]]></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에스겔 30장부터 33장은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우리 모두를 죽음 앞에 세웁니다. 그때 비로소 그 죽음을 넘어 우리 모두가 마땅히 들어야 할 하나님의 생명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명심하십시오. 사람은 본성적으로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지를 망각합니다. 왕관을 쓰면 무덤을 잊고, 재물이 쌓이면 죽음을 잊으며,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면 언젠가 그 박수 소리가 멎을 날을 잊습니다.

3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기서 그날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애굽은 강했고 주변 나라들은 그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애굽의 힘도 그를 의지하던 나라들도 함께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팔을 꺾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의 팔은 힘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그 팔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꺾으시면 아무도 다시 붙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인간의 힘이 죄악한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힘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를 붙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내일은 나와 함께 쓰러질 수 있습니다.

31장에서는 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앗수르는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과 같았습니다. 가지는 아름다웠고 키는 높았으며 그 꼭대기는 구름 사이까지 솟았습니다. 많은 민족이 그 그늘 아래 거했습니다.

그 나무는 너무나 아름답고 거대하여 에덴의 나무들조차 시기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높아진 것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높아진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나무가 물을 스스로 만들었습니까? 뿌리가 자기에게 생명을 주었습니까? 하늘에서 비를 명령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은 자가 어느 순간 자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여기까지 올려 주셨는지를 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리십니다. 그 가지들이 산과 골짜기에 떨어지고 그 그늘 아래 살던 민족들이 떠납니다.

어제까지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나무가 오늘은 땅에 쓰러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영광은 얼마나 빨리 변합니까? 오늘의 박수가 내일의 침묵이 되고, 오늘의 건강이 내일의 병상이 되며, 오늘의 재물이 내일 다른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한 것처럼 계획하지만 우리는 내일의 호흡조차 스스로 보장할 수 없습니다. 32장에 이르면 분위기는 더욱 어두워집니다. 애굽의 바로는 자신을 젊은 사자처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다 가운데 요동하는 큰 짐승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그물로 끌어올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바로는 죽음의 세계로 내려갑니다. 그곳에는 이미 앗수르가 있습니다. 엘람도 있습니다. 메섹과 두발도 있습니다. 에돔의 왕들도 있습니다. 한때 세상을 떨게 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곳에 누워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그림입니까? 세상에서는 왕과 백성이 달랐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달랐고, 정복자와 포로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이 세워 놓은 계급표를 찢어 버립니다. 왕도 죽습니다. 장군도 죽습니다. 부자도 죽습니다. 무덤에는 왕좌가 없습니다.

32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자랑하는 것이 죽음의 문을 넘어갈 수 있습니까? 재물이 따라갑니까? 명예가 따라갑니까? 사람들의 박수가 따라갑니까? 아무것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덤 앞에 세워 놓고 말씀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33장에서 놀라운 음성이 들립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30장에서 심판을 말씀하셨던 하나님, 31장에서 교만한 나무를 쓰러뜨리셨던 하나님, 32장에서 바로를 죽음의 세계로 내려보내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죄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살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다시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은 성벽 위에서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칼이 오는 것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백성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설교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위험을 보고 나팔을 부는 사람입니다.

죄인을 향한 복음의 외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하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필요하며, 죄가 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33장에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과거에 의로웠다는 사실이 현재의 배교를 정당화하지 못하고, 과거에 악했다는 사실도 회개하는 죄인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말씀하십니다. “돌이키라!” “너는 과거에 무엇이었느냐?”보다 더 긴급한 질문은, “너는 지금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어디로 돌이켜야 합니까? 단지 조금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종교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회개의 길 끝에는 한 분이 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0장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며, 31장의 인간의 교만과 반대로 자신을 낮추신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32장의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가셨으나 죽음에 붙잡히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높아지려다가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면서도 하나님처럼 되려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에 32장의 어두운 죽음의 그림을 넘어서는 복음의 빛이 있습니다. 앗수르도 죽었습니다. 바로도 죽었습니다. 세상의 왕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죽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죽어도 사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30장은 말합니다. 심판의 날이 옵니다. 31장은 말합니다. 높아진 인간은 낮아집니다. 32장은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섭니다. 그러나 33장은 외칩니다. “돌이켜 살라!”

복음은 죽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심판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심판과 죽음보다 더 크신 구주가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복음이 바로 생명의 음성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도 아니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느냐도 아닙니다. 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죽음은 세상에서 얻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서 영원한 생명까지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넘어 들려오는 생명의 음성에 귀기울이십시오. 

“돌이켜 살라!”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un, 13 Sep 2026 05:51: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5.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교만 (겔 27~29)]]></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20]]></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펼쳐든 에스겔 세 장에는 인간의 교만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27장에는 세계의 부를 가득 실은 두로의 배가 깊음 속에 가라앉고, 28장에는 자신을 신이라 높인 두로의 왕이 먼지 속으로 떨어지며, 29장에는 나일 강물을 바라보며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외치던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갈고리에 꿰어 끌려 나옵니다.

사람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은 빈손이 아니라 손이 가득 찰 때일 수 있습니다. 실패의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성공의 높은 언덕 위에서는 자기 자신을 우러러보기 쉽습니다. 빈손으로 서 있을 때는 은혜를 구하나, 많은 것이 손에 들어오면 그것이 본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27장에서 두로는 한 척의 아름다운 배로 묘사됩니다. 그 배는 평범한 배가 아닙니다. 가장 좋은 나무로 만들고 아름다운 천으로 돛을 달았으며,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노를 젓고 세계 각지의 보화가 그 안에 실려 있었습니다. 다시스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드단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가 두로와 무역했습니다. 

은과 철과 주석과 납, 말과 상아와 보석과 향품과 곡식과 포도주가 두로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두로는 세상의 부가 모이는 항구였습니다. 두로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배가 침몰합니다.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르게 함이여 동풍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너를 무찔렀도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배에는 재물이 가득했고 숙련된 선원도 있었으며 세계와 연결된 무역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 번의 폭풍을 막아 주지는 못했습니다. 배 안에 얼마나 많이 실려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배가 무엇 위에 떠 있는가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산과 학식과 명예와 인맥을 가득 싣고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영혼을 영원까지 데려다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배를 얼마나 크게 만들었는지를 묻습니다. 복음은 그 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27장의 비극은 두로가 가진 것이 많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28장에 들어가면 두로의 화려함 뒤에 숨어 있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여기에 죄의 가장 깊은 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인간에게 던진 유혹도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 없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두로의 통치자는 지혜와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부가 그를 하나님께 낮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계단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잊은 성공은 교만의 연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내가 똑똑해서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는데 “내가 관리해서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는데 “내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과 수고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생명도, 능력도, 시간도, 기회도 먼저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이 한마디 앞에서 인간의 자랑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받은 것이라면 감사해야 할 이유는 많지만 자랑할 이유는 없습니다. 교만은 받은 것을 받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데서 시작되고, 겸손은 내가 받은 존재임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28장에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로 왕을 향한 애가 가운데 에덴과 그룹과 하나님의 산을 연상시키는 장엄한 언어가 사용됩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이 말씀을 곧바로 사탄의 기원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두로 왕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연상시키는 언어를 통해 그의 교만이 얼마나 근원적인 인간의 반역을 닮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받은 아름다움과 지혜가 오히려 자기 영광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선물은 그대로 있었지만 주신 분을 잊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29장에 이르면 교만은 더욱 노골적인 목소리를 냅니다. 

이번에는 애굽의 바로입니다. 바로는 나일강 가운데 누운 큰 악어처럼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놀라운 말입니다. “내가 만들었다.” 이것이 교만이 흘러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다가 그것을 자기 것이라 부르고,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다가 마침내 자신이 그것의 창조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자신을 나일강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바로가 하나님의 갈고리에 끌려 나옵니다. 인간은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입니다. 왕에게 왕관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오늘 하루의 호흡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27장부터 29장은 인간의 교만이 자라나는 세 단계를 보여 줍니다. 27장에서 인간은 말합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28장에서는 말합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29장에 이르면 마침내 말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며 내가 만들었다.” 즉 소유의 자랑이 자기 영광으로 발전하고, 자기 영광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는 순간 두로의 배는 침몰하고, 교만한 왕은 왕좌에서 내려오며, 나일강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던 바로는 갈고리에 끌려 나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은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교만과 정반대의 길을 걸으신 한 분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두로의 왕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처럼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두로는 높아지려고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셨습니다. 바로는 “내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왕관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단순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범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로 왕과 바로를 손가락질하지만 그들의 교만은 우리 마음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내가 신이다”라고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 없이 결정하고, 하나님 없이 계획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역시 마음속으로 얼마나 자주 말합니까? “내 인생이다.” “내 돈이다.” “내 능력으로 이루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의 자랑은 모두 무너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의 첫 고백은 “내가 이루었다”가 아닙니다. “내가 받았습니다.” 생명도 받았습니다. 은혜도 받았습니다. 용서도 받았습니다. 영생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은혜로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27장의 배는 침몰했습니다. 28장의 왕은 낮아졌습니다. 29장의 바로는 자신이 만든 적도 없는 강을 자기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 선 사람은 더 이상 “내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많은 것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성공했다면 자신을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그리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날에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내가 이루었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나는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로 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at, 12 Sep 2026 06:31:4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4. 모든 것을 잃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 (겔 24~26)]]></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19]]></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펼쳐든 에스겔 세 장에는 인간이 굳게 붙들었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24장에서는 예루살렘과 그 거룩한 성전이 떨며 무너지고, 25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재앙을 보며 손뼉을 치던 주변 민족들이 심판의 칼 앞에 엎드러지며, 26장에서는 부와 힘으로 하늘을 찌르던 두로가 바다의 파도처럼 몰려오는 민족들에게 짓밟힙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흔드실 때, 인간이 “영원하리라” 외치던 것들은 하나같이 먼지처럼 땅에 떨어집니다. 24장은 핏빛처럼 엄숙한 날짜로 문을 엽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에게 명하십니다. “그날을 기록하라” 바로 그날, 바벨론의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그날을 기념하듯, 역사의 시계가 멈춘 듯한 그 순간이 기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녹슨 가마에 비유하십니다. 고기를 그 안에 넣고 불을 피우나, 가마에 깊이 스민 녹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맹렬한 불길이 필요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죄가 얼마나 뼈 속까지 스며들어 굳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무시무시한 그림입니다. 마침내 죄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붙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양심이 조그만 불꽃처럼 책망하나, 반복하여 그 음성을 거절하면 마음은 점점 무뎌지고, 마침내 죄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사슬로 묶어 버립니다. 그러나 24장에서 더욱 가슴을 찢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그것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날, 에스겔의 아내가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공개적인 애도의 의식을 금하십니다. 이는 선지자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개인적 슬픔 자체가, 곧 예루살렘에 임할 더 큰 슬픔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개인적 눈물이 민족의 눈물을 미리 보여 주는 거울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에게도 “눈에 기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서 있는 한 예루살렘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을 사랑했으나, 어느 순간 성전을 주신 하나님보다 성전 자체를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종교가 빠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하나님 대신 붙드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신할 수 없고, 직분이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으며, 오랜 신앙의 연수가 참된 회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성전은 거룩했으나, 성전이 그들을 구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치시는 것은 하나님이 패배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백성이 성전을 우상처럼 섬기므로, 그 거짓 피난처를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거룩해 보여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25장으로 시선이 옮겨지면, 예루살렘 주변의 나라들이 등장합니다.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했습니다. 특히 암몬은 하나님의 성소가 더럽혀지고 유다가 포로로 끌려갈 때 “아하!” 하며 조롱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심판을 보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도 선언하십니다. “너희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다른 사람의 실패는 나의 의가 아닙니다. 다른 이보다 죄를 덜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의 무너짐을 구경하며 자신이 굳건히 서 있다고 여기는 자는, 자기 발밑의 균열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하는 데는 놀라울 만큼 밝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먼저 그 손가락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세우게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은 어떻습니까?”가 아니라, “주님, 나는 어떻습니까?” 25장은 엄숙히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무너짐을 즐거워하지 말라. 다른 이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를 구경거리로 만들지 말라. 

타인의 실패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교만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며, 조롱이 아니라 떨리는 자기 성찰입니다. 그리고 26장에서는 당시 지중해의 화려한 상업 도시 두로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두로는 기뻐합니다. 교역의 길이 열리고 더 많은 부가 자기에게로 흘러오리라 여긴 것입니다. 다른 이의 몰락을 자신의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두로를 향해 외치십니다. “내가 여러 민족을 올라오게 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몰아오듯 너를 치게 하리라” 두로는 바다와 성벽과 재물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요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화려한 도시가 결국 맨바위처럼 드러나고, 어부들이 그물을 펴는 쓸쓸한 곳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두로의 문제는 부자가 된 것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부를 “하나님 없이도 안전할 수 있다”는 증거로 삼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재물은 좋은 종이 될 수 있으나, 무서운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은 집을 살 수 있으나 평안을 살 수 없고, 의사를 부를 수 있으나 생명을 명령할 수 없으며, 사람을 모을 수 있으나 죽음 앞에서 한 영혼을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24장부터 26장에는 세 종류의 거짓 피난처가 나타납니다. 24장의 예루살렘은 성전을 붙들었습니다. 25장의 민족들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교만을 붙들었습니다. 26장의 두로는 부와 성공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 모든 것은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무엇이 끝까지 남습니까? 여기서 복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시며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람이 세운 성전은 무너질 수 있지만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는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두로의 재물도 그 도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가지기 위해 싸우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랑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죄인이며 동일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랑을 무너뜨리고 오직 은혜만 남깁니다. 에스겔은 하루아침에 “눈에 기뻐하는 것”을 잃었습니다. 예루살렘도 성전을 잃었고 두로도 결국 자신이 자랑하던 영광을 잃게 됩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젊음도 지나가고 건강도 쇠하며, 재물도 두고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도 언젠가는 놓아야 하고, 마지막에는 세상에서 얻었던 이름과 자리까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깊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도 내게 남는 분이 누구신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이 우리 손에서 하나씩 빠져나가는 날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죽음조차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주는 가장 큰 복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가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빈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전부이시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부요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도 잃을 수 없는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11 Sep 2026 06:39: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3. 무너진 틈 앞에 선 대속의 사랑 (겔 21~2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18]]></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펼쳐든 에스겔서에는 세 가지 두려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21장에는 심판의 칼이 번쩍이고, 22장에는 예루살렘의 죄가 드러나며, 23장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아간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죄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삶을 무너뜨리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21장에서 하나님의 칼은 이미 칼집에서 뽑혔습니다. 갈고 닦여 번쩍이는 칼은 심판이 더 이상 먼 미래가 아니라 문 앞에 왔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긴다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21장 후반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갈림길에 섭니다. 한 길은 암몬의 랍바로, 다른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데 결국 그의 손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눈에는 바벨론 왕이 역사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는 심판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인간의 왕좌가 무너지고 왕관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심판의 말씀 한가운데 한 줄기 소망이 비칩니다.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시드기야의 왕권은 심판받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왕들은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실 참된 왕에 대한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그 왕권의 궁극적인 성취를 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2장에 들어서면 왜 그 칼이 예루살렘을 향했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피 흘린 성읍”이라고 부르십니다. 지도자들은 피를 흘리고,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선지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백성들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억압했습니다.

죄는 몇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왕좌와 성전과 거리와 가정까지 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루살렘을 풀무 속의 찌꺼기에 비유하십니다. 심판의 불은 우리가 무엇처럼 보였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22장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여기서 “틈에 선다”는 것은 무너진 성벽을 문자적으로 수리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죄로 무너져 가는 백성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죄를 책망하며, 백성을 하나님께 돌이키고, 심판 앞에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신실한 지도자와 중보자의 역할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백성이 하나님에게서 떠날 때 누군가는 그들을 따라 죄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22장에서는 선지자도 거짓되었고, 제사장도 타락했으며, 지도자도 탐욕에 빠졌습니다. 

백성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하나님께 돌이키며 그 무너진 자리에 서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틈에 설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말씀의 일차적인 뜻은 “죄인들 가운데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 받을 대속자를 찾았으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며 백성을 위해 중보하고 공동체를 의롭게 세울 사람이 없었다는 하나님의 고발입니다. 그 결과 심판을 막을 길이 없었고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에 쏟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는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더 깊은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완전히 설 수 있는가?” 23장은 그 문제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앗수르와 바벨론과 애굽의 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더 의지했습니다. 죄는 단순히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이 사랑했던 바로 그 나라들이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가 됩니다. 죄는 처음에는 연인처럼 찾아오지만 마지막에는 주인이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죄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죄가 우리를 끌고 갑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이 결국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21장부터 23장의 흐름을 거꾸로 따라가면 죄의 길이 선명해집니다. 

23장에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고, 22장에서는 그 죄가 삶과 공동체를 뒤덮었으며, 21장에서는 마침내 심판의 칼이 뽑혔습니다. 마음의 배신이 삶의 부패를 낳고, 삶의 부패는 결국 심판을 불러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심판의 칼 앞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22장의 유다에는 무너진 틈에 바로 설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인간 지도자의 실패를 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완전한 중보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별해야 합니다. 

에스겔 22장의 “틈에 설 사람”이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의 모든 지도자가 실패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었던 그 절망은, 신약의 빛 아래에서 죄인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시는 완전한 중보자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21장에서 인간의 왕은 왕관을 잃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왕이십니다. 22장에서 신실한 지도자와 중보자가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는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23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사랑을 배반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는 단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죄를 지나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속자에게 그 형벌이 임했습니다. 죄인은 살았지만 죄의 값은 지불되었습니다. 오, 갈보리를 바라보십시오! 21장에서 칼집에서 뽑힌 심판의 칼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정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무덤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시드기야의 왕관은 땅에 떨어졌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고 그 왕좌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21장은 묻습니다. “누가 참된 왕인가?” 22장은 묻습니다. “누가 무너진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23장은 가장 깊은 곳을 찌릅니다. “너의 마음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보다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을 하나님보다 의지하며, 영원한 것보다 사라질 것에 마음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복음의 놀라움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을 때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두 팔을 벌리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변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다시 묻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한 것들을 내려놓고,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예루살렘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세상은 언젠가 우리 손에서 사라집니다. 젊음도 지나가고, 재물도 남겨 두고 가며, 사람의 박수도 멎고, 인간의 왕관도 결국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세상의 사랑은 당신을 붙들다가 결국 놓아 버리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당신을 붙드시고 영원까지 놓지 않으십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hu, 10 Sep 2026 07:01: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2. 영원한 왕께 돌이키고 살라 (겔 18~20)]]></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17]]></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죄악된 사람의 본성과 하나님의 사랑의 경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자기 죄를 남의 어깨 위에 얹는 일에 놀라울 만큼 능숙합니다. 실패하면 환경을 원망하고, 넘어지면 사람을 탓하며, 때로는 오래된 조상까지 끌어와 죄를 가리려 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그림자도 숨을 곳이 되지 못합니다. 에스겔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향하여 외치십니다. “돌이켜 살라.” 그러나 19장에서는 유다의 왕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세대를 거듭하여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18장은 인간의 책임을 선언하고, 19장은 인간의 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주며, 20장은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자신들의 형편을 조상의 죄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숨고 있던 마지막 변명의 문을 닫으십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아버지의 죄가 나의 변명이 될 수 없고, 아버지의 의가 나의 구원이 될 수도 없습니다. 

경건한 부모가 있다고 내가 자동으로 경건해지는 것도 아니며, 훌륭한 교회에 다닌다고 교회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의 성경책은 물려받을 수 있지만 부모의 믿음은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의 책임을 말씀하시는 목적은 그를 절망으로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심판의 말씀 한가운데에서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울려 퍼집니다. 여러분, 죄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죄는 자유를 약속했지만 쇠사슬을 주었고, 기쁨을 약속했지만 눈물을 남겼으며, 생명을 약속했지만 결국 무덤을 향해 끌고 갑니다. 

그런데도 왜 죽음의 길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더 놀라운 명령을 하십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너희에게 지을지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멈추어야 합니다.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기에게 새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까?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스스로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18장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돌이켜라. 새 마음을 가지라. 그리고 살라.

그런데 19장에 들어서면 한 편의 슬픈 장송곡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왕들을 젊은 사자에 비유하십니다. 한때 그들은 힘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 왕들이 나라를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사자들은 하나씩 그물에 걸려 사슬에 묶이고 이방 나라로 끌려갑니다. 백성들이 의지했던 사자들이 포로가 된 것입니다. 강한 왕이 나타나면 나라를 구할 것 같았습니다. 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구원할 것처럼 보였던 왕 자신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에게 왕관을 씌운다고 구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19장 후반에는 또 다른 그림이 나타납니다. 한때 물가에 심겨 가지가 무성했던 포도나무가 뿌리째 뽑힙니다. 

왕의 홀처럼 높이 솟았던 강한 가지들은 동풍에 말라 불에 타 버립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슬프게 노래합니다. “이제는 그에게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왕의 홀이 사라졌습니다. 인간이 의지하던 왕좌가 비었습니다. 

유다의 왕관은 땅에 떨어졌고 다윗 왕조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간의 왕에게 마지막 소망을 걸면 결국 애가를 부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얼마나 자주 사람에게 구원을 기대합니까? 

강한 지도자, 많은 재물, 좋은 환경, 영향력 있는 사람 하나가 내 삶을 안전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깨는 영혼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너무 약합니다. 사람은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구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19장의 왕들이 무너진 이유는 단지 그들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백성들과 똑같이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강한 왕이 아니라 죄가 없는 왕, 우리 대신 심판을 받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왕입니다.

그러므로 18장부터 20장까지 읽으면 인간의 모든 문이 하나씩 닫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8장은 “남을 탓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19장은 “인간의 왕도 너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20장은 “너 자신의 마음도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20장을 읽다 보면 인간의 반역보다 더 끈질기게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그들이 신실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과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했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신실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예언은 우리를 더 놀라운 약속으로 데려갑니다.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너희에게 지을지어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3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18장에서 요구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명령은 우리의 책임을 드러내고, 은혜는 우리의 무능을 해결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돌이키라고 명하실 뿐 아니라 은혜로 돌이킬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 마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19장의 빈 왕좌를 채울 새로운 왕도 필요합니다. 유다의 사자들은 사슬에 묶여 끌려갔고 왕의 가지들은 불에 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비워 두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차매 다윗의 자손으로 한 왕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다의 왕들은 자기 나라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왕들은 죽음에게 왕관을 빼앗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9장의 왕들은 사슬에 묶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19장의 왕들의 왕관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시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여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왕께서는 성령으로 자기 백성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에스겔 18장부터 20장의 세 장이 하나로 모입니다. 18장은 말합니다. “너는 돌이켜야 한다.” 19장은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왕은 너를 구원할 수 없다.” 20장은 말합니다. “그리고 너의 옛 마음은 계속 하나님을 거역한다.”

그래서 복음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줍니다. 새 마음과 새 왕입니다. 성령께서는 돌 같은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새 마음을 가진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죄 뒤에 숨지 마십시오. 사람을 구주로 삼지도 말고 자신의 결심을 의지하지도 마십시오. 죄에서 돌이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살라.” 19장의 빈 왕좌를 바라보며 우리는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다스리고 구원할 것인가?” 20장의 반복되는 반역을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누가 이 돌 같은 마음을 바꿀 것인가?”

복음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에 새로운 왕을 모십니다. 그 왕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이 아니라 새 마음이며, 더 강한 인간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돌이키십시오. 그 왕께로 오십시오. 그리고 사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Wed, 09 Sep 2026 06:29: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12]]></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9052"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6/09/2026_5_1.jpg" alt="" width="800" height="387"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7235" target="_blank" rel="noreferrer">[크리스천투데이 행복의 순례 칼럼 (5) 바로 가기]</a></p>

<h1><img class="aligncenter"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2/05/line.jpg" alt="line.jpg" /></h1>
<h1 class="h1 mg0" style="text-align:center;">행복의 순례 (5)</h1>
<h2 class="h3-sub c7" style="text-align:center;">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h2>
<h3 class="h3-sub c7" style="text-align:center;">-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h3>
<p style="text-align:center;">“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p>
1. 어거스틴 — 왜 우리는 행복의 순례자가 되었는가
2. 존 번연 — 세상의 행복은 왜 시한부인가
3. 조나단 에드워즈 —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다
4. 존 웨슬리 — 종교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strong>5. 조지 휫필드 —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strong>
6. 존 칼빈 —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7. 마르틴 루터 — 행복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8. 찰스 스펄전 — 영원한 행복의 열쇠는 영원한 속죄다
9. 마틴 로이드 존스 — 참된 복음이 낳는 참된 행복
10. 매튜 헨리 —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비결
11. A.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538" src="http://www.bog.or.kr/wp-content/uploads/2022/05/line.jpg" alt="" width="800" height="33" />

<b>5. 조지 휫필드 </b><b>— </b><b>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b>

“축하드립니다. 순산입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가족들은 기뻐합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에 나온 아기는 울고 있고, 아이를 낳은 어머니 역시 해산의 고통을 통과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에는 호흡을 시작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평범한 출생의 장면 뒤에서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결국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왜 태어나는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가?

성장에는 아픔이 있고, 사랑에는 이별이 있으며, 건강에는 질병의 가능성이 있고, 살아 있음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립니다. 욥기의 엘리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불꽃이 위로 날아가듯이, 죄와 죽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고통받도록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출생에는 왜 고통과 죽음이 따라오게 된 것일까요?

<b>첫 번째 출생의 비밀</b>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죄와 죽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에게 분명한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선택의 끝에 죽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을 불신하여 그 말씀을 떠났고, 그로 인해 죄와 죽음이 인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후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 그리고 고통이 이미 존재하는 세상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출생이 지닌 비극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가지는 생명은, 죄로 인해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시한부 생명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 역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하면서,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왜 이미 한 번 태어난 사람에게 또 하나의 출생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출생으로 받은 생명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조금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새로운 출생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바로 이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통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입니다.

<b>큰 충격을 안겨준 책 한 권</b>

옥스퍼드 대학 시절의 휫필드는 누구보다 진지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와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감옥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죄를 이기기 위해 몸을 혹독하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종교적 노력도 그의 영혼에 참된 평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찰스 웨슬리가 그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의 『인간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쿠걸은 참된 신앙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휫필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휫필드는 훗날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빛이 자신의 영혼에 비치면서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질문은 달라졌습니다.

“나는 얼마나 종교적인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이후 휫필드가 평생 외친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거듭남, 외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

<b>몸은 가까웠지만 마음은 먼 사람</b>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맏아들입니다. 그는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기쁨의 잔치를 베풀자 그는 화를 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잘 따랐지만, 그의 말에서는 아버지를 기쁨으로 섬기기보다 자신의 수고를 계산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몸은 아버지 곁에 가깝게 머물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과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 안에 머무는 것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b>거듭나지 못했던 종교지도자</b>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고, 당시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착하게 살아라”, “기도를 더 해라”, “율법을 더 철저하게 지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필요한 것은 종교적인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 머무는 것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니고데모와 같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난 자에게 임하는 변화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즉 기독교는 죄인을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단순히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b>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b>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믿음에 대해 엄밀하게 구별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그들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지는 않습니다. 휫필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이라는 설교를 통해 이 구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휫필드를 자신의 영적 롤모델로 삼았던 스펄전은, 어떤 약에 대해 잘 알아도 그 약을 실제 복용하지 않으면 그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십자가와 부활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믿음이 단순한 지식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살아 있는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의 정죄와 영적 죽음 아래 있다면, 아무리 종교생활을 오래 하고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b>거의 그리스도인인가</b><b>, </b><b>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b>

휫필드의 대표적인 설교 가운데 하나가 「거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이고 아니면 아닌 것인데, 어떻게 ‘거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매우 엄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놀랍게도 이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3)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그분께 속한 사람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휫필드가 「거의 그리스도인」을 통해 경고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훌륭한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종교생활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자동으로 증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한 휫필드에게 참된 신앙은 본성의 내적인 변화와 하나님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이었습니다. 휫필드가 이 메시지를 강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역시 한때 종교적 열심을 참된 신앙으로 착각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8–29)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 안에 있는가가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죄와 죽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일 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b>죄 사함과 새로운 생명</b>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인간을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는 죄의 해결과 새로운 생명이 함께 나타납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죄 사함과 성령의 새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 안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휫필드는 「성령의 내주, 모든 참된 신자들의 공통된 특권」이라는 설교를 통해 참된 신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참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죄 때문에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죄는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여기에 구원의 놀라운 회복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들어갑니다.

<b>정죄에서 생명으로</b>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못 본 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책과 정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난 성도에게도 죄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평생 죄와 싸우며 거룩함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는 단순히 종교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고,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휫필드의 삶과 설교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찰스 웨슬리가 건네준 스쿠걸의 책 앞에서 젊은 휫필드가 마주했던 질문이자, 훗날 그가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당신은 거듭났는가?”

우리 역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종교생활은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도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나는 교회 안에만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내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는가?

<b>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b>

이제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 봅시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은 무엇일까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업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병이 드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일들도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모두 유한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불행입니다.

더 근원적인 불행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영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영원에서만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난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종교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불행은 아래와 같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누리는 참된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종교생활이 어느 정도의 위안을 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영원한 심판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에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지만, 어떤 종교적 행위도 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지난 3편에서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진정한 행복은 영원한 행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나지 못해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영원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한 구절 안에 두 영원이 있습니다. 영벌과 영생입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의 가장 큰 불행은 이 세상에서 원하는 행복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형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겁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불이 난 집에서 잠든 사람을 깨우는 외침이 사랑이듯, 심판에 대한 경고는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는 사랑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조금 더 행복한 종교생활을 위한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b>첫 번째 출생에서 두 번째 출생으로</b>

이제 처음 아기가 태어나던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첫 번째 출생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결국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는 것도 비극이지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죽는 것은 더 큰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번째 출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는 죄의 정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생명이 완성되는 날을 이렇게 보여 줍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

첫 번째 출생으로 시작된 삶에는 울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완성되는 날에는 더 이상 죽음도 울음도 없습니다. 휫필드가 평생 외쳤던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행복의 다섯 번째 여정에서 이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죄는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종교생활은 그 단절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출생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출생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행복에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합니다. 거듭남은 그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인간은 불행해지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행복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행복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행복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음 행복의 여정에서는 아래 제목으로 존 칼빈과 함께 그 문제를 살펴보려 합니다.

<b>행복의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
</b>&lt;br/&gt;]]></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Wed, 09 Sep 2026 06:17: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4"><![CDATA[행복의 순례]]></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1. 불에 탄 포도나무와 하나님이 심으신 가지 (겔 15~17)]]></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09]]></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에스겔 15장부터 17장까지 펼쳐지는 세 폭의 그림 앞에 섭니다. 첫 번째 그림에는 불에 던져지는 포도나무가 있고, 두 번째 그림에는 은혜로 아름다워졌으나 사랑을 배반한 여인이 있으며, 세 번째 그림에는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와 꺾인 백향목 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든 그림은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간이 그 하나님을 버린다면 무엇을 붙들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15장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십니다. 포도나무는 백향목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상수리나무처럼 단단하지도 않습니다. 

그 가치는 오직 열매에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잃은 포도나무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율법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았습니다. 

거룩한 이름이 거룩한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외형이 아무리 화려해도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장식된 마른 가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를 맺어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습니다. 

죽은 가지에 포도송이를 매달아 놓는다고 살아 있는 포도나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첫 질문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16장으로 넘어가면 한 갓난아이가 들판에 버려져 있습니다. 씻어 줄 손도, 품어 줄 사람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그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나님은 “먼저 깨끗해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에게 먼저 생명을 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씻기고 입히며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보다 은혜로 아름다워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금과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건강과 재물과 성공과 사랑, 심지어 하나님께 받은 은사까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단지 규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의 가장 깊은 뿌리는 행동보다 사랑의 방향에 있습니다.

그러나 16장은 배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잊었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셨고, 인간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17장에는 두 마리의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독수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며, 두 번째 독수리는 애굽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과 맺은 언약을 깨고 애굽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애굽의 말과 병거가 더 안전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번째 독수리가 있습니다. 돈과 사람과 권력과 세상의 지혜가 “나를 붙들면 안전하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재물의 날개도 접히고 사람의 날개도 지치며 권력의 날개도 결국 꺾입니다. 큰 날개가 큰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가장 강해 보이는 독수리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독수리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은 우리 곁을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불과 배신과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소망이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높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이제 독수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뻗으십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지를 취하여 심으십니다. “내가 심으리라.” 인간은 뽑았지만 하나님은 심으시고, 인간은 무너뜨렸지만 하나님은 세우십니다.

이 약속은 먼저 무너진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우실 소망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신약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그 궁극적인 성취를 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드기야는 자기 왕좌를 지키기 위해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인간의 왕은 자기 생명을 구하려다 왕국을 잃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영원한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오, 갈보리를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은 그 가지를 십자가에서 잘라 버렸다고 생각했고, 무덤에 넣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으신 가지는 죽음의 땅에서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돌문이 열리고 무덤이 비었으며, 죽음의 땅에서 부활의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배신의 죄를 자기 몸에 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충성 위에 있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위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에스겔 15장은 묻습니다. “너에게 이름만 있고 열매는 없는가?” 16장은 묻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17장은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두 번째 독수리의 날개를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 뒤에서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심으리라.”

인간은 뽑지만 하나님은 심으십니다. 인간은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세우십니다. 인간의 약속은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말은 바벨론도 애굽도 인간의 왕도 아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큰 독수리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가지, 우리의 왕이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가지 아래 피하고, 그 그늘 아래 쉬며, 그 생명에 붙어 있으십시오.

인간의 포도나무는 불에 타 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으신 가지에는 죽음도 꺾지 못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Tue, 08 Sep 2026 07:02: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50. 마음의 왕좌에는 오직 한 분만 (겔 12~14)]]></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08]]></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의 본성을 헤아려 봅니다. 사람은 때로 진리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서기보다, 달콤한 거짓의 품에 안기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위로는 한 영혼도 살리지 못합니다. 달콤한 거짓말은 아침 이슬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에스겔 시대의 유다 백성도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성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중얼거렸습니다.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경고의 구름이 오래 머물러 비를 뿌리지 않자, 그들은 구름 자체를 환상이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종 에스겔에게 엄숙히 말씀하셨습니다.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결코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계가 더디게 가고 하나님의 시계가 달리 간다고 해서, 그분의 약속과 경고가 취소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시간의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며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기이한 행동을 명하십니다. 낮에는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무거운 짐을 메고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벽을 뚫고, 그 어두운 구멍을 통해 짐을 끌고 나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설교요, 움직이는 예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자들은 자신들의 성벽이 영원히 안전하리라 믿었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의 발걸음을 통해 그들에게 외치셨습니다. “너희가 의지하는 그 안전은 한낮의 안개처럼 사라지리라!” 예루살렘의 왕도 밤의 어둠을 틈타 도망하려 할 것이나, 결국 사슬에 묶여 끌려갈 것입니다. 

성벽은 그를 지켜 주지 못하고, 왕관의 영광도 그를 구원하지 못하며, 인간의 지혜로운 계획도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피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영혼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위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이 코앞에 닥쳐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그 무서운 무감각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죄 가운데 잠들어 있으면서 평안하다고 느끼는 것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이 고요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진 것도 아니며, 심판이 즉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못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던 그 속담을 책망하셨습니다.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그분의 무능으로 해석했습니다. 심판이 지연되는 것을 심판이 없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죄를 승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에게 돌이킬 시간을 주시는 그 무한한 자비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은 늘 이렇게 돌아갔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인내를 멸시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합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죄인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아직 시간이 많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늘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 내일도 반드시 돌이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죄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게 하루를 더 내어 주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13장에 들어가면 더욱 심각한 그림이 펼쳐집니다. 백성들이 심판을 두려워해야 할 그 순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달콤한 노래를 부릅니다. “평강이 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벽은 이미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회칠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초가 썩어 문드러졌는데, 표면을 하얗게 칠하여 멀쩡한 집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일은 무너진 벽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무너질 벽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제거하지 않고 죄책감만 제거하려 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 평안하다고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죄인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종교적 진통제가 아닙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지를 드러내고, 그 죄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상처가 깊어 뼈까지 드러났는데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치료가 아닙니다. 기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데 “당신은 괜찮습니다”라고 속삭이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독약입니다. 참된 평안은 죄를 덮어 감추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데서 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에게도 피 흘리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충실히 전하는 용기입니다. 사람들의 귀를 간질이는 설교보다, 영혼을 살리는 진리가 천 배나 더 귀합니다. 14장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문제의 가장 깊은 뿌리를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장로 몇 사람이 에스겔을 찾아와 하나님께 묻고자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경건한 발걸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보십시오! 우상은 성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 안의 나무 조각상만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입술로 질문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라”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마음의 왕좌에서 우상을 끌어내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의 모든 우상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우상을 버리면 또 다른 우상이 그 자리에 올라오고, 돈을 내려놓으면 명예가 올라오며, 명예를 내려놓으면 자기 의가 왕좌에 앉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서도 반드시 무엇인가를 절대적인 것으로 붙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행동 몇 가지보다 훨씬 깊고 뿌리 깊습니다. 우리는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에스겔서는 뒤에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주실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새 영을 우리 안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4장에서는 심판의 엄중함도 번개처럼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의로 자기 자신만 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더 넓은 영적 원리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건이 나의 죄를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믿음 좋은 부모가 있다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 배우자가 있다고 그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지도 않으며, 훌륭한 교회에 다닌다고 교회의 신앙이 자동으로 나의 구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의를 빌릴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를 내 구원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으며, 욥의 경건이 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신약의 빛이 찬란하게 비칩니다.

노아도 우리 죄를 대신 질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도 우리의 정죄를 대신 받을 수 없었고, 욥도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들과 전혀 다른 한 의인이 나타납니다. 

자기 의로 자기만 건지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죄인에게 입혀 주시고 죄인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는 의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그분이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자기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으며,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다 마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안은 거짓 선지자들이 말한 “괜찮다”는 달콤한 말에서 오지 않습니다. 참된 평안은 십자가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무시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형벌이 온전히 담당되었기 때문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에스겔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무너지는 벽에 회칠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너진 인생에 회칠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에스겔 12장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3장은 말합니다. 거짓 평안은 무너집니다. 14장은 말합니다. 마음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신약의 복음은 우리에게 외칩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 그분 안에 심판을 피하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분 안에 죄 사함이 있고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너지는 벽에 회칠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우상을 숨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경고를 먼 훗날의 이야기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십시오.

거짓 평안은 죄를 그대로 둔 채 양심만 잠재웁니다. 복음의 평안은 죄를 십자가로 가져가 하나님과 실제로 화목하게 합니다. 거짓 평안은 심판 앞에서 무너지지만,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평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왕좌를 우상에게 내어 주지 마십시오. 왕좌에는 오직 한 분만 앉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왕,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왕으로 만들어 드려야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상을 내려놓고 그 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Mon, 07 Sep 2026 06:26:1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49. 영혼의 가장 큰 고통과 가장 큰 회복 (겔 8~11)]]></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07]]></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에스겔 말씀 앞에서 우리 영혼을 돌아봅니다. 우리 영혼에 닥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슬픔이 무엇이겠습니까? 재산을 잃는 것입니까? 건강이 시들어가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이의 무덤 앞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입니까? 
 
이것들은 참으로 깊은 상처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소리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성전은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여전히 뜰을 거닐었고,  제단은 여전히 형식적인 제물의 연기를 피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여호와의 백성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슬프게, 한 걸음 한 걸음, 문지방을 향하여. 오, 두려운 광경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소라니요!

8장에서 주님은 환상 가운데 종 에스겔을 붙들어 예루살렘의 거룩한 처소 한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선지자가 더 깊이 들어갈수록, 계시는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여호와께 바쳐진 바로 그 벽 안에 우상들이 숨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향로를 손에 들고 그것들 앞에 절하였고, 여인들은 담무스를 위하여 울었으며, 어떤 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등지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서 있으면서 그분께 등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단지 옛 이야기일 뿐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시장에 둘 수 있습니다. 시온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영혼은 성공이라는 금송아지 앞에 절할 수 있습니다. 손에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도 가슴 속에 우상을 감출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밀한 죄 주위에 벽을 쌓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벽을 뚫으라” 벽이 무너지자, 감추어진 형상들의 방이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났습니다.

영원하신 분의 시선을 막을 만큼 높은 벽은 없습니다. 그분의 얼굴빛이 채우지 못할 만큼 은밀한 골방은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그러므로 먼저 무너져야 할 우상은 성소 밖의 나무와 돌로 된 형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둥지를 튼 사랑스러운 우상들입니다. 돈, 자녀, 명예, 심지어 오랜 신앙 경력에 대한 자랑까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며 잃기를 더 두려워하는 그것이 바로 영혼의 우상입니다.

이윽고 9장이 이르렀고, 대기는 심판의 무게로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칼이 뽑히기 전에, 기록하는 먹그릇을 찬 한 사람이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읍을 두루 다니며, 그 가운데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온 성읍이 같아 보였으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셨습니다. 누가 죄를 사랑하는지, 누가 그 죄로 말미암아 슬퍼하는지 아셨습니다. 노아의 날에도 그러하였습니다. 홍수 전에 방주가 예비되었습니다. 애굽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문설주에 바른 피가 죽음의 천사를 피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오직 이제 피난처는 더 크고, 피는 더 귀합니다. 우리의 눈물도, 교회에 다닌 햇수도, 교리에 대한 지식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장차 올 진노에서 영혼을 가려 줍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마지막 날의 가장 큰 질문은 “세상에서 너는 무엇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너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느냐?”일 것입니다. 그리고 10장이 그 슬픈 행렬을 펼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버림이 아니라, 천천히, 마지못해, 마치 하나님의 심장이 머뭇거리는 것처럼. 그룹 위에서 일어나, 문지방에 잠시 머물고, 동쪽 문으로 옮기며, 마침내 성읍을 뒤로한 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까!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얼마나 자주 손을 내미셨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그들이 돌이키지 않자, 영광이 떠났습니다. 여기에 죄의 가장 무서운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금이나 건강이나 이름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잃고 그리스도를 얻으면,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부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잃고 세상을 얻으면, 그는 가장 가련한 거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러나 이 어두운 하늘에도 11장에서 한 줄기 소망의 별이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흩어진 남은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

여기 복음의 새벽이 밝아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깊은 병은 바벨론도, 무너진 성벽도, 정치적 몰락도 아니었습니다. 돌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귀머거리요, 죄에 무감각하며, 경고에도 놀라지 않고, 우상을 붙잡으면서도 여전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마음.

그러므로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환경의 변화도, 더 많은 지식도, 더 강한 결심도, 더 부지런한 종교생활도 아닙니다.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죽은 자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 하나님을 미워하던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죄를 기뻐하던 사람이 그 죄로 슬퍼하기 시작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도망치던 사람이 이제 그분의 상한 옆구리로 달려가 그 안에서 값진 진주를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물고”

성전은 남았습니다. 제단은 남았습니다. 종교의 형식은 남았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떠났습니다. 노래는 있으나 사랑이 없고, 기도는 있으나 찾는 마음이 없으며, 설교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없고, 교회는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종교가 있습니다.

단지 묻지 마십시오. “나는 교회에 다니는가?” 이렇게 물으십시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이렇게도 묻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가?” 다시 이렇게 물으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네 엄숙한 장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아침처럼 분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많은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가셨습니다. 우리는 멀리 방황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시려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지금도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건강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갈채를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것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성전은 서 있을 수 있으나 영광은 떠날 수 있습니다. 형식은 계속될 수 있으나 생명은 없을 수 있습니다. 입술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져도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파멸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잃어도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얻고도 그리스도를 잃는다면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가?”입니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감각한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주님, 내 영혼의 은밀한 방에 숨은 우상들을 보여 주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걷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주님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영혼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느끼는 것이며, 영혼의 가장 큰 회복은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un, 06 Sep 2026 06:30: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48. 그리스도 안에서 맞이하는 끝의 의미 (겔 4~7)]]></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06]]></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에스겔 4장에서 경고로 시작된 하늘의 음성이 7장에 이르러 반복적으로 “끝이 왔도다”라고 외치는 음성을 듣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에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마치 끝없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살아갑니다. 

젊음의 꽃이 시들고, 건강의 강물이 말라가며, 재물의 금빛 사슬도, 명예의 관도 결국 먼지로 돌아갑니다. 마침내 생명의 실이 끊어질 때, 우리는 모두 그 고요하고도 엄숙한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장 떨리는 음성으로 선포하는 끝은, 무덤의 침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끝까지 거절한 영혼이, 마침내 공의의 보좌 앞에 서는 그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영원한 밤이 내려앉는 때입니다.

그런데 왜 끝이 오기 전에 미리 경고하셨을까요?  멸망만이 목적이었다면, 나팔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경고가 있다는 것은, 아직 들을 귀가 열려 있고, 아직 돌아갈 길이 남아 있다는 자비의 증거입니다. 

심판의 먹구름 속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은빛 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이상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왼쪽으로 삼백구십 일, 오른쪽으로 사십 일을 누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라 하셨습니다.  

죄는 얼마나 가볍게 시작됩니까? 한 번의 거짓말, 한 순간의 욕심, 한 줄기 음란한 생각, 한 번의 불순종, 사람들은 그것을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죄는 쌓입니다. 오늘의 죄 위에 내일의 죄가 포개지고, 내일의 죄 위에 또 다른 죄가 층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죄를 짓지만, 나중에는 죄가 우리를 짓밟습니다. 마치 작은 눈덩이가 굴러 산더미가 되듯, 죄는 우리를 압도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도 하루아침에 찾아온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새벽이슬처럼 보내셨고, 회개의 문을 밤낮으로 열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참으심을 무관심으로 오해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심판이 즉시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늘이 눈을 감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심판이 늦어지는 그 시간은, 죄를 더 쌓으라고 주신 여유가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주신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끔찍한 그림이 펼쳐집니다. 양식이 저울에 달려 나누어지고, 물은 한 모금씩 아껴 마시게 됩니다. 

포위된 성읍의 공포가 그 장면을 채웁니다. 한때 그들은 풍족한 식탁과 든든한 성벽과,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설마 예루살렘이 무너지랴?” 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오랜 착각입니다. 돈이 있으면 안전하리라. 건강하면 아직 시간이 많으리라.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무난하리라. 그러나 전능자가 생명의 촛불을 끄시는 날, 무엇을 붙잡겠습니까?  

재산도, 지위도, 건강도, 심지어 종교적 경력의 긴 목록도, 심판대 앞에서는 한 줌의 재로 흩어질 뿐입니다. 우상은 돌과 나무로 조각한 형상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성공과 명예, 심지어 종교적 자부심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붙잡은 것들을 흔드십니다.  
미워하셔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십니다. 4장에서 심판의 그림자를 보여 주셨고, 5장에서 그 무서움을 말씀하셨으며, 6장에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7장에서 하늘이 끝을 선언합니다. 더 떨리는 말씀도 있습니다.  

“은도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금도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리라”(겔 7:19)

평소에는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습니다. 집도, 음식도, 치료도.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는 금도 은도 죄인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는 사라집니다. 히브리서는 엄숙히 선포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날, 무엇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 에스겔 4장의 장면을 바라봅시다. 선지자는 옆으로 누워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그 죄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더 멀리, 골고다의 언덕으로 이끕니다. 그곳에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이사야는 외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베드로도 증언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에스겔은 죄의 무게를 몸으로 보여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의 무게를 실제로 지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진노의 잔을 다 마신 그분이, 죄인에게 생명의 잔을 내미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복음은 피할 곳을 보여 줍니다. 노아의 시대에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가 준비되었듯이,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피난처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피난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심판으로 들어가는 검은 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열리는 황금 문입니다. 동일한 “끝”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이에게는 세상의 끝이 영원한 밤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에게는 이 세상의 끝이 영원한 아침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3)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보다 강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두 번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 받을 정죄를 이미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은 “끝이 왔다”는 말씀을 두려움으로만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마지막 날이 찾아올 때, 세상은 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순간, 하늘이 열어 주신 문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Sat, 05 Sep 2026 06:43: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www.bog.or.kr/?kboard_redirect=32"><![CDATA[스펄전 핵심 설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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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47. 하나님의 통치 아래 진행되는 역사 (겔 1~3)]]></title>
			<link><![CDATA[http://www.bog.or.kr/?kboard_content_redirect=1405]]></link>
			<description><![CDATA[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펼쳐든 에스겔서는 화려한 성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에서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패배하여 끌려간 바벨론의 그발 강가, 포로의 땅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자유를 잃었으며,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이” 에스겔에게 나타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장소를 잃었다고 하나님까지 잃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이 무너졌다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국경을 넘어 포로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어느 나라의 국경에도 갇히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과 큰 구름과 번쩍이는 불이 밀려옵니다. 그 가운데 네 생물이 나타나고, 각각 네 얼굴과 날개를 가졌으며, 그 곁에는 신비로운 바퀴들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낯설고 두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세부의 기괴함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은 혼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물들이 움직이면 바퀴도 움직이고, 그들이 멈추면 바퀴도 멈춥니다. 어디로 가든지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은 때로 바퀴가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왕국이 무너지며, 우리의 인생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모든 바퀴 위에 더 높은 보좌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바퀴가 보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보좌가 바퀴를 다스립니다. 역사가 하나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네 생물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이 있고, 그 위로 보좌가 있고, 그 보좌 위에는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보였습니다. 

에스겔은 그것을 보고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만난 사람의 첫 반응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참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기 영광을 자랑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커질수록 인간의 교만은 작아집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크게 보지만, 하나님을 크게 보는 사람은 자신을 작게 봅니다. 에스겔에게 필요한 것은 바벨론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치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문제보다 보좌가 높습니다. 당신의 원수보다 보좌가 높습니다. 당신의 미래보다 보좌가 높습니다. 2장에 들어가자 보좌의 영광 앞에 엎드린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그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린 사람을 다시 세워 말씀을 맡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힘으로 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너졌다가,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에스겔은 반역하는 백성에게 보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결과는 선지자의 통제 아래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매우 엄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이 좋아할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사람입니다. 청중의 박수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씀이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받아들여질 때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먼저 두루마리를 주십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이 순서를 보십시오. 먼저 먹고, 그다음 말하라.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말씀을 자기 영혼이 먹어야 합니다. 머리에만 말씀을 담고 입으로만 전달하는 사람은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지식이 되기 전에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설명하기 전에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 전에 그 말씀이 먼저 우리 자신을 찔러야 합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으니 입에서 꿀같이 달았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용은 무거운데 맛은 달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육체에는 쓰게 느껴질 때가 있어도 믿음에는 달기 때문입니다. 

죄를 꾸짖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달고,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는 말씀도 진리이기에 달며,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도 우리를 멸망에서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기에 귀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달콤한 말씀만 원할 때가 많습니다. 

위로는 듣고 싶지만 책망은 싫어하고, 복은 원하지만 회개는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취향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말씀을 먹은 후 자기 마음의 완고함을 가진 백성에게로 갑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마를 그들의 이마보다 굳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에스겔에게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반대와 조롱에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물러서지 않을 담대함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보다 목소리가 큰 것이 아닙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3장 후반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은 성벽 위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멀리서 오는 위험을 보고 나팔을 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여기에 선지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경고하지 않아 그가 죄 가운데 죽는다면 그 책임을 파수꾼에게도 물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경고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는다면 파수꾼은 자기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렵습니다. 사랑은 때때로 경고해야 합니다.  

누군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데 “당신이 행복하다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불이 난 집에서 잠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부드러운 자장가가 아닙니다. 깨우는 외침입니다. 복음에는 위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도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심판은 실제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만일 죄에 심판이 없다면 십자가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면 구주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의 파수꾼 사명은 먼저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선지자적 사명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와 구원의 부르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선포되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분은 죄를 가볍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심판을 경고하신 분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로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파수꾼은 위험을 알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위험을 알리실 뿐 아니라 자신이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심판이 온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그분이 마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 아래 그분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나팔은 두 가지 소리를 냅니다. 죄인아, 깨어나라. 그리고 그리스도께 피하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에스겔 1장은 말합니다. 보좌는 움직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2장은 말합니다. 말씀은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되어야 합니다. 3장은 말합니다.  
그 말씀은 먼저 먹어야 하고, 그다음 파수꾼의 나팔처럼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영광 앞에 다시 서십시오. 말씀을 먹으십시오. 그리고 경고를 들으십시오. 바퀴를 보며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퀴 위의 보좌를 바라보십시오. 환경을 보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영광을 가장 밝히 보여 주시는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역사의 바퀴가 아무리 거칠게 돌아가도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밀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br />]]></description>
			<author><![CDATA[Blessing of God]]></author>
			<pubDate>Fri, 04 Sep 2026 06:35:28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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